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리콤포즈드: 열렬한 예술혼과 명작을 흠모하는 마음 - 막스 리히터 스페셜

<비발디 사계 리콤포즈드>와 '방황공망산수'들
글 입력 2022.07.18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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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연주회를 감상한 것이 얼마만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음악을 좋아하지만 연주회를 찾아다닐 정도로 클래식 음악에 애정과 조예가 깊은 편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만 얼마 전 아트인사이트 홈페이지의 문화 소식 배너들 사이에서 막스 리히터 연주회 배너를 보았을 때, 그것이 시선을 잡아끌었고, 막스 리히터의 음악과 연주될 레퍼토리에 대한 설명을 읽게 했다. 그중에 한 부분이 특히 관심을 끌었다.


 

막스 리히터의 세계적 히트곡 [On The Nature Of Daylight]의 한국 초연 - 영국 가디언지가 뽑은 21세기 최고의 클래식 앨범으로 선정된 [블루 노트]의 수록곡인 이 곡은 당시 이라크 전쟁에 대한 반폭력 메시지를 담은 이 앨범 중 막스 리히터라는 이름을 전 세계에 각인시킨 계기가 된 그의 대표작이다. 2006년 발표 이후 현재까지 무려 8편이 넘는 영화에 삽입되었고 2019년, 배우 김혜자 주연의 드라마 [눈이 부시게]의 클라이막스 씬에 등장하며 국내에도 많이 알려졌다. 이번 공연이 국내 정식 초연이다.

 


나는 이 공연의 문화 소식을 접하기 전까지 막스 리히터에 대해서도 몰랐고 음악에서 포스트 미니멀리스트란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잘 몰랐다. 그래도 드니 빌뇌브 감독의 <컨택트>, 드라마 <눈이 부시게>에 막스 리히터의 곡 〈On the Nature Of Daylight〉가 쓰였다는 소개에서 친숙함을 느꼈다.

 

<눈이 부시게>라는 제목을 읽는 순간 어떤 음악을 말하는 것인지 바로 짐작할 수 있었다. 그 드라마를 보면서 많이 울었으니 가슴 미어지는 이야기와 함께 흘러나오던 그 슬프고 아름답던 선율을 잊을 수 없던 것이다.

 

그렇다면 문화 초대 신청을 해봐도 좋지 않을까? 이 곡을 실제 라이브 연주로 들을 수 있고 그 음악가의 다른 곡들도 들을 수 있다면 또 새롭게 좋아할 음악가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안고 문화 초대 신청 버튼을 눌렀다.

 

 

막스리히터스페셜.jpg

 

 

<막스 리히터 스페셜> 공연은 지휘자 아드리엘 김의 지휘와 바이올리니스트 김다미의 협연(<비발디 사계 리콤포즈드>), 그리고 오케스트라 디 오리지널의 연주로 진행되었다.


공연은 요제프 하이든 <무인도> 서곡, 장 필리프 라모 오페라 <레 보레아드> 모음곡, 막스 리히터의 〈On The Nature Of Daylight〉, 그리고 리히터가 ‘재작곡’한 <비발디 사계 리콤포즈드>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내 관심은 이 문화 초대를 신청하게 한 〈On The Nature Of Daylight〉에 있었다. <눈이 부시게>에서 혜자가 자신의 치매 증상을 알게 되며 과거와 현재가 그에 맞는 기억의 순서를 찾아갈 때, 조리를 찾아가지만 모순적으로 극도로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준하의 죽음을 인지할 때 나왔던 음악. 그리고 혜자와 준하 인생의 아름다움, 찬란함, 슬픔을 모두 어루만지고 있던 그 음악. 그것을 듣고 싶었고 국내에서는 이 곡이 초연이라는 것에 또 솔깃했었다.

 

과연 음악은 예상한대로 묘하고도 아름다웠다. 그런데 기대보다 더 강하게 미적 충격을 주어 내 심상에 또렷이 남은 것은 연주회 2부에서 감상한 <비발디 사계 리콤포즈드>였다.


 

막스 리히터 <비발디 사계 리콤포즈드> 불후의 명곡 ‘비발디 사계’를 현대적으로 재구성한 작품. 비발디 고유의 DNA는 남겨두고 곡의 75퍼센트가량을 현대적으로 재작곡(리콤포즈)함으로써 가장 트렌디하고 참신한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클래식과 대중음악의 경계와는 또 다른 신선한 자극으로 클래식계의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내며 장르를 뛰어넘어 대중적으로 사랑받는 곡이 되었다.

