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당신] 사랑하는 나의 느티나무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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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느티나무, 할아버지께
해식님의 산수연, 할아버지의 팔순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1943년 이 세상에 눈을 뜨시고, 올해로 8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벌써 강산이 바뀌는 세월보다 더 지났네요. 할아버지와 단둘이 걸었던 초등학교의 하굣길이 선명히 떠오릅니다. 구구단도 외지 못했던 9살짜리 손녀의 손을 잡고 “이일은 이, 이이는 사, 이삼 육, 이사 팔”이라 묵묵히 말씀해주셨죠. 할아버지의 손은 제게 참 커다랗고, 또 할아버지의 키는 너무 높게만 느껴지던 때입니다. 지금은 어느덧 할아버지와 눈높이가 딱 맞아 얼굴을 마주보고 어깨동무를 할 수 있게 되었지만요.
초등학교가 이른 오후쯤에 끝나면 느티나무 아래에서 할아버지는 가만히 앉아계셨어요. 이따끔씩 카메라를 들어 벚꽃이 아름다이 피는 날이면 초등학생 손녀의 모습을 정성스레 담아주셨죠. 아직도 그 사진들을 보면 세상 물정 모르던 시절의 봄내음이 반짝이며 떠오릅니다. 그리고 딱 한달 전 할아버지와 함께 산과 계곡으로 둘러싸인 캠핑장에 갔을 때 제가 사진을 찍어드렸죠. 할아버지가 저의 어린 모습을 예쁘게 담아주셨던 예전과 달리, 이제는 제가 새로운 카메라를 들고 할아버지의 2022년을 담았습니다. 세월이 야속한 것 같기도, 순리대로 지나와 고맙기도, 뭉클하기도 한 순간들이었어요.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할아버지의 큰 손을 잡고 마포초 뒷문에서 우성아파트를 지나 마을버스 정류장을 향해 가는 길은, 그렇게 마치 어제 일처럼 느껴집니다. 김포 홈플러스 마트에 매일 도장을 찍었던 코흘리개 '장난감 콜렉터' 시절을 지나, 모범생인 동시에 말썽부리던 소녀시절을 지나, 이제는 어엿한 사회인으로서 삶을 그려나가는 손녀가 되었어요. 시간이 참 빠르게 흘렀지만 순간순간마다 할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자란 마음은 온전한 저의 세포가 되었습니다.
문득 중학생 시절 할아버지와 걸었던 추운 겨울날의 동네가 생각나네요. 당시 북쪽 사람들도 무서워한다는 '중2병'에 제대로 갇혀버린 저는 어머니와 깊은 갈등에 빠져있었습니다. 무시무시한 중2병이었습니다. 세상 누구와도 소통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몹시 복잡하고 답답한 15살이었어요. 부정적인 생각과 분노에 휘말려 어쩔줄 모르고 집을 빠져나와, 가까이 사시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께 쪼르르 찾아갔던 날을 기억하시죠.
그때 할아버지가 보여주신 단단한 삶의 자세는 여전히 가슴 속에 깊이 새겨져있습니다. 제 마음이 다치지 않게 조심조심 보살펴주시고 공감하시면서도, 세상에 하나뿐인 어머니에 대한 예의와 감사를 잊지 말라고도 단호하게 말씀해주셨죠. 할아버지의 목소리에는 손녀를 향한 따뜻한 사랑과, 걱정과, 동시에 잘 이겨낼 거라는 믿음이 굳게 맺혀있다는걸 느낄 수 있었어요. 할아버지께서 그렇게 따뜻하고도 명확한 방향을 제시해주셨기에 올곧은 길을 향해 걸어왔습니다. 평생 잊을 수 없는 가르침을 주신 그날을 잊지 못합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해식님, 할아버지에 있어서 80년의 시간은 어떤 나날들이었나요? 저는 할아버지를 든든한 ‘나무’로 표현하고 싶습니다. 나무는 모든 생명력을 받드는 존재입니다. 잎사귀와 꽃, 줄기와 가지를 든든하게 받치고 있죠. 나무 곁에는 다양한 동식물과 나비와 새들이 찾아옵니다. 나무가 없다면 깨끗한 공기를 마실 수 없고, 숨쉴 수도 없습니다. 연약한 생명들에게 나무는 삶의 동앗줄입니다. 이렇듯 저에게 있어서, 우리 손녀들에게 있어서는 해식님은 굳건한 느티나무입니다.
할아버지가 100세까지, 아니 그 보다 더 오래사셨으면 하는 바람 혹은 욕심이 있습니다. 부디 이 손녀가 더욱더 큰 사람이 되어 할아버지께 넘치는 효도를 마음껏 할 수 있게 해주세요. 지금도 물론 할아버지의 입가에 미소가 가시지 않도록 '현재진행형' 효도를 실천하고자 노력하고 있지만요. 하지만 받은 사랑에 비해 다시 드릴 효도가 너무나도 많이 남아있습니다. 오래토록 저희 곁에서 행복하게, 건강하게 계셔주세요.
할아버지 앞에 펼쳐진 앞으로의 삶에서 건강과 평안이 함께하길 간절히 소망하고, 기도합니다. 할아버지, 팔순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태어나주셔서 감사합니다.
영원히 사랑합니다!
2022년 8월 27일
할아버지의 첫 손녀 신지예 올림
[신지예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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