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너는 내 최초의 절망 上

어느 아이돌 팬의 사적인 기록
글 입력 2022.06.30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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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말로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러므로 일종의 선언을 먼저 해보려 한다.

 

나는 만나본 적 없는 사람에게 푹 빠졌다.

 

그렇다. 관심없이 지나치던 숱한 연예인 중 한명에게 제대로 눈이 멀어버렸다. 대화해본 적도 없는 그 사람을 위해 밤낮으로 울기도 했고, 수 백 통에 달하는 (평생 부치지 못할) 편지를 썼고, 틈만 나면 그 사람이 있을 서울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탔다.

 

십년이 다 되는 시간동안 한사람에게 이토록 잠겨 있는 것이 흔한 일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나의 어떤 기억을 건드려도 그 사람은 늘 존재할 것이다. 내가 바라던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 마음을 사랑이라고 멋대로 정의한다. 내 하루와 내 일상, 나의 살아 숨쉬는 모든 기관과 신경세포 하나까지가 그 사람을 향해 있는 이 기막힌 상태를 사랑이 아니면 대체 무엇이라 할 수 있을까.


언제나 최선을 다했다. 그 사람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란 솔직한 것이다. 재거나 따지지 않고 솟아나는 마음을 남김없이 그리고 아낌없이 쏟아내는 것. 그 사람과 나 사이의 좁힐 수 없는 거리는 온통 나의 외침으로 가득했다.

 

네가 나를 몰라도 나는 너를 좋아해.

 

주는 만큼 받지 못한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혹자는 그 사람이 나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마치 자신의 무기라도 되는 냥 가볍게 휘두르곤 했지만 그 말에 다쳐본 적은 없다. 오히려 그것은 내 진심의 크기를 키우는 데 일조했다. 상대가 부담스러워 할까 마음 졸일 필요가 없었다. 나는 내가 주고 싶은 만큼의 충분한 마음을 있는 족족 쏘아 올렸고, 무엇이 돌아올지에 대한 기대 하나 없이도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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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은 나를 나 답거나, 혹은 나 답지 않게 만드는 신비한 능력이 있었다. 내 생애 처음으로 서울에 올라가 콘서트를 보게 된 날이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자리에 앉아 심호흡을 하고 있다가, 공연의 시작을 알리는 무대영상이 뜨자마자 몸에 이상을 느꼈다. 팔다리가 꽁꽁 얼어붙고 눈에선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뚝뚝 흘렀다.

 

바로 옆에 앉아있던 친구는 그런 나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내가 이렇게 무방비한 상태로 감정을 표출하는 것을 처음 보았기 때문이었다. 장본인인 나 역시 처음 겪는 감정에 한동안 심장이 두근거려 밤잠을 설쳤다.

 

나는 늘 내가 있는 곳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고,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가야 할 것 같은 충동에 사로잡혀 있던 사람이었다. 억눌려 있던 마음이 폭죽처럼 순서를 앞다투며 터져 나왔다. 그곳은 내가 찾던 낙원이 분명했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이 바로 그곳이었다.

 

불이 꺼진 관객석은 세상의 눈이 닿지 않는 사각지대 같았고, 그곳에 모인 수 천명의 사람들은 모두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잔뜩 상기된 이들이었다. 그곳에는 어떤 미움도, 지난한 자책도, 슬픔도, 소외도 없었다. 그러니까 나는 도저히, 그곳과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재간이 없었다.

 

그 사람에 대한 애정과 함께 시간을 한 뼘씩 쌓아가며 내 인생이 완성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연예인을 보기 위해 수 백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번잡한 곳에서도 팬들은 서로를 알아볼 수 있다. 그들은 어떻게든 티가 난다. 아티스트와 팬 사이에서만 공유하고 있는, 은밀히 군 적은 없었지만 누구도 관심 주지 않아 저절로 은밀해진 외딴 상징과 기호들이 팬들의 메이크업, 헤어스타일과 패션, 가방과 악세서리 곳곳에 묻어 있다. 나는 나같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 친분을 쌓고 이야기를 나눴다.

 

공통의 관심사를 가진 이들은 누구보다도 빨리 친해진다. 우리는 바쁜 일상의 틈을 비집고 만나 그 사람의 낮고 부드러운 눈매가 얼마나 어여쁜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또 그 사람의 손은 얼마나 고운지, 그 사람이 입버릇처럼 내뱉는 감탄사와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할 때의 표정은 얼마나 마음을 간지럽게 만드는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것이 그 사람의 전부일리 없지만 마치 전부인 것처럼 애타게 껴안았다. 그게 바로 우리가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일상의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는 탓에 늘 지치고 무기력한 상태에 머물러 있던 나는 처음으로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즐거움을 찾았다. 에너지가 같은 곳으로 모일 때 그 시너지는 배가 된다. 신이 났다. 지긋지긋하던 일상이 꽃처럼 피어나는 듯했다. 언제든 원할 때마다 도망칠 곳이 있다는 것은 내게 엄청난 위안이 되었다.

 

이 모든 것이 나의 안위와 만족을 위해 시작된 일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행복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온 마음과 정신을 한 곳에 몰두해 있는 상태에 있던 나는, 나와 관계없이 벌어지는 일들에 연거푸 타격을 입었다.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는 모습으로 나의 안식처가 되어 주리라 믿었던 많은 것들이 와해될 조짐이 보일 때마다 마음이 커다란 진폭으로 흔들렸다.

 

 

[고민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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