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완벽한 인생은 없다는 걸 리소프린트에서 배워요." - 일러스트레이터 고수진

글 입력 2022.07.27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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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서울일러스트페어는 700여 개의 부스와 그 부스를 찾은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그중에서도 시선을 잡아끄는 부스는 있기 마련이다. 브랜드 이름이나 활동명이 아닌 ‘고수진’이라는 이름 석 자 아래에 형광색이 도드라지는 색감의 포스터와 카드가 가득했다. 그 한켠에는 프린트기에 쓰이는 드럼이 놓여 있었다. 호기심을 보이는 사람들에게 손짓을 하며 열심히 설명하는 사람이 이 부스의 주인장인 고수진 작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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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들과 함께 설명을 듣다 보니 주로 리소프린트 형태의 작업을 주로 하는 작가이며, 아예 집에 리소프린트기를 들여놓고 인쇄까지 직접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신기해하는 사람들에게 리소프린트를 하는 인쇄소며, 중고 리소프린트기에 대한 정보까지 알려주는 모습을 보며 궁금증이 생겼다. 어쩌면 ‘영업비밀’일지도 모르는 이야기를 망설임 없이 나누고 같이 고민해주는 모습에서 리소프린트를 향한 깊은 애정이 느껴졌다.

 

그로부터 약 열흘이 지난 7월 19일, 고수진 작가를 다시 만났다. 그는 페어에서와 마찬가지로 반가운 얼굴로 조곤조곤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야기를 나누며 깨달았다. 다른 사람을 망설임 없이 응원하고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나누는 일은, 오랜 시간 ‘자기 것’을 만드는 고민을 해온 사람이기에 가능하다는 사실을.

 

 

 

기다려야만 만날 수 있는 리소프린트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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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페어때 리소프린트의 순서를 설명한 벽면 모습. 순서대로 한 색씩 인쇄된다.

 

 

작가님은 주로 리소프린트 작업을 하시는데, 리소프린트가 어떤 건지 설명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아주 간단히 말하자면, 실크스크린의 판화 기법을 디지털화한 인쇄 방식이에요. 제판된 마스터용지의 미세한 구멍으로 잉크가 통과되어 종이에 이미지가 인쇄돼요. 한 번에 하나의 색상만 인쇄가 가능한데, 잉크의 투명도, 겹침을 이용해 다양한 색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리소 잉크는 콩기름이 원료라 친환경적이고 다른 잉크에 비해 잘 마르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어요.


리소프린트 작업을 하시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제가 뉴욕에서 공부했을 때 판화 수업을 많이 들었는데 그중에서도 실크스크린이 재미있어서 그 방식으로 작업을 계속 해왔어요. 한국에 와서도 실크스크린 작업을 계속 이어가고 싶었는데, 여러 가지로 마땅치가 않아서 알아보던 중 비슷한 방식인 리소프린트를 하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저는 형광 분홍 같은 색감을 좋아하고 작품도 주로 그런 색감인데, 일반적인 디지털 인쇄로는 그 색감을 살릴 수가 없었어요. 리소프린트는 잉크를 합성해 색을 뽑아내는 게 아니라 한 색깔씩 따로 인쇄하는 방식이라 특이한 색감도 살릴 수 있었죠. 리소프린트를 이용하면 제가 원하는 색감을 모니터에서만이 아니라 실제 종이로 구현할 수 있다는 게 큰 장점이에요.


아예 집에 리소프린트기를 들이시고 직접 인쇄를 하신다고 들었어요. 그렇게 하시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일단 다른 데 맡기면 인쇄비가 너무 많이 드는 것도 있고요, 예전부터 실크스크린 같은 수작업을 좋아했기에 제가 직접 기계로 인쇄를 해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았어요. 한국에 들어온 직후, 마침 당시 알고 지내던 작가님이 리소프린트기를 가지고 계셔서 그분께 중고 판매 사장님을 소개받았죠. 거기서 중고 프린트기와 함께 기본으로 사용되는 검은 잉크, 제가 주로 사용하는 세 가지 잉크까지 다 해서 500만 원에 샀어요. 지른 거죠. (웃음) 사장님을 소개해주신 분이 제게 쉽다고 했는데… 그렇진 않았고요. (웃음) 초반에는 기계를 다루는 데 서툴러서 사장님께 전화도 많이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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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고수진 작가의 집에 있는 리소프린트기

 

 

작가님이 생각하시는 리소프린트의 매력은 무엇인가요?


한 번에 완성품이 나오는 게 아니라 색이 한 색 한 색 따로 인쇄되며 시간이 걸린 끝에 전체가 완성되는 게 재밌어요. 리소프린트에 사용되는 잉크 특징이 완전히 마르지 않는다는 건데, 1차 인쇄를 마치고 하루 말리고, 또 그다음 인쇄를 하는 식으로 저는 3일에 걸쳐 작업할 때도 있거든요. 그렇게 오류 없이 작품이 잘 인쇄되어 나왔을 때면 정말 기분이 좋아져서 사진을 찍어두기도 해요.


