[Review] 붉은 에너지의 향연 - 뮤지컬 '적벽' [공연]

경쾌하고 호탕한 적벽대전
글 입력 2022.09.05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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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적벽’은 중국 소설 『삼국지연의』 중 적벽대전 장면을 차용한 판소리 ‘적벽가’를 기반으로 제작되었다. 칼군무와 판소리 합창의 강한 매력으로 지난 2017년 첫선을 보인 후 대중성까지 거머쥔 작품으로, 4년 연속 공연되며 판소리와 현대무용의 만남으로 재구성한 전통예술의 신(新)장르를 개척했다는 평을 받아왔다. 개인적으로는 지인들의 호평이 자자해 원래부터 관심이 있던 극이었다.

 

‘적벽’은 치열한 전쟁 적벽대전의 스토리를 판소리 합창과 다이내믹한 춤을 동시에 소화해 내는 배우들의 열연과 절창이 무대를 뜨거운 에너지로 가득 채우며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그리고 현대무용의 동작과 힙합, 스트릿 댄스의 동작들을 활용한 안무로 드라마틱한 장면을 더욱 극적으로 묘사한다. 이처럼 다양한 장르가 녹아들어 있음에도 전통이 굳건히 자리 잡아 뼈대를 이루는 현대의 전통예술 작품은 정말 볼 때마다 놀라운 기분이 들었다.

 

 

2022 적벽 (8.20-9.29) 포스터.jpg

 

 

신기한 점은 내한한 해외 뮤지컬을 볼 때처럼 무대의 사이드에 프롬프터로 자막이 나온다는 점이었다. 자막이 없어도 한국 창작 뮤지컬이니만큼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라 여겼는데, 정말로 없었다면 감상에 어려움이 조금 있었을 것 같다.

 

볼거리가 많아 가뜩이나 눈이 바쁜 공연이었는데, 자막까지 보려니 눈이 두 배로 바빴다. 그리고 자막이 나옴에도 불구하고 한자어와 고어(古語)가 가사와 대사의 대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조금 더 수월한 이해를 위해 적벽대전의 대략적인 내용을 미리 알고 보러 간다면 좋을 것 같아 그 내용을 아래에 첨부한다.

 

 

위, 한, 오 삼국이 분립하고 황금 권좌를 차지하기 위한 쟁탈전이 난무한 한나라 말엽, 유비·관우·장비가 도원결의로 형제의 의를 맺고 권좌를 차지한 조조에 대항할 계략을 찾기 위해 제갈공명을 찾아가 삼고초려 한다. 오나라 주유는 조조를 멸하게 할 화공(火攻)을 펴기 위해 전전긍긍하는데, 때마침 그를 찾아온 책사 공명이 놀랍게도 동남풍을 불어오게 한다. 이를 빌어 주유는 화공으로 조조군에 맹공을 퍼붓고, 조조는 아무런 반격도 하지 못한 채 적벽에서 크게 패하고 만다.

 

 

2022 적벽 (3).jpg

 

 

오랜만에 마주한 판소리는 정적으로 감상해야 하는 공연과는 확실히 다른 결을 지니고 있었다. 과장된 몸짓과 호들갑 떠는 연기, 씩씩한 창법은 관객들을 절로 웃음 짓게 만들었고, 중간중간 시원한 기합이 흥을 돋웠다. 나도 그에 응수하듯 ‘어이!’하고 기합을 담아 리액션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와그르르르르~’하는 의성어나, 한 단어를 무한히 늘여 간드러지게 노래하는 점도 재미있다. 힘껏 찢어지는 듯한 판소리 특유의 소리는 말에 찰떡같이 엉겨 붙어 옹골찬 느낌을 냈다. 공명에게 삼고초려를 하러 가는 장면에서 세 형제를 맞이하는 동자의 노래는 마치 옥구슬이 굴러가는 것 같아 소름이 쫙 돋았다.

 

이렇듯 ‘적벽’의 넘버는 판소리 창법이 주를 이루지만, 뮤지컬에서 사용되는 요소가 군데군데 조화롭게 섞여 있었다. 예를 들어, 다 같이 부르는 대목에서는 화음이 쌓이기 보다는 같은 음을 다 함께 불러 노래에 힘을 싣는다. 대부분의 넘버에서는 북을 기본으로 소수의 악기만이 추가되어 간결한 반주가 깔리지만, 웅장한 장면에서는 밴드 구성이 도드라지는 음악이 연주된다.

 

특히 전투가 일어나는 장면에서는 신명난 드럼 소리가 들려왔다.

 

 

2022 적벽 (8).jpg

 

 

뮤지컬 ‘적벽’을 이루는 인물에 대한 극 중 묘사는 매우 직관적이라, 성격을 파악하는 데에 골머리를 쓰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시원스러운 매력이 있었다.

