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현재보다 앞으로가 더 궁금한 전위예술가, 박지형 (2)

글 입력 2022.08.29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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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턴트 당산나무>, 철, 모터, 한삼, 111x111x124cm. 2021.

 

 

무속의 현대적 해석을 담은 설치 작품이다. 살면서 별다른 풍파가 없었지만 그는 점차 시간이 갈수록 마음이 각박해지고 지쳐갔다. 어딘가에 기대고 싶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그러다 작년 경험이 떠올랐다. 오래 사귄 애인과 이별하고 그 슬픔을 오방색이 잔뜩 들어간 주술적 도구이자 회화 작품을 제작하며 극복했던 일이다. 그때 ‘무속’이 형이상학적 방식으로 그에게 안정을 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요즘의 우울함도 무속에 의지하며 극복해보고자 <인스턴트 당산나무>를 제작했다. 먼저 무속이란, 국어사전에 의하면 무당과 관련된 풍속을 말한다. 그는 무속을 민속(민간생활과 결부된 신앙, 습관, 풍속, 전설, 기술, 전송 문화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중에 주술적 행위가 포함된 종류를 칭하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무속이라는 단어를 인식하게 된 것은 중학교 1학년. 사이비 종교재단의 예술학교에 다녔던 그는, 매주 ‘인성’이라는 이름의 종교수업을 들었다. 그 수업은 여러 가지 종교와 기타 형이상학적인 개념들을 가르쳐 주었다. 그날은 무당에 대해 배우는 날이었다. 선생님께서 틀어준 다큐멘터리는 충격적이었다. 신내림을 받은 어린 무당이 괴로워하며 자동으로 올라가는 팔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장면이 지금도 생각난다고 한다. 그는 강한 충격과 영감을 받았다. 이게 바로 그가 매력을 느끼는 분야라는 것을 알았다.

 

사실 구체적인 단어만 몰랐을 뿐이지 그는 무속이 자연스럽게 흐르는 분위기에서 성장했다. 매년 계절마다 제사를 지냈다. 민속문화인 설날 추석 돌잡이를 경험했다. 또한 한국인이기 때문에 오방색을 보고 느끼는 공통적인 감정 또한 큰 의미의 무속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후 대학에 와서 민화 등 한국의 전통적인 조형에 점점 더 관심을 가지게 된 그는 자연스럽게 무속까지도 작품에 넣게 되었다. 무속이 주는 익숙함에 끌리는 것이다. 그러던 중 ‘한국의 전통과 민속문화’ 수업을 통해 당산나무와 오방색 등 전통 무속에 대해 자세히 배우게 되었다. 마치 타국에서 한국어 간판을 볼 때의 반가움처럼 무속 또한 그에게 익숙함을 통한 안정을 주었다. 그는 힘들 때 기댈 곳이 필요했고, 소원(건강과 종강 등)을 빌 대상이 필요했다. 따라서 이용할 무속적인 이미지들을 생각하다 당산나무가 떠올랐다.

 

당산나무는 소원을 들어주는 기능이 있기 때문이다. 소원을 들어줄 수 있는 지신(地神)이나 신줏단지 등 다른 무속들도 존재하지만, 하필 당산나무가 떠오른 이유는 나무만큼 친절하게 그늘을 내어주는 우직한 대상이 그가 기대고 싶은 조건이기 때문이다. 또한, 서낭당 당산나무의 오방색 천이 매여 있는 강렬한 이미지 또한 시각적 취향에 부합했다. 그러나 전통적 당산나무와 <인스턴트 당산나무>는 차이가 있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전통적인 당산나무의 기능은 다음과 같다. 당산나무는 신격화된 나무로 고을 지킴이 신이 깃들여 있는 것으로 모셔지기도 하지만 마을 또는 고을의 지킴이 그 자체로 승화되어 있기도 하다.

 

다른 자료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람들은 나무에 다가서서 소원을 빌었다. (중략) 하늘에 닿을 듯 높이 솟아올랐다. 사람들은 나무를 향해 하늘까지 우리의 소원을 전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나무에게 소원을 전달하는 예를 정성 들여 치렀다. 해마다 빠짐없었다. 이 땅의 당산제는 그렇게 이어졌다. 사람의 소원을 하늘에 전달하는 이른바 영매 노릇을 하는 나무를 사람들은 ‘당산나무’라고 불렀다.’ (고규홍, 「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당산제와 당산나무」, 『경향신문』, 2021.07.13.)

