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복날엔 닭 [도서/문학]

서이제, 「두개골의 안과 밖」
글 입력 2022.07.22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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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수한 누룽지 삼계탕 끓이는 법

 

하나, 예열한 프라이팬에 기름을 살짝 두르고 찹쌀밥으로 누룽지를 굽는다.

둘, 5~6호 크기의 닭을 준비한다.

셋, 닭을 깨끗이 씻고 지방을 제거하여 손질해둔다.

넷, 각종 한약재나 마늘, 밤, 대추 등을 넣은 육수에 닭과 누룽지를 넣고 끓인다.

(…)

 

 

어김없이 닭을 먹는다. 며칠 전엔 바삭한 치킨에 시원한 맥주를 마셨고, 엊그제는 점심 메뉴로 나온 닭볶음탕 국물에 밥을 비벼 먹었고, 이제는 푹 고아진 진득한 삼계탕을 먹는다. 뼈에서 스르륵 분리되는 야들야들한 살점을 소금에 찍어 먹고, 묵직한 국물을 후후 불어 연거푸 몇 숟갈 떠먹고, 콧등에 송골 맺힌 땀방울을 슬쩍 훔치고, 큼지막한 깍두기를 한입 베어 먹고, 다시 닭의 목을 비틀어 마지막 살점을 남김없이 뜯어먹고, 닭 뱃속에 감춰진 쫄깃한 찹쌀 죽을 퍼먹고, 다시 후루룩 국물을 마신다.


닭. 오늘도 닭이다. 초복엔 닭이고, 중복엔 닭이고, 말복엔 닭이다. 복날이 아니어도 닭이고, 치킨 값이 올랐다고 욕하면서 닭이고, 달걀은 닭이 낳은 닭이고, 병아리는 닭이 되기 전의 닭이고, 닭은 닭이고, 먼 미래에 현생 인류가 살았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 닭이고, 따라서 인류는 닭이고, 그래서 우리는 닭이다.

 

오늘도 닭을 뜯으며 닭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서이제의 소설 「두개골의 안과 밖」(이하 「두개골」)을 다시 읽는다.

 

 

 

황당한 아포칼립스



소설의 배경은 “2025년형 SUV”가 중고매매센터에서 팔리는 가까운 미래, 조류에게 감염되는 ‘변이 바이러스’가 창궐한 대한민국 사회다. 심심찮게 발생하는 조류독감이건만, “그해는 새의 해로 기록될” 만큼 기이한 소문이 퍼진다. 이번 바이러스는 인간에게도 전파되며, 감염된 인간은 통증에 시달리다가 “새가 되어버린다”는 것. 이는 물론 과학적 증거가 없는 유언비어에 불과하지만, 변이 바이러스의 매개체인 새는 인간들에게 “혐오의 대상”이 되어 살처분해야 하는 공포의 존재가 된다.


서이제가 창조한 디스토피아는 여타 창작물에서 흔히 사용되는 아포칼립스 설정을 차용한다. 치사율과 전파력이 지나치게 높은 질병, 인간의 신체나 인지능력에 치명적 영향을 주는 감염병, 혹은 인간이 살 수 없는 극한 환경의 도래처럼 인류의 멸망을 ‘있음직하게’ 그려낸 작품들과 어느 정도 결을 같이 하지만, 서이제의 이야기를 더욱 치명적이게 만드는 것은 소설의 설정과 상상력 사이의 거리감이다. 인간이 새로 변한다니. 이런 현실성 없는 설정은 우리가 가진 아포칼립스적 상상력의 한계를 건드린다. “헛소리”, “사이비 종교의 계략”과 같은 반응은 지극히 당연한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황당한 재앙이 빠른 속도로 우리의 숨통을 조이도록 만들기에 이 소설은 치명적이다. “이상고온현상”으로 농작물 수확은 점점 어렵고, 고층 아파트를 세우기 위해 나무를 베고 헤집어놓은 “황량한 땅”이 드러나고 있으며, 사육장에선 여전히 더럽고 끔찍한 “고밀도 사육”이 이뤄지고 있다. 그런 환경에서라면 인간이 조류로 변하는 기이한 현상도 충분히 발생할 수 있으리라는 의심이 자라나기 시작한다. 소설 중간 중간 삽입된 사진―현실 포착의 도구―는 마침내 소설(상상)과 저널(진실)의 경계마저 붕괴시킨다. 이처럼 「두개골」은 인류가 만들어낸 풍경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가장 단순한 방식으로, 소설적 설정에서 현실적 상황까지, 단숨에 거리를 좁혀 들어온다.

 

 

 

파괴된 형식과 파괴할 상식



이 소설이 메시지를 실어 나르는 형식은 낯설고, 때론 파격적으로 느껴진다. 심지어 어떤 대목에 이르면 우리는 멈칫하고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예를 들면 이런 대목.

