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여름... 이었나?

글 입력 2022.07.27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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덥다. 덥다는 말은 발음부터가 덥다. 입안에서 탁 하고 터지는 게 아니라 텁 하고 막혀든다. 우유 없이 삼켜낸 마른 스콘처럼. 여름만큼이나 환상과 실체의 괴리가 큰 계절은 없을 것이다. 첫사랑이니 어느 여름밤의 풍경 소리니 하는 것들이 수많은 이들의 의식 속에 공유되어 있기 때문일 테다. 곰곰이 돌아보면 그 속에 온전히 나의 것은 하나도 없는 기분. 누군가 달게 씹어냈을 여름의 속살을 꾹꾹 눌러보기만 하는 나에게는 하등 멀고 먼 얘기 같다.

 

여름이 정말 단가?

상큼한가?

청량한가?

 

여름의 나를 버티게 하는 건 곧 겨울이 올 거라는 희망 하나 뿐이다.

 

여름을 반기지 않는 건 체질 때문일 것이다. 몸에 열이 많다. 지나치게. 애인이 있어야 한다면 피부 아래 냉기가 도는 사람일 거라고 생각할 정도로. 열이 확 오르면 온 몸이 따가워지며 간질대는 감각도 영 싫다. 살과 살이 맞붙고 떨어질 때의 끈적한 잔여감, 열대야에 밤잠을 방해받을 지 모른다는 불안감, 누군가의 미적지근한 날숨 속에 단단히 갇힌 듯한 구속감, 타인에게 살을 보이고 보아야 한다는 자괴감, 길고 긴 낮을 어떻게는 성실히 달궈 채워내야 한다는 책임감...

 

머지 않아 가을이 오면 잘 익은 진짜 감을 입에 무는 상상을 해본다. 이 모든 '여름의 감'들을 이겨낸 나를 위한 포상으로, 달고 풍부한 진짜 과육을 물려주는 상상. 텁 하고 막히는 게 아니라, 탁 하고 터지는 상상.

 

선한 바람에 여름의 열기가 물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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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을 즐기는 이들을 선망한다. 색색의 머리통으로 그득한 워터파크에서 가공된 파도에 몸의 굴곡을 맞추며 소리치는 사람들. 빙수와 아이스크림 한 입이 주는 해방감을 아는 사람들. 불평없이 꼼꼼히 선크림을 바르며 태양 아래 빙글빙글 돌 줄 아는 사람들. 축축한 여름밤을 헤치며 미지근한 맥주와 함께 묵은 고백의 말들을 삼킬 수 있는 사람들. 불빛과 더위와 강물의 뒤섞임을 사랑하는 사람들. 아름다운 사람들.

 

나도 오랜 시간을 묵다 지상에 올라온 매미처럼 여름을 사랑해보고 싶다. 작열하는 태양에 미간을 찌푸리는 게 아니라 지긋이 눈을 감고 얼굴의 주름들을 부드럽게 드러내고 싶다. 길고 긴 낮의 시간을 충실히 견뎌내고 싶다. 언제나 어설픈 육체가 그걸 허락치 않는다. 게다가 언제 하늘의 변덕에 말려 비를 맞게 될 지 모른다.

 

장마. 장마에 대해서라면 할 말이 많다. 빨래가 죄가 되는 장마. 밝은 색의 바지를 입을 수 없는 장마. 긴 치마를 입기 어려운 장마. 양말 착용의 결과를 뻔히 알기에 결국 가벼운 슬리퍼를 철벅대며 걷게 되는, 푹 젖은 옷들을 줄줄이 걸어둔 탓에 한쪽 벽면에 야심차게 꾸며 둔 책장이 하나도 보이지 않게 되는 장마. 언제나 우산으로 묵직한 가방과, 우글우글 하늘과 함께 울어대는 책들. 장마의 지난함.

 

애서가에게 장마는 징벌이다.

정말 그렇게까지 말해도 무리 없다.

   

날씨만큼이나 뜨겁게 달아오른 노트북을 살살 식히며, 하드를 뒤지고 뒤졌다. 여름에 대해 쓴 글 몇 가지를 발견해냈다. 그걸 옮기며 남은 여름을 덜어내본다.

