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좋은 글이란 무엇인가

에디터로서의 지난 4개월에 대한 소고
글 입력 2022.07.07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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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생각할 시간이 충분했나.

 

‘좋은 글이란 무엇인가?’처럼 정해진 답이 없는 질문들은 나를 미궁 속으로 아주 간단히 빠트려버린다. 오랫동안 답을 내는 데에 주저했다. 정답이 없다면 ‘나만의’ 답을 내야 했다.

 

나는 나로부터 가장 가까우면서도 멀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나만의’라는 말은 환상과도 같다. 한때는 아무도 말하지 않은 답을 내는 것이 중요했는데, 요즘은 인정받을만한 대답에 근접하는 것이 중요해졌다. 나는 내가 이렇게나 보통에 가까워지고 싶어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좋은 것이란 어쩌면 이유를 대는 순간부터 어려워지는 것 같다. ‘좋은 글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우선 좋은 것에 대해 말할 줄 알아야 할 텐데, 확신을 가져 본 지 너무 오래된 주제였다. ‘좋은 것’은 유동적이고, 내게는 선호를 말하는 ‘좋다’와 라는 가치를 내리는 ‘좋다’ 모두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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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언제나 충분하지 않았다.
 
누군가 ‘그래서 네 글은 좋은 글이냐’라고 묻는다면 당당할 자신도 없다. 그래도 어쨌든 썼다.
 
그렇다면 여태껏 내가 글을 어떻게 써왔는가를 돌이켜 보는 과정에서, 적어도 내가 추구하는 좋은 글’이 무엇인지 쯤은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에디터 활동을 마치며

 

여태까지의 나의 선택은 대부분 확신이 아닌 조바심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렇게 시작하게 된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아트인사이트에서의 4개월과 함께, 2022년도 벌써 반년이 훌쩍 지났다.
 
아쉽게도 아트인사이트 에디터의 가장 큰 혜택이었던 문화예술을 마음껏 누리지는 못했다. 4개월 동안의 나는 밖보다 안에 머물러 있을 때가 많았고, 어쩌다 한번씩 향유할 때면 오랜만인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이 기간 안에 극적인 변화를 경험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그동안 글을 작성하면서 느낀 바에 대한 소고를 작성해보려고 한다.
 
올해의 나는 내가 보기에 대체로 참 미운 사람이었고, 공교롭게도 글을 쓸 기분이 아닌 날이 너무 많았다. 그림으로 비유하자면, 문화예술로부터 얻은 다채로운 색을 아직 덜 빤 붓으로 칠하는 기분이었다. 씁쓸한 마음이 아직 갈지 못한 물통에 고여 혼탁함을 더했고, 애꿎은 붓만 이도 저도 가지 못한 채로 허공을 맴돌게 두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내 인생에서 가장 얘깃거리가 없다고 여긴 4개월은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독자가 많은 기간이었다.
 
나는 한 개인으로서 어딘가에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기회를 꾸준히 바라왔는데, 누군가가 나의 글을 읽어준다는 것은 매우 정성스러운 행동이라 생각되었기에 그에 화답하기 위해서는 나부터 진솔해지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내게 있어 글이란 외면보다 내면에 가까웠고, 남이 들여다보기 어려운 세계를 오래도록 읽히기 좋게 구축해낸 하나의 산물이었다. 그렇게 무게를 내리자마자 글이라는 것이 새삼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겁쟁이인 내가 솔직해지고 싶을 수록 글을 쓰는 속도는 점점 느려졌다. 또 매번 솔직한 내가 항상 시의성에 가까운 것은 아니었기에, 나와 세상의 연결고리를 애써 찾는 일도 결코 쉽지 않았다. 그에 맞춰 어떨 땐 나를 재단하기도 했다.
 
글을 쓴다는 것은 결국 ‘지금의 나’와 ‘되고 싶은 나’가 충돌하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내 약점을 함부로 드러내도 괜찮을지, 기껏 써 놓은 글이 정작 나와 모순되지는 않는지가 전부 고민이었다. 장기적으로 바라보았을 때 이 글이 나중에 어떻게 읽힐지를 생각하니 무척 조심스러워지면서 말을 충분히 골랐는지, 혹여나 놓친 것은 없는지 등에 강박이 생겼다.
 