 

 

냄새의 근원지. 그곳에서 얼마나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말이다. 서서히 문이 열린다. 고막을 찢을 듯한 鷄鷄鷄鷄鷄鷄鷄鷄鷄鷄鷄鷄鷄鷄鷄鷄鷄鷄鷄鷄鷄鷄鷄鷄鷄鷄鷄鷄鷄鷄鷄鷄鷄鷄鷄鷄鷄鷄鷄鷄鷄鷄鷄鷄鷄鷄鷄鷄鷄鷄(…) 닭들의 울음소리. 수십만 마리의 닭들이 어둠 속에 파묻혀 있음. 오늘 나에게 할당된 목숨의 개수. 내가 하나둘 끊어 없애야 하는 소리들.

 

 

의성어로 옮길 수 있는 소리에 한계가 있음을 아쉬워하는 듯, 어둠 속에서 요동치는 생명의 소리와 억울하게 죽어갈 것들의 비명 소리를, 서이제는 이런 방식으로 써낸다. 동음이의어인 흉조(凶兆)와 흉조(凶鳥) / ‘새(bird) 인간’과 ‘새(new) 인간’이 지칭하는 대상을 교묘하게 겹쳐놓거나, 유사한 문장의 반복을 통해 운문 같은 리듬을 형성하기도 하며 「두개골」은 소설의 형식을 파괴하고 유린한다. 


이처럼 「두개골」은 보란 듯이 형식을 파괴하는 고약한 소설의 실험실처럼 느껴진다. 왜 이런 형식의 파괴를 의도했을까. 소설을 읽으며 우리가 희미하게 찾아낸 답은 이렇다. 기존 구조의 ‘파괴’를 통해서만 우리는 ‘파격’에 도달하리라는 것. 살처분과 고밀도 사육과 벌목이 당위로 취급되는 자본주의적 상식을 깨뜨리고 “이 모든 일을 기억”하기 위해서는 “상상력을 동원”해야만 하기 때문이라는 것.

 

 
인간의 말로 쓸 수 없음. 주어, 서술어. 쓸 수 없음. 주어, 목적어, 서술어. 쓸 수 없음. 닭은 인간처럼 말하지 않고. 관형어, 주어, 서술어. 인간처럼 생각하지 않고. 주어, 목적어, 부사어, 서술어. 인간과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느끼기에 쓸 수 없음. (…) 닭에게 인간의 목소리가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닭의 목소리가 부여될 수 있기를 바람. 바라는 마음으로 다시 쓰기.
 

 

수없이 다시 고쳐 썼을 소설 「두개골」은 자본주의에 물든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목소리와 말들”을 대변하려는 파격적 시도다.

 

 

 

복날엔 삼계탕을 먹지



「두개골」은 같은 재앙을 마주한 소설 속 여러 “나”의 시선을 엮는다. 까치 사냥을 하는 ‘나’, 외국인 노동자 ‘나’, 일용직을 하는 ‘나’, 사회복무요원으로 근무하는 ‘나’, 문학하는 ‘나’와 기타 등등 수많은 나. 쏘고, 찢고, 묻고, 죽이는 나. 언젠가 새가 될지도 모르는 나. 우리는 새만큼 위태로운 삶을 사는 여러 ‘나’의 삶을 곁눈질하며 우리 자신의 시선을 찾아간다.

 

총을 쏴 까치를 잡아야 하고, 일당을 위해 벌목을 해야 하고, 닭을 마대자루에 담아 생매장해야 하며, 그걸 그저 지켜봐야 하는 수많은 ‘나’의 시선을 마주할 때 우리는 비슷한 종류의 감정을 느낀다. “미안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다”는 것. 까치 한 마리당 8천 원을 받아야 하니까. “코리안 스타일”에 적응하지 못하면 “배고파 죽거나 맞아 죽”으니까. 먹고 살기 위해서는 돈이 드니까. 자본주의 시스템 아래에서는 “무슨 일이라도, 해야 하”기에 “도망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 까치의 살갗을 뚫고 내장을 찢는 총알도, 닭을 산채로 짓뭉개는 굴삭기의 버킷도 모두 “윗대가리”의 책임이므로, 자연과 생명을 대하는 온갖 비윤리적 행동의 책임은 개인(나)에게 있지 않다고, 우리는 애써 스스로를 위로할 뿐이다.


서이제가 상상한 디스토피아는 어쩌면 우리 현실의 섬세한 반영이다. 「두개골」 속 ‘새 인간’의 존재는 그것(새)이 되지 않는 이상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인류의 한계를, 그래서 우리는 끝끝내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좌절을 이야기한다. (“탕!”) 이 좌절감을 충분히 슬퍼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복날에 삼계탕을 먹는다. 뜨끈한 땀을 뻘뻘 흘리면서, 평범한 인간의 무력함을 뿜어내면서, 5호 사이즈 어린 닭의 연한 살점을 뜯는다. 여전히 "닭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이성으로 가득찬 인간 머리통”을 가져 상상력이 부족한 탓이다. 너무나 이성적인 두개골의 안도, 바깥도, 정말이지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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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승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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