   

 

참나무가 만들어낸 건강한 그늘, 단 한 번도 균등히 나뉜 적 없던 쌍쌍바, 더 큰 쪽을 내밀던 햇볕에 그을린 손... 서로의 목소리를 지워버릴 정도로 성실히 울어대던 매미와, 크고 작은 무지개를 그려내던 분수와... 물줄기 사이를 바쁘게 뛰어다니던 아이들. 모든 게 그대로였다. 세월이 무색하게도 이곳은 그날의 풍경을 잃지 않았다. 작게 사는 나에게 이 모든 ‘변함없음’은 너무나 컸다. 그와 이별했던 이 계절이 너무나 짙었다. 문득 발치에 떨어진 아이스크림 포장지를 발견하자 모든 게 무너지는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망했다, 라고... 나도 모르게 중얼댔다. 이 생의 기억은 온통 여름으로 넘칠 게 분명했다.

 

 

J는 주둥이가 길게 빠진 컵을 내 앞으로 밀어두었다. 갖가지 시럽이 층층이 쌓인 액체는 수상할 정도로 오색찬란했다. 레몬 슬라이스에는 작은 종이우산도 얹혀 있었는데, 저 큰 손으로 꽃무늬 우산을 정성스럽게 펴서 꽂았을 걸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온갖 모양의 얼음과 지구 단면도를 연상시키는 층과 색, 종이우산과 나란히 꽂힌 산타 모양의 설탕 과자까지. 웬 산타냐고 묻자 서프보드 모양이 다 떨어졌단 대답이 돌아왔다. 조주기능사 자격증을 땄다길래 그게 뭐냐고 되물었더니 말하자면 바텐더 자격증 같은 거라고 대답했다. 조주기능사라니. 멋없으니까 다음부턴 그렇게 소개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그럼 뭐라고 해? J의 물음에 나는 그가 내민, 그러니까 아마 칵테일이라고 하는 수밖에 없는 그것을 만지작댔다. 그리고 늦은 대답을 내놓았다. 그냥... 이런 거 만든다고. 술을 계절 비슷하게... 계절감 있는 술 같은 거...


나는 J가 성실히 따라낸 여름을 마셨다. 목구멍에 얽혀드는 찐득하고 불량한 맛은 장맛비 같았고, 이후에 파고드는 톡 쏘는 탄산은 한낮 더위에 만난 파도 같았다.

 

 

여름에 대해 쓴 글을 읽고 있자니 괜히 속부터가 간지럽다. 고르고 골라낸 문장들일 텐데, 그것만 보면 이 계절을 싫어하는 사람 같지가 않다. 나 역시 공유된 기억을 뜯어 먹고 사나 보다. 어쩔 수 없는 여름 인간. 어쩔 수 없는 지구인. 지구의 장기는 뜨거워지는 것.

 

돌아보면 내가 지나가는 나이대는 여름과 퍽 어울린다. 청춘, 이라고들 하지 않나? 한자를 풀면 담긴 건 봄이지만 정작 떠오르는 건 여름이라고들, 하지 않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시기이니, 즐겨보는 건 어떻겠냐고 세뇌해봤지만 오래 가진 못했다.

 

젊은 감각으로 이 열기에 충분히 저항하는 것도 나쁠 건 없으리라. 매일 아침, 끈적한 문을 열어젖히며 지구의 뜨뜻미지근한 날숨 속으로 걸어들어갈 때마다 지긋이 욕을 씹으리라. 출근길 부딪힌 살들과 살들과 살들에게 조심 좀 하라며 호통을 쳐 보리라. 닷새를 버틸 뜨거운 카레를 끓여내며 집안의 온 창문을 활짝 열어내리라.

 

여름을 살아보리라.

 

간혹 여름을 '열음'이라고 잘못 발음하고 싶다. 한 해의 중간, 연초에 호기롭게 펼쳐두었던 기회의 문들이 속속들이 좁아지는 시기. 포기하는 것들이 많아지는 시기. 내 고집스러운 입만큼이나 꾹 닫힌 문들. 그것들을 감히 죄다 열어낼 수 있는 계절로 여름을 삼고 싶다. 여름은 열음의 계절, 길고 긴 만큼 오래 열 수 있는 계절.

 

피부가 찬 애인 대신 거대하고 육중한 여름 그 자체를, 동반자 삼고 싶다.

 

여름이 어서 끝났으면 좋겠다.

여름이 조금 더(예를 들면 이틀) 이어졌으면 좋겠다.

여름이 항상 여름다웠으면 좋겠고,

여름이 조금만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다정했으면 좋겠다.

 

올해, 나 역시 공유할 수 없는 열음의 기억이 생겼다.

 

 

[오송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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