주로 리소프린트를 하시는 입장에서, 작업하실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은 무엇인가요?


인쇄했을 때 잘 표현될 수 있는 그림인지 생각하며 작업을 많이 해요. 특히 색감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분홍색, 노란색, 하늘색 같이 밝은 색을 주로 사용하다 보니 그릴 대상도 그런 색이 많이 들어간 걸 고르게 돼요.

 

 

 

‘나의 것’을 그리기 위해 지나온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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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 그림을 그리셨는지 궁금합니다.


지금에 이르기까지는 이야기가 좀 길어요. 대학생 때는 디지털미디어디자인을 전공하며 영상부터 홈페이지 디자인까지 정말 다양한 걸 배웠어요. 너무 많이 배우다 보니 오히려 제가 잘하는 걸 찾지 못해서 졸업 후엔 방황하기도 했죠. 그러다 우연히 어린이 용품을 만드는 브랜드에서 일하게 되었어요. 제 손을 거친 작업물이 옷, 신발, 장남감 같은 물건으로 상품화되는 경험은 재미있었어요. 하지만 전 디자이너로 입사한 건데, 생각보다 창의성을 발휘할 일은 많지 않았어요. 유학을 가서 일러스트를 더 배워보고 싶은 마음에 회사를 나와 어학과 포트폴리오 준비를 병행했습니다. 그렇게 29살에 뉴욕에 있는 디자인스쿨에 갔어요.


그런 큰 결정을 하시는 원동력은 어디서 나오나요?


저도 겁이 많은 성격인데, 그때는 정말 유학을 가야겠다는 생각이 너무 강해서 그 생각이 두려움을 덮었던 것 같아요. 회사를 다니며 회의감을 심하게 느꼈거든요.


뉴욕에서의 공부는 어땠나요?


대학원 과정이 아니라 학부생 과정으로 간 거였기에 나이 차가 열 살씩 나는 친구들과 함께 수업을 들었어요. (웃음) 그래도 의외로 저처럼 일을 하다가 온 사람이나, 아예 결혼을 하고 온 사람도 꽤 있더라고요. 그때 정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어요. 개성이 강하고, 하고 싶은 게 확실한 친구들이 많았는데 매번 그게 부러웠어요. 뉴욕에서 공부하며 정말 다양한 재료로 그림을 그려봤어요. 각자 다른 환경에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해서 그런지 같은 수업시간에 똑같은 재료로 그려도 완전히 다른 결과물이 나온다는 것이 재미있었습니다.


뉴욕에서는 주로 어떤 작업을 하셨나요?


실크스크린 작업을 주로 하면서 그 작업물을 카드로 만들어 팔았어요. 미국은 카드를 쓰는 문화가 발달해서 동네마다 카드 파는 가게가 한두 개씩 있고, 편의점에만 가도 카드를 파는 코너가 따로 있을 정도거든요. 뉴욕에 여러 가게에 제 카드를 입점시키기도 했고, 서울일러스트페어처럼 다양한 행사에 일러스트레이터로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그때의 유학 생활은 작가님의 작품 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작업을 진행하는 순서부터 새로 다시 배웠어요. 거기서는 한 가지를 그리기 위해서 관련된 연결고리와 배경지식을 찾는 작업을 굉장히 깊게 했어요. 그런 식의 작업이 인상적이었고, 제게 많은 영향을 미치기도 했지만, 한국에 와서는 그렇게까지 깊게 조사해 작품에 제 철학을 녹여내는 게 쉽지 않더라고요. 특히 일러스트페어 같은 행사에서는 아무래도 딱 봤을 때 눈에 띄는 작품이 판매가 잘 되다 보니 보이는 부분에 좀 더 치중하게 되었어요. 그러다 보면 유행에 대한 고민도 하게 돼요.


이번 서울일러스트페어에서도 그런 고민을 하셨나요?


네. 올해에는 메론소다나 클로버가 유행이에요. 행사 직전까지 메론소다 프린트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하다가 결국 인쇄를 해서 가져갔어요. 무작정 유행만 따라가고 싶은 건 아니지만, 메론소다를 리소프린트로 찍은 건 다른 부스에는 없으니까 좀 특별할 것 같다고 생각했죠. 완판되더라고요. (웃음) 판매한 종류가 20가지가 넘는데 그중에서 한두 장만 팔린 작품도 있으니까, 유행을 무시할 수 없는 거죠. 더 오랜 시간 고민한 작품보다 유행 아이템을 넣어 그린 작품이 더 인기가 좋으면 기분이 묘해지곤 해요.

 

 

 

리소프린트에서 배우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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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부터 끝까지 무언가를 만든다는 건 정말 재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걸 누군가 사가면 기쁘기도 할 것 같고요.

