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천천히 걷는 산책이 매력적인 이유 - 산책가의 노래

난 걷는 사람이 되고 싶다.
글 입력 2022.06.30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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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하늘을 직접 본 것도 어느덧 일주일이 넘은 것 같다.

 

우중충한 먹구름 속에 빠져든 잿빛의 도시를 보고 있노라면, 그냥 되게 삭막하다는 생각이 든다.

 

"뭔데 이렇게 정 없어 보이지? 내가 좀 예민한가?"

 

원래 도시의 색이 그러한 것인데도, 원래 도시는 삭막한 것인데도, 그 동안 밝디 밝은 햇살이 도시의 원색을 가리는 통에 일상 속에서는 느끼지 못했다. 도시도 아름답다 생각했다.

 

항상 따스한 햇빛이 가득할 때는 온 세상이 아름다워보였다. 사람들도 여유있어 보였고, 저 하늘을 나는 새도 힘이 넘쳐보였다. 웃음 가득한 세상, 열정 넘치는 세상, 밝디 밝은 세상. 이런 세상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빛은 당연한 거니까. 빛이 내리쬐는 세상은 언제고 볼 수 있는 거니까.

 

그런데 며칠 째 비 내리는 풍경만 보다보니 이게 웬걸, 내가 사는 도시가 이런 곳이었나, 싶을 정도로로 짙고 탁했다. 창 밖을 바라보면, 바로 앞에 놓여진 건물이 이토록 무감각해 보일 수가 없다. 무감각하고 무심하다. 인자하지 못하고 여유롭지 못하다. 흐리고 혼탁하다. 이전에는 바람이 잘 지나가도록 서로의 거리를 지켜주던 앞 건물이, 이젠 우리 사이 공간이 얼마나 된다고 이렇게 바짝 붙어 위치해있다.

 

변한 건 실제 거리가 아니다. 내 마음의 거리다.

 

 

산책가의 노래_앞표지.jpg

 

 

일상을 살아가다보면, 평소에 느꼈던 것과 다른 감각을 받을 때가 종종 있다. 맑은 날, 흐린 날 보이는 집 주변 풍경이 그렇고, 시점을 달리할 때 보이는 주변 풍경이 그렇다.

 

주변 환경에 따라 주변 존재들이 달라보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나가 변하면, 다른 하나도 변한다. 이때, '하나'의 자리에 '나'를 어디에 넣냐에 따라 재밌는 일이 일어난다.

 

'내가 변하면, 다른 무언가도 변한다.'

'다른 무언가가 변하면, 내가 변한다.' 

 

'나'를 넣는 위치만 바꾸었는데도 이토록 의미가 달라진다. 전자가 능동적이라면 후자는 수동적이다. 내가 인식한 도시의 모습이 달라진 것은 후자의 요소에 기인했기 때문이다. 날씨가 달라지니, 내가 달라진 것이다. 난 변하지 않았다. 변한 건 날씨다. 난 변한 게 아니라 '영향을 받은 것'이다.

 

만약 내가 능동적으로 도시 보는 눈을 바꿨다면, 그랬다면 도시가 어떻게 보일까? 지금처럼 팍팍하다고 똑같이 느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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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가의 노래>를 쓴 이고은 산책가는 주변 풍경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본다. 누군가의 눈엔 평범할 뿐인 작은 새, 애벌레, 금계꽃을 이고은 산책가는 특별하게 만든다. 그는 작은 것들을 사랑한다. 작은 것들을 사랑하기에, 그런 시선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의 시각에는 하나의 것을 오래도록 응시하는 인내심이 깃들어있다. 그래서 이고은의 시는 따뜻하다. 섬세하고, 깊으며, 관조적으로 주변 생물을 응시한다. 오래오래, 오래도록. 덕분에 시집을 읽는 나도 덩달아 그의 마음을 닮아간 것 같다. 천천히, 지그시 주변의 온기를 바라본다. 그리고 그렇게 인식한 온도에 따라 내 온도를 조절해본다. 너무 덥지도 너무 춥지도 않은 온도로.

 

정신없이 돌아가는 세상에 나도 모르게 그 흐름에 몸을 맡기는 나날이 많았다. 빠르게, 더 빠르게, 더더 빠르게를 강조하는 세상 속에서 작고 소중한 것의 가치를 잊은 적은 한 두번이 아니다. 빠른 것은 빠르기 때문에 쉽게 생기지만, 그만큼 쉽게 사라진다. 비유할 적절한 것을 찾자면, 양은 냄비다.