 

이처럼 당산나무는 전통적인 마을의 형태에서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기능을 했다. 위 자료에서 보듯 당산나무에 소원을 빌기 위해서는 성실한 치성과 강한 믿음, 그리고 나무를 아끼고 섬기는 정성이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당산나무를 찾아가 소원을 비는 것은 어려웠다. 누가 이렇게 바쁘고 개명한 시대에 멀리 있는 나무를 추앙하며 섬기고 치성을 드릴 수 있을까? 그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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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만들고자 하는 작품에서는 당산나무가 갖고 있는 듬직함과 소원을 들어주는 기능만 취하고 싶었다. 따라서 전통적 당산나무의 기능과 의미만 가져왔다. 작품 제목에 붙은 인스턴트는 이 작품이 전통적 당산나무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쁜 현대사회 속 편리한 작동을 제일 큰 특징으로 내세운다. 즉석에서 간편하게 소원을 빌 수 있는 당산나무라는 점에서 ‘인스턴트’를 작품의 제목에 넣었다. 따라서 그가 제작한 당산나무는 전통적인 당산나무와 형태 면에서 꽤 차이가 있다. 우선 전통적 당산나무는 마을의 수호신이기 때문에 그 마을에 깊게 뿌리내린다. 무거워서 못 옮기는 것 이상으로 아예 이동이 불가능한 존재이다.

 

그러나 <인스턴트 당산나무>는 옮기는 것이 가능하다. 그는 현대적 무속이 간편함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한다. 요즘에는 설날에 차리는 차례상도 인스턴트 밀키트로 판다. 예전에 비해 들이는 정성이 부족할지언정 그 형태와 의미는 그대로다. 비슷한 이유로 그 또한 당산나무를 옮길 수 있도록 제작했다. 무속 행위를 위해 마을의 당산나무까지 찾아가는 것이 아닌, 언제 어디서든 의지를 하고 싶었다. 얼른 소원을 빌 수 있는 것뿐만 아니라 작업실 안처럼 전통적 당산나무가 침입하지 못했던 공간에서도 소원을 빌 수 있다. 심지어 모터-본체-오방색 천으로 분리되는 형태이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차에 실어서 여행지에서도 소원을 빌 수 있다.

 

다음으로 재료 역시 전통적인 당산나무와 거리가 있다. 자연 속 나무는 살아있고, 그러므로 두려운 존재다. 그러나 여기서 재료로 한 금속은 서늘하고 냉정하다. 금속으로 된 냉정한 나무에 소원을 비는 것도 우스운 일이며 여기에 소원을 비는 사람은 실제 거대한 나무에 소원을 비는 것보다 조금은 가벼운 마음을 갖게 된다. 이 나무는 자라지 않고 살아있지도 않기 때문에 무리한 소원을 들었다고 해서 앙심을 품지도 않는다. 따라서 냉정하게 할 말만 하고 떠나도 괜찮다. 이것 역시 그가 무속을 재해석한 부분이다.

 

<인스턴트 당산나무>의 움직임은 실제 나무의 움직임에서 착안했다. 나무가 바람에 흔들릴 때 천이 흔들리는 모습을 연출하기 위해 모터를 달았다. 모터를 달고 천이 회전하는 모습은 작품이 영험하고 무속적인 존재로 보이게 한다. 탈춤을 추는 사람 같기도 하다. 탈춤 또한 안녕을 기원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일맥상통하는 지점이 있다.

 

또한 소원이 시작되는 움직임의 시작을 위해 버튼을 만들었다. 앞서 말했듯이 기원의 행위가 매일 정화수를 떠다 놓는 것이 아닌 버튼을 누르는 것만으로도 성립된다. 버튼을 눌렀을 때 움직이는 것은 영험한 나무가 돌아가며 소원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버튼을 누르는 행위는 이것이 기계라는 사실, 필요에 의해 작동한다는 점을 극대화해준다.

 

전통을 재해석할 때 형태 또한 단순화하는 것 같다. 마치 몬드리안이 점점 나무를 단순하게 그리다 선 몇 개만 남긴 것처럼 <인스턴트 당산나무>의 가지 5개와 천 5개도 전통적인 당산나무에서 많은 가지를 치고 중심 줄기만 남긴 것과 같다.

