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한 트랙의 끝, 다른 트랙의 시작 [영화]

영화 <스프린터>
글 입력 2024.05.27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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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스프린터’의

내용 및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스포츠 영화를 떠올리면 머릿속에 으레 그려지는 그림들이 있다. 우승 확률이 희박한 팀이 지난한 노력을 통해 약점을 극복하고 목표를 달성하는 장면이 떠오른다. 언더독 서사라고들 한다. 위기를 마주하더라도 열정과 노력을 쏟는다면 결코 이루지 못할 꿈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경우를 적지 않게 봤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결국 우승이라는 목표를 쟁취하는 인물들을 보며 쾌감과 감동을 느끼거나 꿋꿋이 나아갈 기운을 얻게 된다.

 

이는 다수의 스포츠 영화들이 반복하는 흔한 이야기지만 그런 이야기들에 자주 위로를 받곤 한다. 작품 속 인물들의 성취가 살아가는 데 동력이 되어주는 용기와 희망으로 되돌아온다. 마치 이 이야기를 보는 관객 모두의 가능성과 저력을 믿는다고 말해주는 것만 같다. 간직하고 있는 꿈과 도전의 의미가 퇴색되지 않도록 열정의 가치를 대신 곱씹어주는 역할을 자처한다고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런데 얼마 전, 조금 다른 스포츠 영화를 봤다. 단거리 육상을 소재로 하는 영화 <스프린터>다. 스프린터 역시 앞서 말했던 이야기들처럼 열정의 가치와 응원의 목소리를 전한다. 다만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위로를 전하는 방식에서 다른 작품들과 궤를 달리한다.

 

인물들의 기록이 어떻게 개선되는지에 대해 큰 관심을 두지 않고, 승부의 결과나 주인공의 우승을 담보하지도 않는다. 목표 달성에 실패한 상태로 이야기를 맺게 되는 인물이 등장하기도 한다. 인물들이 성취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리기보다는 그들이 치열하게 달렸던 순간들을 그저 목격하도록 만드는 영화다. 트랙 위에서 맹렬히 내달려야 하는 단 10초의 시간을 향해 치열하게 움직이고 방황하고 흔들리는 숱한 순간들에 대한 이야기다.

 

대부분이 한 번쯤 겪었을 혹은 언젠가는 겪게 될 이야기가 세 인물을 중심으로 그려진다. 각자가 품고 있는 개인적인 사연과 포기하지 못하는 욕망에 시선을 준다. 때가 왔지만 쉽게 그만두지 못하는 현수, 정점을 양보할 수 없는 정호, 그리고 정체를 겪기 시작한 유망주 준서. 시작이 있었다면 끝내야 할 때가 오고, 정점에 올랐다면 내려와야 할 때가 오며, 더 이상 나아지지 않고 그대로 머무르게 되는 때도 있다. 이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지만 결코 달리기를 멈출 수는 없는 세 사람이 하게 되는 선택과 그때의 감정을 조명하며 공감을 일으킨다.

 

 

 

NO.4 김현수 "오늘 10초 53까지 나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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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수는 100m 단거리 달리기 종목에서 한국 신기록을 두 번이나 갈아치웠던 선수다. 1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달리기를 그만두지 못한다. 몸 상태는 점점 나빠지고 과거만큼의 기록이 나오지 않는 것도 당연하지만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젊은 선수들과 경쟁해야 한다. 팀 없이 무소속으로 대회를 준비하며 하루 종일 운동장에서 홀로 연습을 반복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그는 운동하는 내내 지치고 힘들어 보인다. 목표를 향한 열의에 타는 얼굴과는 거리가 멀다. 매일 다리와 발에 파스를 잔뜩 뿌려야 하고, 온몸의 근육은 뭉치고, 그렇다고 실력이 눈에 띄게 나아지는 성과가 나는 것도 아니지만 여전히 나쁘지 않은 수준의 기록인 10초 53 하나를 붙잡고 계속하는 상황이다. 이제 그만해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지만, 현수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고 영예를 이뤘던 트랙 위를 쉽게 떠날 수가 없다.