 

맞아요. 엄청 재밌죠. 근데 처음에는 오히려 너무 아까워서 팔지 못하는 마음도 있었어요. (웃음) 막 자식 같은 느낌이 들어서... 그래도 작업이 계속되고 시간이 지나니까 내가 갖는 것도 좋지만 다른 사람들과 내가 좋아하는 걸 나누고 싶다는 마음도 커졌어요. 물론 지금도 너무 인쇄가 잘된 건 팔지 않고 따로 액자 같은 데 보관해둬요. (웃음)

 

말씀을 들어보니 서울일러스트페어도 자주 나가신 것 같은데 지금까지 총 몇 회 참여하셨나요? 참여하신 소감도 듣고 싶습니다.

 

한국에 돌아온 직후 나가기 시작해 지금까지 총 7번 참여했어요. 참가할 때마다 아는 분들이 생겨서 이제는 알아보는 분도 계세요. 함께 준비하며 다들 고생하시니 동질감을 느끼기도 하고요. 예전에 제 부스에 손님으로 왔다가 어느새 작가로 참여하는 경우도 있는데, 감회가 새롭죠. 이제 손님 중에서도 먼저 인사를 주시는 분들이 있어서 그럴 때면 되게 반가워요. 제 작품을 좋아해 주시는 분들을 충분히 못 챙겨 드리는 것 같아 언제나 감사한 마음뿐이에요.


작품의 영감은 주로 어디서 얻으시나요?


먹는 것, 특히 디저트 종류를 좋아해서 거기서부터 그림이 시작되는 일이 많아요. 다 가보지는 못해도 새로운 디저트 가게가 생기면 북마크를 해놓는 편이에요. 빈티지 느낌을 좋아해서 그런 분위기의 그림책과 인형도 많이 봐요. 예전에 뉴욕에 있을 때는 많이 모으기도 했고요.

 

작업물은 귀엽고 푹신하고 달콤한 분위기인데, 실제 작가님은 어떠신가요?


최근에 『2인조』라는 책 선물을 받았는데, 거기에 우리는 날 때부터 2인조로 사람은 누구나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나와요. 그러니 두 친구의 두 발을 맞춰서 잘 걸어야 한다고요. 저도 그래요. 작업할 때는 재밌고 즐겁게 하는데, 작업하지 않을 때는 마냥 밝고 달달하진 않아요.

 

작가님은 그런 시간을 어떻게 보내시나요?


인쇄하면서 해소를 많이 하는 편이에요. 컴퓨터 작업은 계속 앉아서 하는 일이지만 인쇄는 몸을 쓰는 일이다 보니 머릿속이 좀 비워지는 것도 있고, 인쇄를 하며 배우는 것도 많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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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쇄 오류로 어긋나고 안 맞는 부분이 생긴 작업물

 

 

예를 들면 어떤 것인가요?


리소프린트기는 매번 수동으로 맞춰줘야 하는 부분이 많아서 몇 밀리미터만 어긋나도 인쇄가 잘못되는 경우가 많아요. 50장 찍으면 20장, 30장이 안 맞을 때도 있어요. 그렇게 되면 애써 인쇄한 걸 못 쓰게 되는 거니까 속상하죠. 처음에는 스트레스도 엄청 받았어요. 열심히 했는데, 뜻대로 결과가 안 나오는 상황이니까요.


그런데 하루는 페어에서 부스를 찾아주신 손님께 그런 얘기를 했더니, 그분께서 어긋난 건 어긋난 대로 매력이 있으니 그것도 판매하면 어떻냐는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리소프린트는 그게 매력 아니냐면서요. 그때 내가 보기에 완벽하지 않은 결과물도 누군가는 좋아해 줄 수 있겠다는 걸 깨달았어요. 어긋나서 ‘오히려 좋아’ 인 거죠. 그게 위로가 되더라고요. 사람도, 나 자신도 완벽하지 않은데 기계라고 해서 다 완벽하게 잘 나올 필요는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어요.


인생이 완벽할 수 없다는 사실을 리소프린트로 배우신다는 게 신선하게 느껴져요. 지금까지 말씀 잘 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작가님은 앞으로 리소프린트로 또 어떤 작업을 해보고 싶으신가요?


일단은 9월 29일에 부산일러스트페어에 나가기 때문에, 그 페어를 준비하느라 바쁠 듯해요. 행사장이 백스코인데 마침 그때가 부산국제영화제 시기와 겹쳐서 같은 장소에서 영화 행사도 함께 진행을 하더라고요. 그런 경험은 또 처음이라 재미있을 것 같아요.


조금 멀리 보자면, 지금까지 작업했던 것들이 정리가 잘 되어 있지 않아요. 그걸 다 모아서 볼 수 있는 온라인 사이트를 만들어보고 싶어요. 또 저랑 이름과 성이 같은 그림책 작가님이 계시는데, 그러다 보니 행사에 오셔서 저를 그분과 헷갈려 하시는 분도 계시더라고요. 그래서 활동명이나 브랜드 이름을 만들어볼 생각도 하고 있어요. 올해 안에 꼭 만들어보고 싶네요.

 

 

[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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