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여성은 두 개, 남성은 세 개인 것 [문화 전반]

몸을 둘러싼 피곤한 시선들
글 입력 2022.08.13 15:08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여름의 녹진함이 짙어질수록 드러나는 살갗이 많아진다. 옷차림이 가벼워진다는 것은 그만큼 덜 가꾸고 덜 꾸미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여름은 몸 외부에 덧씌워진 겉치레를 덜어내는 만큼 몸에 딱 달라붙어 있는 것들도 탈탈 털어버리는 계절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털이다. 팔에 거뭇거뭇 올라온, 혹은 산적처럼 기다랗게 자라난 털은 제거 대상 일 순위다. 다리털도 마찬가지. 반팔 티셔츠와 민소매를 당당히 입기 위해선 겨드랑이 제모도 필수인 것 같다. 더불어 콧속, 손등, 발등, 브라질리언 왁싱은 어느덧 트랜드를 넘어 예절로 인식되기도 한다.


부끄럽지만 나는 남성이라는 위치에 기대어 이것들을 엄청난 신경을 쏟아 관리하지는 않았다. 남성은 어느 정도 털이 있어야 한다는 괴상한 논리를 믿어온, 아니 편히 앞세워 온 것이었다. 털을 비롯해 내 몸에 있는 것들이 하나둘씩 마음에 들지 않고 기어이 보기 싫어지기 전까지는 그 신조를 믿어왔다.

 

하나둘 ‘관리’를 시작하면서 절로 나오게 된 말이 있다. “벌써? 너무 귀찮아.” 이것들은 꼴도 보기 싫은데 왜 이렇게 빨리 자라는지. 이들이 무서운 속도로 자라나는 만큼 소모품인 관리 용품 또한 빠르게 닳아갔다. 이것들은 비싼데 또 왜 이렇게 빨리 기능을 잃는지. ‘여름철 관리’란 자기혐오와 자기만족과 자기검열 사이를 어지러이 떠다니는 중노동임을 깨달았다.


이쯤 되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는 ‘진리’ 하나. 여성들에겐 털이 없는 게 어색하지 않고 오히려 당연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더 당연하게, 털이 자연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사람은 드물다. 남성과 여성을 막론하고 인간이라는 동물은 대개 다량의 체모를 갖고 있다. 여성의 털에서 오는 낯섦은, 단지 하나의 의견이 강력한 진리가 되어 여성 대부분이 시간과 돈과 노력을 들여 제 몸을 소모하게 만들고 있는 현상에서 발생한다.


이러한 행위는 자기 몸을 거부하고 제거한다는 부정적인 기저 아래 진행된다. 성별과 젠더를 막론하고, 누군가의 몸이 쉽고 가볍게 재단되고 논란거리가 되는 것은 부적절하고 무례하며 포악하다. 다만 아이러니하게도 비슷한 유무형의 폭력 이후 남성은 일종의 해방을, 여성은 일종의 억압을 마주치는 경향이 큰 것처럼 보인다.

 

 

[크기변환]다운로드 (3).jpg

 


성격, 직업, 외형 등 많은 분야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유두에 관한 부분이 지금까지 눈에 띈다. 최근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옷을 못 입는다고 질타받는 남성 출연자를 다른 남성 출연자가 드레스업 해주는 콘텐츠가 방영됐다. 같은 프로그램에서 몇 년 전부터 심심치 않게 반복된 일화다. 그때마다 변함없이 주가 되었던 것은 남성 출연자의 큰 가슴, 큰 유두다. 다시 말해 ‘제 3의 눈’이다. 패션이 아니라 유두가 메인 콘텐츠로 느껴질 만큼 언급된 횟수, 희화화된 횟수가 많았다. 제 3의 눈, 해시계 등 노골적으로 언급되고 해당 부위에 각종 CG 처리가 된 부분도 많았다.


누군가의 옷차림을 비웃고 개선의 대상으로 치부하며 특정 신체 형태를 조롱하는 것은 당연히 적절하지 않다. 여기서 더 유심히 봐야 할 것은 조롱거리가 된 그 남성은 겉보기에 방송 이후 절대 자기 유두를 내비치지 못할 것 같지만, 그렇게 꾸준히 노출되고 희화화되면서 남성의 유두는 동시에 ‘웃긴 것’, ‘센스 없는 것’, ‘당연한 것’ 등으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이는 일시적으로 남성의 유두 노출을 제한하지만 그것이 노출되었을 때도 익숙함을 갖게 하여 역설적으로 억압의 대상에서 해방하는 효과를 준다. 즉 남성이 유두가 있는 건 당연하며 그걸 비추는 것 또한 가볍게 지나갈 만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더불어 남성은 그 과정에서 주체적으로 풍부한 논의를 형성하고 웃음을 자아내며 다른 이들의 편견을 지적할 수 있게 된다. 애초에 이런 과정 역시 남성의 노출과 행동에 더 관대한 문화가 자리했기에 가능할 것이다. ‘고툭튀’, ‘젖툭튀’를 직접 보여주며 고치는 방법을 소개하는 남성의 영상은 많이 있어도 그러한 여성의 영상이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현재 우리는 앞서 언급한 일화의 주인공이 여성 출연자가 될 수 있을 것이란 말엔 절대 ‘No’를 외칠 것이다. 실제로 같은 프로그램의 한 여성 출연자는 길거리에서 속옷을 입지 않아 옷에 유두 모양이 비쳤다는 이유만으로 각종 ‘논란’을 ‘일으켰다’라고 기사가 쏟아졌다. 이 여성은 누군가를 때리지도, 속이지도, 불법 약물을 먹지도 않았다. 단지 일상적으로 길을 걸었을 뿐이다.


