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책의 숙명

글 입력 2022.06.20 0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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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기 좋은 동네의 기준은 많다. ‘-세권’이라는 단어가 우후죽순 만들어지고 소비되는 것만 봐도 그렇다. 누군가 나에게 살기 좋은 동네의 기준을 묻는다면 나는 주저없이 대중교통 30분 이내에 도서관이 있는 곳이라고 대답할 거다.

 

학교에 속해 있을 때는 도서관의 중요성을 몰랐다. 대학교와 대학원 내내 학교 근처에 살았기 때문에 도서관은 언제든 갈 수 있는 곳이었다. 대학원을 마치고 오랜만에 본가에서 살면서 알았다. 읽고 싶은 책에 내가 얼마나 많은 돈을 쓰는지. 임시 프리랜서 생활을 하던 시절이라 몇 권 담지도 않았는데 10만원이 훌쩍 넘어가는 장바구니가 부담스러웠다. 빠듯한 잔고를 보고는 곧장 차를 몰아 시립 도서관으로 향했다.

 

새로 조성한 도서관은 묵묵하고도 성실하게 내 잔고를 지켜주면서 동시에 내 지적 허영심을 채워줬다. 난생 처음으로 잘 갖추어진 도시 인프라에 감사함을 느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도서관에 갔는데 도서관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휴관일도 아닌데 문을 닫은 도서관이 의아해 돌아보니 장서 점검으로 인해 임시 휴관한다는 안내가 적혀 있었다.

 

차를 타고 돌아오면서 장서를 점검하는 작업이 어떤 건지 자세히 알고 싶었다. 집에 오자마자 검색 엔진에 ‘장서 점검’이라고 치니, 관련 기사와 글이 우수수 쏟아졌다. 요약하자면 장서 점검이란 소장 자료를 재정비하고 파손된 장서를 폐기하는 작업이다. 사람들의 손을 타면서 낡아지고 결국 폐기되는 도서의 여정이 나에게 큰 울림을 줬다.

 

나는 대출한 책이 낡아 있거나 헤져 있으면 불쾌감을 느꼈다. 책을 이렇게 함부로 다루는 문화시민이 어디 있냐고 불만을 토로했다. 하지만 이제는 낡은 책을 빌리는 데서 자부심을 느낀다. 내가 읽고 싶어한 책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읽힌 책이라는 사실이 뿌듯하고 자랑스럽다. 마치 아무 생각 없이 읽은 책이 어느 날 베스트 셀러가 된 기분이랄까.

 

도서관의 모든 장서가 새 것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는 지역사회와 모든 장서가 낡은 지역사회. 둘 중 어떤 지역사회가 살기 좋을까? 나는 당연히 후자를 고를 거다. 병들어가는 사회 속에, 책 읽는 지역사회는 집단 면역을 형성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건강한 사회라면 도서관의 책은 어떤 형태로든 낡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도서관 책의 숙명은 ‘낡아감’이다. 내 서가에 꽂힌 책보다도 훨씬 빠른 속도로 때가 타고 헤진다. 도서관은 낡아가는 책을 저장하는 거대한 창고다. 도서관에서 낡은 책을 발견하면 보물을 발견한 듯 기뻐하면 좋겠다. 속한 지역사회가 책을 가까이한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면 좋겠다. 누군가 오래 눌러 읽은 쪽을 문신처럼 새긴 책을 만난다면 그 페이지에 조금 더 머물렀으면 좋겠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에는 낡아가는 기쁨도 있다는 깨달음을 안고 살아가면 좋겠다.

 

 

[오영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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