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모퉁이 앞, 선택과 우연 사이에서 - 영화 '모퉁이'

글 입력 2022.08.16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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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퉁이에서 기다리고 있는 그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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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원은 아침이 되면 일어나 이부자리 정리를 하고, 씻은 다음 글을 쓴다. 차분하게 정돈된 삶의 모습이 스크린에 펼쳐진다. 성원은 나레이션으로 말한다. “다시는 무너지지 않고 제대로 잘 살아보기로 했다.”


하지만 무너지고 무너지지 않고를 자신의 의지만으로 결정할 수 있었던가. 제아무리 무너지지 않고 살 것이라 결심해도, 모퉁이를 도는 순간 불쑥 맞닥뜨리게 되는 것 앞에서 급브레이크를 밟지 않을 수 없다.

 

모퉁이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손님일까 불청객일까. 성원이 영화과 동기 중순의 전화를 받고 함께 단골집 ‘개미집’으로 가던 중 길모퉁이에서 마찬가지로 동기였던 병수를 마주치며 <모퉁이>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73분의 짧은 러닝타임 동안 영화는 관객에게 많은 걸 말해주지 않는다. 성원과 중순, 병수의 대화를 통해 이들이 한때 절친했지만 몇몇 사건으로 지금은 껄끄러운 관계가 되었음을 관객은 짐작할 뿐이다. 구체적인 상황 대신 영화가 집중하는 것은 이들이 자의든 타의든 수많은 선택 끝에 지금에 이르렀다는 사실이다.


성원은 이 모든 게 자신이 영화를 만들려고 하다가 벌어진 일이라고 말한다. 중순은 그게 아니라 영화를 만들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니냐고 답한다. 급기야 10년 전 그들이 놀러 간 계곡에서 뛰어내리던 순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무서워서 뛰지 못한 자신과 달리 거침없이 뛰어내렸던 병수를 생각하며 삶의 분기점이 거기서부터 시작된 게 아닌지 묻는 것이다.

 

한 가지 선택만 다시 한다면 지금과 다른 결과가 펼쳐질 것 같지만, 정말 모든 게 그 선택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지금’을 만드는 선택은 너무나 많고, 심지어 그 선택이 모두 우리의 의지였다고 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어떤 선택은 선택이라기보다 우연이라고 하는 게 더 적절할 것이다. 성원과 중순, 병수의 불편한 술자리처럼 말이다.

 

 

 

No surprise, 기승전결 없는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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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퉁이>의 영제는 ‘No surprise’다.

 

GV에서 영제에 대해 궁금해하는 관객에게 신선 감독은 ‘모퉁이’를 그대로 영어로 번역하려니 한국어에서 묻어나는 느낌이 나지 않아서 아예 다른 제목을 붙였다고 했다. 덕분에 ‘No surprise’는 ‘모퉁이’와는 상반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모퉁이가 자연스레 그 너머를 상상하게 하며 불안과 호기심을 자아낸다면, No surprise는 어떤 일이 일어나도 놀랄 것이 없는 상태가 연상된다.


실제로 영화의 분위기는 ‘No surprise’에 가깝다. ‘영화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멀어졌던 사람과 갈등을 풀고 다시 가까워지는 건 뻔해서 싫다는 성원의 대사처럼, 영화에서는 좀처럼 해결되는 일이 없다. 화를 내는 사람도 없다. 인물들은 쉽게 읽을 수 없는 표정을 하고, 그 자리에서 공백을 메꾸기 위한 말을 간신히 할 뿐이다. 이 세계에서 사람들은 부딪히지 않고 조금씩 멀어지기만 한다. 이러한 멀어짐은 종종 문학적인 대사로 표현되며 자칫 밋밋할 수도 있는 영화에 울림을 준다.


더불어, 이들의 이야기는 전혀 특별하지 않다. 영화는 성원, 중순, 병수 이 셋을 중심으로 진행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셋이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다양한 장치를 통해 보여준다. 은유와 은유의 과 친구들은 그중 하나다. 은유는 성원과 병수가 각각 다른 시간대에 방문한 카페의 알바생으로 등장하고, 개미집에서도 이들과 우연히 마주치게 된다. 그 이상의 대단한 얽힘은 없다. 개미집에서 중순이 마시려던 콜라를 은유가 술에 취해 집어 드는 정도다.


영화는 때때로 성원과 중순, 병수에게서 벗어나 은유와 친구들을 비춘다. 세 사람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드라마틱한 장면을 기대하던 관객은 성원과 중순, 병수도 은유의 입장에서는 지나가는 ‘행인1’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렇듯 우리는 모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서로의 삶 속 아주 사소한 부분에 관여하며 서로가 서로의 엑스트라로 살아간다. 영화는 이러한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려 한다.

 

 

 

'무너지지 않는 삶'이란 없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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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승전결이 뚜렷하지 않은 <모퉁이>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을 꼽자면 중순이 병수의 죽음을 성원에게 알리는 장면일 것이다. 병수의 죽음은 의뭉스럽다. 장례도 치르지 않고 바로 화장을 해서 장례식에 가본 사람이 아무도 없는 데다가 어떻게 죽었는지 제대로 아는 사람도 없다.


어떤 사람이 죽는 것과, 그 사람을 평생 안 보고 사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평생 안 보고 소식도 안 듣고 산다면 내게는 그가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병수의 죽음은 관계의 종말을 의미하기도 한다.

 

병수가 죽기 전날 밤, 병수와 성원은 시시한 베개싸움을 벌인다.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앙금이 지난 10년간 그들을 미약하게나마 이어주었다면, 10년 만의 재회와 그로 인한 베개싸움은 이들이 그 이상으로 주고받을 뭔가가 없음을 보여준다. 더 이상 오갈 게 없기 때문에 관계는 끝나버렸고 병수는 죽은 것이다.


영화에서 언급되는 또 다른 죽은 사람은 개미집 사장이다. 교통사고로 죽었다던 그는 영화 끝에 멀쩡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의 존재로 인해 더욱더 이 영화에서 죽음은 비극이나 슬픔이 아니라 알 수 없는 것, 정해지지 않은 상태로 읽힌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는 모두가 살아 있는 모습으로 행복하게 웃으며 개미집에서 대화하는 꿈 같은 세계가 나온다. 그것이야말로 ‘다시는 무너지지 않는 삶’의 모습일 것이다. 불가능하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기에 그 장면은 어딘지 모르게 씁쓸하다. 모두 그런 삶을 은연중에 목표로 두고 살아가지만, 우리가 내리는 선택과 우연은 생각지 못한 곳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성원은 영화를 만들었을까. 중순은 더 이상 손바닥에 ‘죽지 말자’를 쓰지 않아도 될까. 영화가 끝나면 현실의 삶과 너무 닮아서 답을 할 수 없는 질문만이 멤돈다.


 

[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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