 

시작부터 예견된 결과였을지도 모르지만 결국 현수의 목표는 좌절된다. 경기가 끝나고 모두가 떠난 후에도 트랙 위에서 한동안의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담긴다. 과거에 자신이 완전히 장악했던 공간을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아쉬움과 미련을 가다듬는다. 더 하고 싶은 마음에 여전히 답답하고 눈물이 나지만, 이제는 진짜 선수로서의 삶을 놓아줘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게 마지막 도전까지 모두 끝나고 한참 후에야 현수는 집으로 돌아간다. 차에 탄 그의 얼굴을 바라보는 순간, 현수의 육상은 더 보편적인 무언가로 치환된다. 육상뿐 아니라 우리 각자의 꿈과 현실이 충돌하는 순간에서 모두가 느꼈을 감정으로 확대된다. 끝이 있으니까 지금껏 달려온 과정이 더 소중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며 자신을 애써 달래고 껴안았을 수많은 누군가의 모습과 나의 미래를 본다. 이 순간 가장 큰 위로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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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수가 달리는 과정 내내 그의 곁에서 함께하는 존재가 따뜻함을 더한다. 그의 도전을 오래도록 지켜보고 응원했을 지현의 마음이 크게 다가온다. 대화하지 않으려 하는 현수와 계속해서 마주 보려 애쓰고 마지막까지 도움을 주기 위해 노력하는 진심이 너무 크다. 경기가 끝난 후 잘했다는 말을 몇 번이고 건네주던 담담한 지현의 목소리가 아직까지도 맴돈다. 치열하게 노력한 순간들이 있었고, 설령 목표에 미치지 못했더라도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성과를 냈다면, 그것만으로도 잘한 것이라며 영화가 우리에게 건네는 말 같기도 하다.

 

지현 역시 과거에 육상을 했던 것처럼 보이지만 현재는 트레이너로 일하며 하루하루 성심껏 살아가는 모습이 비친다. 현수도 지현처럼 새로운 삶의 트랙에 오를 수 있을까. 현수의 재능과 끈기라면 물론. 또 곁에 지현과 같은 단단하고 다정한 사람이 있으니 가능할 것이라고 확신해 본다.

 

 


NO.1 이정호 “그냥 테이핑 한 거니까 신경 쓰지 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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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는 과거의 현수처럼 정점에 올라 있는 인물이다. 단거리 종목에서 늘 1위를 차지하고 있다. 현재의 자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무거운 압박감과 외로움이 갈수록 그를 누른다. 정호보다 젊은 선수들은 그의 뒤를 바짝 따라오고 그들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지만 내려갈 수 없다는 두려움과 욕망이 그를 추동한다. 선발전을 앞두고 느려지는 기록을 보면서 노력을 더 쏟는 대신 바르지 못한 선택을 하게 된다. 그렇게 정호는 약물에 손을 댄다.

 

장면들로 담기지는 않았지만 분명 그가 1위를 거머쥐게 되기까지 남들보다 치열하게 노력하고 애쓴 순간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작할 때의 열정과 간절함이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정점에 머물러야 한다는 강박과 오만으로 변해갔다고 짐작한다. 그 사이에서의 방황은 결국 정호에게 독이 되었다. 코치 형욱에게도 약물을 들키게 되고 그에게까지 비난받으며 외로움은 커져간다.

 

핏줄이 터진 자국을 가리기 위해 허벅지에 테이프를 덕지덕지 붙이는 그의 얼굴에서 때로는 죄책감과 창피함이, 때로는 염치없는 태연함이 읽힌다. 복잡한 감정과 양심은 무시한 채 일단 1위만을 바라보고 달리겠다는 잘못된 선택이 안타깝다.

 

정호의 행위가 올바르지 못하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다만 영화는 정호를 힐난하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거나 그가 모든 것을 잃고 추락하게 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단지 정호가 남기는 그림자와 표정을 비추며 그의 혼란을 뒤따라간다. 치명적인 길을 선택하게 된 그의 감정에 집중하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약물에 처음 손을 댄 순간부터 이미 무너지고 있었을 정호의 과거를 그려보게 하면서 몰입을 돕는다.

 

그의 미래에 대해서도 섣불리 판단하지 않고 여지를 남긴다. 극이 끝난 후, 그가 마땅한 대가를 치르고 다시 올바른 방향으로 달리게 될지 혹은 몸과 마음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또다시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될지 아니면 아예 다른 길을 걷게 될지 상상하도록 만든다.