 

<인스턴트 당산나무>에 소원을 빌면 생각보다 마음이 편해진다. 무속을 현대식으로 변형하며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이 작품이 과연 당산나무의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꽤 의지가 되었다. 일단 소원이나 걱정을 털어놓을 상대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마음이 편해진다. 그리고 이 작품이 가진 이름과 오방색 천이 소원을 들어줄 것만 같아 믿음이 간다. 오방색이 무속적인 설득력을 가지고 있고, 전통적인 안정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무속을 재해석하는 방식은 결론적으로 기능과 이름 등 본질은 전통과 같지만 움직임과 재료 면에서 편리한 형태로 변화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편리한 형태’란 물리적으로 간소화된 형태와 그것이 취하는 냉정한 태도를 말한다. 전통적인 당산나무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며 맥을 이어간다는 점, 힘든 대학생이 의지할 수 있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인스턴트 당산나무>는 의미가 있다. (2021)

 

 

-무속에 대한 관심은 교실에서 본 영상의 강한 충격과 영감, 그리고 대학에 와서는 익숙함에 끌린다고 하셨는데, 강렬한 새로움과 익숙함 중 어디에 더 끌리는지 궁금해요.

 

너무 재밌는 질문이네요. 당연히 강렬한 새로움에 주로 끌리는데 익숙함이 주는 ‘어쩔 수 없는’ 끌림도 무시할 수 없어요. 그래도 새로움이 낯설다는 이유로 버리고 싶지 않아서 강렬한 새로움에 더 끌리도록 스스로를 유도하는 것 같아요. 말이 좀 괜찮았나요? (웃음)

 

 

-그럼 <인스턴트 당산나무>는 새로움인가요 익숙함 쪽인가요?

 

이건 둘 다 있는 것 같아요. 일단 오방색과 당산나무라는 한국인에게 익숙한 개념을 이용했고, 동시에 제가 처음으로 용접기술을 사용해서 만든 작품이기도 하거든요. 이 작품을 만들고 싶어서 일부러 조소과 수업을 듣기도 했어요.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걸 경험하면서 이전에 해왔던 것과는 다른 걸 만들 수 있는 힘을 얻게 된 것 같아서 이 작품을 좋아합니다.

 

 

-<인스턴트 당산나무>는 소원을 빌기 위해 단순히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됩니다. 전통적인 개념과는 달리 소원을 위한 ‘정성’이 빠진 것 같은데 이마저도 간소화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나요?

 

정성을 간소화시켰다기 보다는 편리함을 추가했다고 생각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편리함을 추구한다고 정성이 떨어지는 건 아니니까요.

 


-본인의 작품을 마주하는 이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는지, 혹은 작품을 마주하는 관객들이 지녔으면 하는 느낌이란 게 있나요?

 

제가 처음 무당을 접했을 때의 느낌을 관객들도 받았으면 좋겠어요. 무서운데 도저히 눈을 뗄 수 없었던 경험이 정말 강렬했어요. 색깔이나 움직임도 마음에 들었고요. 종교는 따로 없지만 한국인으로서 DNA에 축적되어 있던 경험이 폭발한 것일 수도 있고, 그런 알 수 없는 힘에 대한 경외심에 이끌린 것 같기도 해요. 그런데 사실 신내림, 점치기 이런 것들이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그냥 벽에다 오방색 줄을 매달아 놓고 그들만의 의식을 보여주는 그런 건데 왜, 어떻게 그런 힘이 나오는 건지, 그리고 그런 ‘뭉클함’을 제 작품을 통해서도 표현하고 싶어요.

 

 

-뭉클함이라는 게 가슴이 먹먹한 그런 느낌을 말씀하신 게 맞나요?

 

음… 가슴이 먹먹한 건 조금 슬픈 뉘앙스가 있는 것 같고, 엉뚱한 비유이긴 한데 엄청 꾸덕꾸덕한 브라우니 먹으면 목이 막히잖아요. 그런 느낌? 근데 그 막히는 느낌이 심장에 있는 거죠. 목이 아니라.

 

 

-재밌는 표현이네요. 그럼 본인의 작품을 매개로 관객과 소통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가 있을까요?

 

계속 고민중인 부분인데, 아직까지 뚜렷한 하나의 목적은 없는 것 같아요. 조형적인 형식의 발달에 힘쓰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그걸 최종적인 목표로 보기엔 어려울 것 같네요.


 

-제작함에 있어 특별한 에피소드가 있거나 더 특별하게 애착이 가는 작품이 있나요?

