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귀족적인 간판 사이에 삐져나온 어리석음 - 책 '엽란을 날려라'

글 입력 2022.09.04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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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웰의 거울상 고든 콤스톡


 

오늘 리뷰할 책 '엽란을 날려라'는 1936년에 출판된 조지오웰의 책이다. 이 책을 쓸 때 조지 오웰은 파리와 런던에서 하층민 생활을 경험하고 그 안에서 발견한 가난의 문제에 남다른 관심이 있었다. '콤스톡은 재미만 빼놓고 이야기하자면 오웰이다'라는 말처럼 주인공 콤스톡은 오웰의 실제 삶과 매우 닮았다.

 

오웰은 식민지배의 관료 가문의 중산 계급에 태어나 귀족들이 다니는 이튼 스쿨을 졸업했다. 졸업 후 제국주의 경찰로 근무하지만, 자신의 직업에 환멸을 느끼고 자신 역시 이데올로기의 부속품에 지나지 않는 것을 깨닫는다. 젊은 오웰은 자신의 가문과 전체주의의 경찰로서 부당한 돈을 벌었다는 죄의식과 작가로 성공하는 야심을 동시에 가진다. 그는 양손에 두 마음을 안고 예술적 성지로 불리는 파리에 상경한다. 하지만 젊은 작가의 낭만과는 반대로 그는 현실적인 가난의 벽 앞에서 고통을 받는다. 46세 결핵으로 사망하기 전까지 그는 가난한 삶을 살았다.

 

오웰이 그랬던 것처럼, '엽란을 날려라'의 주인공 콤스톡도 중산층 집안에서 태어나 광고회사에 취직하여 '좋은 직업'을 가지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그는 광고가 '돼지 같은 대중들의 먹이통 안에 들어 있는 막대기의 달가닥거리는 소리'라 생각하며 자신의 직업을 경멸한다. 이윽고 콤스톡은 '좋은 직업'을 때려치우고 작가가 되기 위해 '돈의 신'과의 전쟁을 선포한다.

 

콤스톡은 물질적 가치에 대항하기 위해 몸부림치지만, '위협적인 바람'처럼 휘몰아치는 현실적인 고통이 그의 삶을 날카롭게 휩쓴다. 콤스톡은 돈의 신이 삶의 모든 측면을 지배하는 방식에 굴복하지 않고 경멸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콤스톡은 일반적인 가정에서 장식품으로 사용하는 엽란을 자본주의의 상징으로 놓는다. 콤스톡은 모든 것을 전당포에 맡기지만 엽란만은 굳게 지키는 굶주린 목수의 소설을 읽고 엽란을 중산계급 위선의 상징으로 본다. 이른바 돈의 절망적 노예가 되었음을 상징한다고 믿는다.

 

돈에 대한 반항심은 소설에서 점점 더 집착으로 발전해나간다. 그는 부유한 친구인 래블스턴에게 돈을 빌리는 대신 누나에게 손을 벌리고, 여자인 로즈메리의 비용을 무리하게 대신 지불하려고 한다. 콤스톡은 자신이 가난하기 때문에 로즈메리가 자신과 동침하지 않는다고 굳게 믿고 그녀를 괴롭힌다. 심지어 그는 가난이 자신의 사고를 좀먹어 글을 쓰지 못한다고 믿게 된다. 점점 더 가난의 수렁에 빠지게 되고, 우정과 사랑, 작가로서의 희망마저도 하나씩 잃게 된다. 그럼에도 그는 모든 대화를 돈으로 귀결시킨다.

 

돈의 신에 굴복하느니 죽음을 선택하려고 한 콤스톡은 결국 로즈메리의 임신으로 광고 회사로 돌아간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순간, 그는 중산층의 활기를 느낀다. 그는 마지막 순간 엽란에게 승리를 선포한다. 그는 평균적인 '중산계급 콤스톡 가문'의 역사를 이어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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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적인 간판 사이에 삐져나온 어리석음


 

2개월전 적금을 깨트리고 뮤지컬을 보러 갔다. 압구정역에서 친구와 떠들면서 거리를 돌아다니는데, 온 사방에 '노블' 같은 수식어로 결혼정보회사나 소개팅 간판이 붙어있었다. 현대사회에서 다시 만난 계급은 진심으로 나에게 역겨움을 유발했고, 그 단어는 낙인처럼 박혀 나를 오랜 시간 동안 괴롭혔다.

 

우아한 글씨체로 금박 영어로 박힌 '노블'함, 그것이 나에게는 엽란이었다. 나는 무리해서 부유한 문화생활을 즐겼고, 어쩌면 그 안에는 현대사회에서는 분명 유지되어서는 안 되는 '노블'한 것이 숨어있었다. 나의 얄팍하게 숨겨진 위선을 고발하듯이 모든 건물에 부드러운 글자가 뻔뻔스러운 모습으로 빼곡하게 차있었다. 그런 방식으로 구별 지어진 이 역겨운 단어는 어두운 방에 깜빡거리는 전등처럼 나의 일상생활을 감시했다.

 

내가 경험했던 방식뿐만은 아니다. 콤스톡의 삶은 현대사회에서 거칠고 생생한 색채로 다양하게 재현된다. 오웰이 글을 쓰던 시절과 비교해 사회 체제와 사상은 발전했지만, 위선과 불안은 더 은밀한 방식으로 진화해왔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읽는 동안은 고든 콤스톡의 투쟁과 불행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내가 콤스톡의 인생을 실제로 경험한 기분이었다.