그러다 보니 ‘내가 바라는 글’과 ‘좋은 글’ 간의 간극이 점점 커지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내 안에서는 여러 마음들이 소리 내어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이를 다 듣고 전부 그대로 쓴다면 글의 맥락과 뜻하는 바가 흐려질 게 뻔했다. 나는 그중 어떤 마음을 경청해야 할지 선택해야 했다.

내 입장에서 나는 항상 부족했다. 오로지 글을 쓰기 위해 하루종일 책상에 앉아있던 사실만은 결백했으나, 마음이 말이 되기 전부터 미운 감정들이 자꾸만 올라와 이를 가라앉히는 데에만 시간의 8~9할 정도를 할애한 것 같다.
 
내가 글을 쓰는 기본적인 원리가 자기혐오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깨닫고부터는 내 글이 진부하게 느껴졌다. 문화예술은 ‘소통’이라는 아트인사이트에서 이런 글을 기고해도 될지, 과연 이걸 누군가 읽고 싶어 할지도 의심스러워졌다. 기껏 ‘솔직해지고 싶은 나’를 겨우 드러내 놓고, 내 글이 누군가에게 읽히기를 바라는 마음과 읽히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동시에 오고 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마감을 해야 할 순간은 또다시 닥쳐왔고, 이번에도 역시나 조바심으로부터 또 다른 선택이 비롯되었다. 내가 선택한 마음은, 나를 글에 순순히 밝히되 가급적 미워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데에 있었다. 누구도 혐오하지 않는 무해함과 맞닿기 위해, 허투루 썼다간 언젠가 나에게도 상처로 돌아올 수 있는 말들을 먼저 감싸 안았다.
 
여태까지의 선택들과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나의 선택이 문장이 되어 당시의 마음과 함께 보다 구체적이고 완결된 형태로 남아있다는 점이었다.
 

 
은근함이 빛을 발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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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부터 나는 ‘은근’이라는 말을 나의 또 다른 이름으로 삼아왔다. 내 이름의 영문 표기에서 ‘j’를 묵음 처리하고 나면 ‘정은’의 발음은 [은근]이 되었다. 게다가 “자극적이지 않고 그윽하다”, “속으로 생각하는 정도가 깊고 다정하다”라는 아주 마음에 쏙 드는 뜻까지 지니고 있었다.
 
처음 이 말을 나의 이름으로 얻게 된 이후로, 내 삶의 방향은 어느 정도 자리잡힌 듯했다. 그리고 작년부터 지금까지, 자기소개를 해야 할 일이 참 많았다. 하지만 내가 정한 자극적이지 않은 ‘나만의’ 특색은 생각보다 몰개성했다. 남을 설득하는 데 실패한, 스스로도 설명이 잘 되지 않는 은근함은 나를 좀먹는 방향으로 아주 쉽게 돌변해 갔다.
 
여태까지 나의 은근함이란, 고작 할 말은 많은데 이유도 모르고 참는 것으로만 발휘되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정하기 싫은 것과 제대로 보려 하지 않는 것은 다르다. 시기를 잘못 찾은 실패들이 더 이상 은근함이라는 말로 포장이 되지 않음을 느꼈다. 단어의 뜻을 왜곡해 세운 이 넓고 얕은 울타리 안에서, 나는 많은 것들에 대해 정의하기를 미뤄왔었다.
 
느려도 다시 한번, 지금의 마지막 순간을 책임지는 글을 써야 한다. 내가 추구하는 은근함은 이를 지속할 수 있는 지구력과 맞닿는다. 은근함이 이야기가 되려면 문장들을 더 모아야 한다. 앞으로도 오갈 데 없는 마음들을 계속해서 문장으로 태어날 수 있도록 힘쓸 것이다.
 
수많은 선택 속에서 내가 고른 말들이 나를 이룰 때, 내가 추구하는 은근함을 솔직하고 조리 있게 털어놓고 이에 만족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내 글이 스스로에게도 좋은 글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는 사이에 나의 세계가 넌지시 구축되고 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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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정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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