 

<원초적 공포; 학관과 검은 점>이라는 30분짜리 퍼포먼스 작품이요. 취업, 돈 등 걱정을 가진 대학생들이 이런 미래에 대한 공포에 공감하면 저에게 검은 점을 붙여서 제가 점점 까만색이 되는 퍼포먼스였어요. 20대가 되고 처음 한 퍼포먼스라 좋아하기도 하지만 그때 제가 예술을 사랑하는 마음이 느껴져서 참 애착이 갑니다.

 

 

-사람들이 검은 점을 얼마나 붙여줬나요?

 

퍼포먼스를 하다 보면 정말 사람들이 저에게 관심이 없다는 걸 깨달을 수 있어요.(웃음) 친구들 제외하고는 두 분이서 붙여주셨네요.

 

 

-‘퍼포먼스’라는 게 정말 작가와 관객의 소통이 필수적인 장르잖아요. 그게 정말 쉽지 않아서 작가 입장에서는 어떨까 늘 궁금했어요.

 

작가 입장에서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을 보면 슬프죠. 그런데 요즘 하는 고민은 관객을 작품 완성의 수단으로만 쓰면 안된다는 거예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찾는 중입니다. 두 번째 생각으로는 제가 하는 퍼포먼스들이 허술해서 관객들이 참여를 안 하나 싶기도 해요. 어딘가 미흡하기 때문에 관객의 참여를 유도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 하는 그런 고민. 마지막으로는 역시 사람들이 미술에 관심이 없구나. 만약 미술관에서 퍼포먼스를 한다면 많이 참여하겠지만 저처럼 길거리에서 하면 아무래도…

 

 

-퍼포먼스를 진행할 때면 용기가 많이 필요할 것 같아요.

 

용기는 필요 없어요. 너무 괜찮아요. 예술, 사랑하니까.

 

 

-주로 퍼포먼스 작품을 많이 선보이는 이유가 있을까요?

 

항상 튀고 싶고, 이상한 걸 하고싶었어요. 그때 딱 퍼포먼스가 떠오르더라고요. 그러니까 처음에는 튀고 싶어서 시작한 것 같은데 점점 하면 할수록 배우는 게 많네요.

 

 

-이야기를 듣다 보니 튀고 싶은 이유가 궁금하네요.

 

제가 어릴 때 예술가들이 유명한 이유는 튀기 때문에, 모난 돌처럼 튀어나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들을 동경하면서 ‘나도 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아요. 그런데 요즘에는 그보다는 튀기 전에 일단 자기 작품이 있고, 좋은 작품을 하는 작가가 먼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돼요.

 

 

-그럼 작가님이 생각하시는 ‘좋은 작품’은 어떤 건가요?

 

본인 욕구에만 충실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작품이요. 인류가 가진 문제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는. 아직 저는 그 단계에 도달하지 못한 것 같아요. 사실 평생 그런 단계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마지막 질문이에요. 다시 주제로 좀 돌아와서. “박지형에게 판타지란?”

 

이런 얘기하면 너무 슬픈가요. 계속 미술을 할 수 있는 게 판타지 같아요. 그런데 이루어질 수 있는 판타지요. 환상적인 세계. 저는 그런 세계에서 살고 싶어요.

 

*


오랜만에 만난 그는 여전히 쾌활한 모습이었다. 대화를 이어가다 인상적인 내용이 나오면 휴대폰 메모장에 후다닥 적어두는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작업 슬럼프에 빠져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대화를 나누다 보니 예술에 대한 사랑과 자기 표현 욕구에 대한 간절함이 절절히 느껴졌다.

 

살면서 절박하고 간절한 순간은 수시로 찾아온다. 입시 전에는 합격이 가장 간절했지만 막상 입학하고 보니 자퇴가 하고싶고(물론 투정에 불과하다) 이젠 취업이 가장 간절하지만 곧 퇴사와 재취업이 간절해질 것을 안다. 목표를 이루고 나면 새로운 갈망이 생기기 마련이다. 대상만 변할 뿐, 우리는 어쩌면 계속해서 간절한 상태 속에서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평생 고정된 목표가 있다는 것은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어딘가 지루하다 여겼기 때문이다. (재밌는게 최고) 하지만 그에게 간절함의 대상은 어쩌면 변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예술을 계속 하는 것, 좋은 작품을 만들어 세상에 기여하는 것. 그리고 이를 ‘이루어질 수 있는 환상’이라고 답하는 그. 그가 도달한 환상의 세계에서 전위예술가 박지형을 다시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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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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