 

장비는 극의 누구보다도 감정이 솔직하게 드러나는 뚜렷한 캐릭터여서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톡톡히 했다. 관우는 강렬하되 절도 있는 동작을 취했다. 유비는 가장 정적인 캐릭터였지만, 분위기와 태에서부터 그 비범함이 드러났다. 조조는 기존에 알고 있던 이미지와 달리 과장되고 위세등등 하다가도 간사한 모습을 보이며 꽤나 우스꽝스러운 인물로 그려졌다.

 

군중들의 반응 역시 즉각적이다. 실컷 웃으며 해학의 정서를 드러내고, 사무치도록 구슬피 울며 한의 정서를 드러낸다. 또한 군중들의 칭송과 위세를 업고 영웅서사를 이뤄낸다는 점에서 ‘적벽’은 고전적인 면모가 다분했다. 그리고 ‘군사점고’ 넘버에서처럼 이름 없는 군사들이 등장하여 자신의 목소리를 직접 표출하는 장면에서 왕후장상과 영웅 중심의 이야기인 『삼국지연의』와 구별되는 적벽가의 특징을 개성 있게 재현해냈다.


여성 캐스팅 또한 주목할 만한 점이다. 장비, 공명, 조자룡 등의 역할이 여성으로 등장하는 적벽은 색다른 무게를 지닌다. 특히 캐릭터가 뚜렷한 장비 역을 맡았던 소리꾼 정지혜는 일전 아랑가에서 도창 역으로 보았던 적이 있어 무척이나 반가웠다.

 

 

2022 적벽 (7).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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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는 적벽대전의 스펙타클한 서사를 함축적이고 상징적으로 묘사하는 매우 중요한 도구로 등장한다. 부채의 하얀색과 빨간색의 대비는 편을 가르는 가장 확실한 표상이었고, 펼치는 모습에 따라 창과 방패가 되며 드는 이의 캐릭터에 걸맞는 무기로써 구현되었다. 떨리는 부채는 감정을 대신하는 섬세한 언어적 표현이 되기도 했고, 때로는 들고 있는 부채를 내려놓음으로써 죽음의 표현이 되기도 했다.

 

한 사람이 드는 부채와 여러 명이 드는 부채는 그 위상이 다르다. 영웅의 위엄을 표출하기도 하고, 타오르는 불길을 표현하기도 한다. 공명이 동남풍을 일으키는 장면에서는 화려한 종교의식을 치르는 모습을 이루었다. 놀라운 에너지를 뿜어내며 그림처럼 펼쳐지는 부채춤의 장관에 가히 눈을 뗄 수 없었다. 부채를 검으로 활용하는 검무에서는 전사의 위용이 그대로 드러났고, ‘둥덩실’과 같은 의성어, 의태어를 닮은 안무가 재치 있고 독특했다.

 

2층의 시야는 무대 일부가 가려져 있어 일부 인물의 극적인 등장을 눈으로 확인할 수 없다는 점이 무척이나 아쉬웠지만, 대신 춤의 대열을 보기에는 매우 좋은 시야였다. 사자놀음처럼 졸졸 따라붙는 군무나, 군중들의 고개나 몸이 일제히 누구를 향해 있는지를 통해 극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부분이 확연히 드러났다. 또, 다행히 극의 특성상 동작이 매우 큰 덕분에 행동 하나하나가 멀리서도 잘 보였고, 말을 타는 모습은 목마를 통해 표현되기도 했다.

 

 

2022 적벽 (4).jpg

 

  

극의 분위기를 주도한 것은 단연 깔끔한 흰색의 무대 위에 더해진 강렬한 원색의 조명이었다. 또한 도창은 비스듬한 계단을 올라 막을 알리며 이야기꾼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무대의 깊이감을 만드는 액자식 구성은 흐름을 관조하는 인물이나 중요한 장면을 강조하여 표현하는 장치가 되었다. 이처럼 극에 사용된 모든 요소들이 조화롭게 맞물려 이야기를 구현하는 하나의 힘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마침내 적벽대전에서의 대치가 시작되자 흰색과 빨간색, 흑색이 뒤엉켰다. 죽은 군사들의 원혼이 새가 되어 우는 전쟁터이지만, 뮤지컬 ‘적벽’이 그려내는 적벽대전은 마치 거대한 축제 같았다. 그 화려한 모습에 눈이 홀렸고, 전쟁의 모습을 생동감 있게 재현하는 가사에 귀가 홀렸다.

 

본래 적벽가의 주제는 충과 의에 대한 강조, 조조로 대표되는 지배층에 대한 풍자, 군사들로 대표되는 빈한한 평민들의 안정적인 삶 추구, 전범적인 영웅에 의한 질서의 회복이다. 이를 하나의 예술로써 경쾌하고 호탕하게 풀어낸, 뮤지컬 ‘적벽’이었다.

 

 

[민정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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