어떤 남성의 유두가 지상파 인기 예능에서 메인 콘텐츠로 다뤄질 때 어떤 여성의 유두는 웃긴 것, 센스 없는 것, 당연한 것 어느 한 축에도 도달하지 못했다. 어떠한 다른 논의도 생성하지 못하고, 생성되지 않은 채 성적으로만 대상화되어 음란하고, 생각 없고, 반항적이고, 페미니즘 ‘할 것’ 같은 존재로 평가되었을 뿐이다.


 

[크기변환]사본 -SE-b75d4ce4-e209-4e32-bb70-033a0d18287b.jpg

사진 출처 - 네이버 블로그, 당니네

 

 

털과 마찬가지로 성별을 막론하고 인간 대부분은 역시 유두를 갖고 있다. 그러나 많은 분야에서 남성은 무언가를 보일지 말지 선호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반면 여성에겐 필수라는 선택 아닌 선택만이 강요된다. 요즘 세상에 그런 법도 없고 누가 그걸 강요하냐고 마음대로 하라는 말이 무책임한 것임은 앞서 말한 유두 사례에서 충분히 증명된다.


유두를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선 속옷을 착용하든지 니플 패치를 착용하는 등의 추가적인 노동을 해야 한다. 애초에 유두를 보이지 말아야 할 이유조차 없지만, 물건을 사고 답답함을 감내하는 것에 대한 재정적 지원이나 보상 역시 전무하다. 너무나 명시적인 억압이기 때문이다.


여성 드랙 아티스트 쇼에서 상의 탈의를 하여 ‘유두 해방’을 이루는 퍼포먼스가 진행되는 것에도 이러한 맥락이 담겨 있을 것이다. 몸은 그 자체로 어떠한 가치를 갖고 있지 않다. 몸에 대한 특정한 시선이 투영됐을 때 비로소 그 시선의 소유자에게 특정 가치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 가치가 적절한가에 대한 다층적인 논의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개인의 가치를 앞세워 타인의 행위를 억압하는 것의 폭력성을 인지해야 한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특정한 옷차림을 명령할 수 없다. 속옷도 당연하다. 속옷의 일차적인 기능은 신체를 외부로부터 보호하는 데에 있다. 그 보호 여부를 판단할 권리는 어떠한 타인에게 양도되지 않고 자신만이 갖고 있다. 자신이 불필요하다고 판단하면 특정한 옷을 입지 않는 것은 말하기 민망할 만큼 당연하다.

 

남성에게 성기는 소중하니 타이트한 삼각팬티를 최소 두 겹 입어야 한다고 말하며, 모든 눈초리가 그 여부를 확인하는 데 쏠려있다면 진작 ‘삼각팬티 혁명’이 일어났을 것이다. 아마 메인 슬로건은 내 팬티는 내가 알아서 해’ 정도가 될 것이다.

 


[크기변환]다운로드 (5).jpg

  

 

그 누구도 원하지 않는 이미지가 몸에 찐득하게 달라붙을수록 편안히 존재할 수 없다. 편안과 불편을 넘어 모든 행동에 자기 부정의 씨앗을 심어놓는다. 남성의 몸에 얹어진 억압의 이미지도 물론 많지만, 그것에서 파생된 몇 곱절의 이미지가 여성의 몸에 얹어진다. 여성은 평생을 쓸모없는 추가 무게를 감내해야지만 살아갈 수 있다. 왜 그들이 그렇게 되어야 하는가? 왜 우리가 그렇게 되어야 하는가?


당신이 옷에 비친 여성의 유두를 그토록 거부하는 데에는 무슨 이유가 있는가? 결국 그 기저엔 여성의 가슴은 노출되면 안 된다는 ‘으레 그런, 당연한 상식’이 자리하고 있지 않은가? 그 상식이 어떤 기준과 시선으로 만들어진 얼토당토않은 것이며 당신이 그것을 믿는지는 우선 논외로 치자. 다만 자신만의 믿음을 토대로 타인에게 일말의 영향을 끼칠 자격도 의무도 염치도 없다는 것만 우선 알아두자.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지그시 눈을 감고 가던 길을 가면 된다.

 

단지 동료 인간으로서 우리가 할 일은 서로에게 씌운 편견의 렌즈를 한 올 한 올 벗겨내는 것이다. 그렇게 최대한 왜곡 없이 깨끗하게 서로의 눈을 직시하는 것이다. 직시하는 대상의 주체적인 선택을 그저 지켜보는 것이다.


대체 언제까지 반복되어야 하는가.

 

 

 

컬쳐리스트 태그.jpg


  

[정해영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3.28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