 

비발디 고유의 음악적 언어는 남겨둔 채 루핑 기법, 리듬의 변칙적인 재구성 등 막스 리히터의 참신하고 다양한 작곡기법을 사용한 이 작품은 과거와 현재를 접목한 놀라운 시도이며 본인은 비발디와 다시 사랑에 빠지기 위해 이 곡을 썼다고 말한 바 있다. 마치 과거와 현재가 대화하는듯한 그의 놀라운 시도야말로 그가 현대인들에게 사랑받는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일 것이다.

 


연주회에 가기 전날 유튜브에서 비발디의 사계를 검색해 들었다. 봄 제 1악장의 앞부분을 듣자마자 전화 연결음이 떠올랐다. 명곡이기 때문에 이곳저곳에 쓰이는 멜로디다. 현대에 와서 ‘식상해지기 쉬운 비발디와 다시 사랑에 빠지기 위해’ 이 곡을 재작곡했다는 막스 리히터의 말이 그래서 더 와닿는다.

 

개인적으로 막스 리히터가 재작곡한 봄 1악장이 제일 생경하게 들렸다. ‘비발디 사계’의 해석과 해체, 그리고 막스 리히터만의 작곡이 처음 씨실과 날실로 섞이기 시작하는 과정을 엿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후 악장이 진행될수록 비발디이면서 비발디가 아닌 새로운 곡의 연주에 마음이 감화되며 한껏 고양되기까지 했다.

 

나는 연주를 듣는 동안 계속 싱그러운 풀잎 채소와 작은 과일의 이미지가 머릿속에 둥둥 떠다녔는데 그것이 아마도 청중인 내가 사계와 새롭게 조우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심상인 듯하다. 어쩌면 ‘라이브’ 연주회 자체의 생생함이 그렇게 다가온 것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 해도 곡 자체의 특성이 크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생각한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음악가가 재해석이 아닌 재작곡이라는 표현을 썼다는 점이다. 재작곡이라는 포인트에서 나는 동양 미술의 ‘방’, 즉 모방 문화가 떠올랐다. 동북아 산수화를 접하다 보면 ‘방황공망산수’라는 제목의 그림을 숱하게 접하게 된다. 제목을 그대로 풀이하면 황공망의 산수를 모방하여 산수를 그렸다는 뜻이다. 황공망(1269~1354)은 중국 원나라 때의 문인화가로, 원말 사대가의 한 사람이며 특히 산수화로 그 이름을 명예롭게 남긴 인물이다. 그런데 모방했다기에는 방황공망산수도들이 각기 다르게 생겼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초기 모방작이 아니라 시간이 지날수록 그 경향은 더 짙어진다. 동양화에서 모방이란 똑같이 베껴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재해석과 재창작이 들어간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런 미술계의 경향 덕에 황공망의 이름과 영향은 산수화의 영역에서 더 오래오래 건재했다. 막스 리히터가 비발디의 사계를 재해석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재창작했다는 것, 그리고 그 스스로 밝힌 재작곡의 의도 역시 ‘방황공망산수’의 정신과 상통하는 데가 있음은 흥미로운 일이다.

 

이렇듯 예술에서 선현의 정신과 예술혼은 후배 예술가가 그것을 모방해 대가의 원리를 터득하고, 그 원리가 한 예술에서 널리 퍼지면 자연스레 작품에 대한 재해석이 일어나고, 재해석의 재해석마저 만연해진다면 ‘재창작’의 단계에까지 들어서며 후대에 전해지는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영향력을 가지고 영감을 자극하는 명작이란 얼마나 뛰어난 것인가!)

 

<비발디 사계 리콤포즈드>의 아름다움과 싱그러움, 그리고 재작곡이라는 시도에서, 동서고금 가를 것 없이 시대를 넘나드는 불후의 명작들이 예술가에게 세상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일깨우고, 작품 자신이 후대의 예술가에게 다시 사랑받는 것의 순환에 대해 생각해 보게 했다. 후대의 예술가에게 재창작의 열의를 불태울 명작의 저력과 ‘예술을 인생보다 길게’ 만드는 예술가들의 예술 그 자체에 대한 열렬한 사랑에 대해 고찰해 본다. 갑자기 삶과 예술에 대한 거대한 열정이 느껴지는 것만 같다.

 

몇 년 만의 연주회는 결국 내게 그날 연주된 곡이 담긴 앨범을 사게 만들었다. <비발디 사계 리콤포즈드> 앨범이 배송되길 기다리며 이 글을 쓴다. CD 플레이어로나마 다시 그 연주를 듣게 된다면 나는 연주의 디테일을 감상하고 다시금 예술가들의 예술혼-시대를 뛰어넘는 명작 속의 예술혼은 물론, 재해석과 재창작으로 그렇게 한 작품이 시대를 뛰어넘게 돕는 예술혼까지-과 명작을 흠모하는 마음에 대해 곱씹어 볼 것이다.

 

 

 

컬쳐리스트 신성은.jpg

 

 

[신성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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