 

 

 

NO.3 이준서 “마지막으로 한 번 해보고 안 되면 안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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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서는 현수와 정호가 올랐던 정점을 향해 가는 19살의 유망주다. 현재 고등학교 랭킹 1위를 차지하고 있지만 1학년 때의 기량이 워낙 좋았던 탓인지 2년째 기록이 제자리인 상황이다. 주변 환경 역시 좋지 않다. 학교는 육상부를 지원할 여력이 부족하고, 그렇다고 해서 따로 개인 코치에게 레슨을 받을 수 있을 만큼의 가정 환경도 아니다. 육상부 코치인 지완은 조금만 더 노력하면 기록을 올릴 수 있다고 준서를 믿어주지만 스스로 정체기에 접어들었다고 생각하면서 연습에도 소홀해지는 모습이다.

 

기록은 그대로인 동시에 육상부까지 해체될 수 있다는 소리가 들려온다. 다른 길을 찾아야 하나 싶어서 수업을 들으려 노력해 보지만 귀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는다. 아무리 고민해 봐도 할 수 있는 게 달리기밖에 없다. 준서는 자신이 이때까지 해온 것, 잘할 수 있는 것, 그리고 해야만 하는 것은 오직 달리기뿐이라는 것을 느낀다. 지완에게 지도를 간청하는 그의 얼굴에서도 그 간절함과 강단이 비친다. 육상에 꿈과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할 수 있는 다른 것이 없어서 계속해야 한다고 말은 하지만, 사실 트랙 위를 내달리는 준서의 모습을 보면 누구보다 열정을 가진 인물이라는 것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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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서의 에피소드에서는 준서만큼이나 마음이 쓰이는 인물이 있다. 코치이자 조력자인 지완이다. 지완 역시 대학교 때 육상 종목으로 아시안 게임까지 출전했던 뛰어난 선수였지만 국가대표 자리에서 내려온 후 비정규직 교사로서 다소 불안정한 삶을 살고 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준서를 기특하게 생각하며 진심으로 응원하는 인물이다. 다만, 그토록 바라던 국가대표가 되어도 계속해서 패배감과 허무감을 겪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지도를 망설인다. 육상부 코치를 계속하면 정규직으로 전환될 수 없다는 점도 그를 괴롭힌다.

 

그러나 몸과 마음이 무너진 상태로도 연습을 계속하는 준서가 눈에 밟힌다. 천성이 따뜻해서 어두운 밤, 학교 운동장 트랙을 혼자 달리고 있는 준서를 절대 그냥 두고 갈 수 없는 사람이다. 동시에, 국가대표가 미래를 보장해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고 있지만, 무엇보다도 육상을 사랑하기 때문에 같은 길을 꿈꾸는 선수들을 위해 코치를 포기할 수 없는 사람이기도 하다.

 

선발전이 끝난 후, 준서에게 잘해줘서 고맙다고 되뇌는 지완의 얼굴에서 진심의 가치가 읽힌다. 꿈과 열정의 소중함이 다시 한번 버거울 정도로 크게 다가오고, 이내 준서 역시 지완처럼 성장할 것만 같은 직감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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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세 스프린터의 이야기를 그리지만 육상이라는 소재에 국한되지 않는 공감을 전한다. 간절히 이루고 싶은 꿈과 목표를 향해 가는 과정에서 수없이 방황하고 좌절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세 인물에게 투영하도록 만든다. 세 인물의 곁에 서 있는 조력자들의 선명한 캐릭터 역시 몰입을 돕는다. 과거에 지금 꿈을 꾸고 있는 이들과 비슷한 고민을 했었고 비슷한 길을 거쳐왔을 인물들이 어떤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 비추며 끝과 시작의 의미를 상기시킨다.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고 나면 자연스레 캐릭터들과 육상에 대한 애정이 생길 것이다. 여섯 인물들의 사연을 섬세히 살핌과 동시에 단거리 달리기라는 소재까지 충실하게 다룬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작품 속 인물들이 현실 어딘가에서 잘 살아가고 있기를, 과오가 있었다면 마땅한 가책을 느끼고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기를, 또 앞으로 나아갈 최선의 방안을 찾았기를 응원하게 만든다는 것은 영화의 전달력이 탁월하다는 방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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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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