 

양은 냄비는 빠르게 데워지지만, 빠르게 식는다. 현대 사회는 응당 그러한 것이라고, 그 흐름에 몸을 섞어 편승해야 잘 살 수 있다고 사람들은 얘기한다.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작은 것들은 그 과정에서 속 편히 지워진다. 잘 보이는 큰 것도 쉽게 쉽게 지워지는 마당에, 작은 것들은 신경 쓸 무엇조차 되지 않으니까.


 

꽃은 시들고 과일은 썩는다.

해는 지고 바람은 분다.

담아 놓고 싶다.

 

닿을 듯 어른거리던 아름다운 이미지들이

다시 산산이 흩어진다.

담아 놓고 싶다.

 

가만히 귀 기울이면 들리고

가만히 들여다보면 보이고

가만히 느끼면 알 수 있는 것을 

담아 놓고 싶다.

 

<담아 놓고 싶다>


 

그렇기에 담아 놓고 싶은 것은, 작은 것들이다.

 

쉽게 흩어질 가능성이 높은 것들, 쉽게 사라질 것들, 너무 작아 무시될 수 있을 것들, 귀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것들, 오래 응시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것들. 그런 것들을 담아 놓고 싶다. 내 안에, 내 마음 안에 담아 쉽게 사라지게 두고 싶지 않다.

 

빠르고 데워지고 빠르게 식는 양은 냄비가 아니라, 느리지만 오래가는 뚝배기가 그래서 좋다.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은 것들은 작고 소중한 것이니까. 작고 소중하니까 오래 간직하고 싶다.


 

잘린 연줄기 끝에 빨간 잠자리가 쉬고 있다.

가까이 다가가면 날아올랐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무성하게 자란 짙은 초록빛 고사리 사이에

하얀 나방이 미동도 없이 깊은 잠을 청하고,

이끼가 잔뜩 낀 오래된 나무껍질 틈새에서

눈물을 닮은 조그만 버섯들이 자라고,

에메랄드빛 작은 애벌레가 꿈틀꿈틀거리며

나무를 오르고 있다.

 

빨리 걸으면 풍경이 보이지만

천천히 걸으면 그 풍경 안에 숨은

작고 소중한 것들이 보인다.

 

그래서 천천히 걷는 산책을 즐긴다.

오늘도 작고 예쁜 것을 많이 보았다.

 

<천천히 걷는 산책>

 

 

천천히, 시간이 걸릴지라도 난 걷고 싶다. 차를 타고 가며 보는 풍경도 좋지만, 오래 걸으며 보이는 작은 풀, 작은 새, 작은 생물들을 보는 것이 내겐 더 큰 행복이다. 저기 저 잠자리는 몸이 빨갛구나, 저기 나무 껍질 사이에는 이끼가 끼었네, 저기서는 버섯이 자라는구나.

 

난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비록 천천히 타오를지라도, 오래오래 온기를 유지할 수 있는 사람. 격정적으로 끓어오르는 사람은 못 되어도, 한번 달아올랐을 때 쉽게 그 끈을 놓아버리진 않을 테다.

 

 

네 잎 클로버를 찾다가 오 잎 클로버를 찾았다.

더 값진 걸 찾은 것 같아 뽑아서 간직하고 싶었지만,

그것을 찾은 순간 행운은 이미 나에게 왔으므로

 

또다시 누군가의 행운이 되도록 그대로 남겨 두었다.

 

<오 잎 클로버>

 

 

주변 환경에 쉽게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 천천히 온기를 유지하는 사람이 되는 길은 느린 산책과 같다. 천천히, 오래오래 주변을 둘러보며 혹여나 잊은 것은 없는지, 내가 놓치고 있는 것은 없는지, 너무 급하게 마음 먹느라 놔 버린 것은 없는지 돌아볼 여유를 가지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자동차를 타고서는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가 생기지 않는다. 걷는 것만이, 느린 움직임과 느린 소통만이 잊혀질 뻔한 것을 상기시켜준다.

 

그런 의미에서 <산책가의 노래>는 오 잎 클로버다. 짐짓 놓쳐버릴 여러 생각과 다짐들을 돌아보게 도와준 책이니. 내가 오 잎 클로버를 발견한 사람인지, 뽑아서 간직한 사람인지는 모르겠으나, 소망하기를 전자의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나 역시, 내가 받은 행운을 나만 간직하고 싶지는 않으니.

 

어쩌면 나의 글도 누군가에겐 오 잎 클로버가 될 수 있을까. 나의 다짐과 생각이 누군가에게 오 잎 클로버로 남을 수 있을까. 부디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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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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