 

이 소설이 가난뱅이 예술 청년의 독백 기라고 해도 뭐라 할 말은 없지만, 그가 선택한 방식은 무모할 정도로 정직해서 이상한 감동을 준다. 그래서 콤스톡의 투쟁은 몇십 년 전 젊었을 때 쓴 이 글은 우리 사회의 평균적인 젊은이들의 삶을 관통한다. 이 소설의 가장 큰 비극은 오웰이 동정심을 가지고 바라본 빈곤 문제가 오늘날까지 이어진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오웰은 좋은 학교, 좋은 직장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가 인간의 얼굴을 가리고 사회를 좀먹는 것을 알았다. 학생과 경찰 시절 그가 숭배했던 가치는 인간의 얼굴을 파괴하는 도구였고, 인간은 자신이 삐걱거리는 것조차도 인지하지 못하는 부속품들이었다. 오웰을 닮은 콤스톡은 돈도, 이데올로기도 아닌 인간의 얼굴을 찾길 간절히 바랐다. '엽란을 날려라'에서 그는 나락으로 치닫는 선택만을 반복하지만, 그는 최소한 성실하게 '엽란'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에서 영웅적 인간이라 할 수 있다.

 

체제나 돈에 대한 맹목적인 부정은 그를 파멸로 이끌었다.그래서 개인적으로 콤스톡이 로즈메리와 살아갈 신혼집에 엽란을 놓는 것을 온전히 절망적인 상황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그의 말대로, 중산층 노동계급의 얄팍한 위선과 활기는 세상을 변화시키지 않는다. 그는 중산층 계급 콤스톡 가문 중 하나로써 세상의 파멸에 일조하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래블스턴의 말대로 '자본주의에 대해 장황한 이야기를 늘어놓지만, 오직 가능한 대안을 수용하지 않는 방법'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실제로 콤스톡은 돈을 포기함으로써 그의 삶을 포기할 뻔 했다. 그리고 그를 다시 소시민의 영역으로 돌아오게 한 로즈메리와 래블스턴은 그래서 그가 엽란에게 고한 패배는 그가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패배였다.

 

사실, 콤스톡의 패배가 실제로 성공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나머지 부분은 독자가 채워넣어야 하는 부분일 것이다. 콤스톡의 패배는 나에게 더 많은 질문을 남겼다. 오웰이 글을 쓰던 시대와 비교해 화폐적인 가치는 더 교묘한 방법으로 삶의 전 영역으로 파고들었다. 문화는 더욱 과시적이고 속물적으로 변하고, 개개인은 자신의 눈코입을 서랍에 넣었는지, 냉장고에 넣었는지, 변기에 넣고 내렸는지도 모르게 되었다.

 

인간은 정신적인 존재만은 아니지만, 물질적 존재만도 아니다. 인간의 삶에서 돈을 도려낼 수 없지만, 돈만이 인간을 유지하지 않는다. 오웰은 언제나 인간의 얼굴을 찾고자 했다. 그는 죽는 그 순간까지도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것처럼, 이데올로기도, 돈도 인간을 억압할 수는 없다. 글을 다 읽고 나니, 문득 가난하고 부족한 조르바는 춤을 가르쳐 주는 장면이 생각난다. 그 일부를 인용하고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우리는 많은 양의 술을 마셨고, 양고기를 뼈까지 다 발라먹었다.

세상이 가벼워지기 시작했고, 바다가 웃고 있었으며, 땅이 배의 갑판처럼 흔들렸다.

갈매기 두 마리가 자갈밭 위를 날며 꼭 사람들처럼 대화를 나누었다.

내가 일어섰다.

"자, 조르바, 이리 와서 내게 춤을 가르쳐줘요."내가 소리쳤다.

조르바가 펄쩍 뛰어 일어났다. 그의 얼굴이 번개 치듯 빛났다.

"대장, 춤이라고요?"그가 말했다. "춤이라고요? 좋아요!"

"자, 조르바, 내 삶을 바꿔줘요! 자, 시작합시다!"

 

- 그리스인 조르바

 

 

나는 모든 돈을 잃었다. 인부들도, 케이블도, 짐수레도 다 잃었다. 화물 수송을 위한 조그만 항만까지 만들었는데 이젠 수송할 것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모든 것을 다 잃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전혀 예기치 않았던 자유를 느끼고 있다.마치 무뚝뚝한 필요의 여신의 딱딱한 두개골 안 좁은 구석에서 자유의 여신이 놀고 있는 것을 발견한 것 같았다. 그리고 나도 그 여신과 함께 놀고 있었다.

모든 것이 우리가 바랐던 것과는 정반대되었을 때, 우리의 영혼이 끈기와 그럴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면, 우리가 느끼는 기쁨은 오히려 엄청나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이라고 하고, 다른 이들은 악마라고 부르는, 보이지 않는 전지전능한 적이 우리를 쓰러뜨리려고 덤벼들지만 우리는 물러나지 않고 꼿꼿이 서서 저항하는 것과 같다. 그리하여 겉으로는 힘에 굴복한 패배자처럼 보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승리자가 될 때마다, 진정한 사나이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긍지와 기쁨을 느낀다. 그리고 외면적인 불행은, 보다 더 드높고 여간해서는 맛볼 수 없는 행복으로 승화된다.

 

- 그리스인 조르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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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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