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This is PINK too [문화 전반]

글 입력 2022.06.15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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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좋아하는 것보다 싫어하는 게 더 명확한 사람이다. 좋아하는 겨울 이전에 싫어하는 여름이 있고, 골고루 잘 먹는 사람이 좋은 이유보다 편식하는 사람이 싫은 이유가 먼저 떠오르며, 발라드가 아닌 음악을 즐겨듣는 이유보다 발라드를 거부하는 이유가 더 구체적이다.

 

같은 이유로 누군가 나에게 좋아하는 색을 묻는다면 한참 고민하겠지만, 싫어했던 색을 묻는다면 단번에 답할 수 있다. 핑크라고.


어렸을 때 나는 분홍색이 그렇게 싫었다. 아동복 매장에 있는 여아 옷도, 공책과 필기구도, 실내화도, 침구도 전부 핑크였기 때문이다. 내게 주어진 유일한 색 같았다고나 할까. 내 또래의 여자 아이들이라면(그렇게 자라왔다면 말이다) 이에 공감할 지도 모르겠다. 내게 절대 주어지지 않는 색인 파란색도 좋아하지 않았다. 여자와 남자, 둘 중 어느 쪽도 연상시키지 않는 색이야말로 내가 마음대로 '고를' 수 있는 색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거부한 것은 단지 색만이 아니다. 나는 핑크가 연상시키는 모든 것이 싫었다. 쉬는 시간 여자애들이 공기놀이를 할 때 운동장으로 달려나갔다. 멀쩡한 길을 내버려 두고 남자애들을 좇아 산을 타고 담을 넘어 빙 둘러 귀가하기 일쑤였다. 걸 스카우트가 싫어서 기를 쓰고 컵 스카우트에 들어갔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바지만 입고 다녔다.

 

집에서는 캐릭캐릭체인지나 꿈빛 파티시엘, 프리큐어를 봤지만, 누군가 있으면 파워레인저나 바쿠간 얘기만 했다. 로맨스 장르에도 치를 떨었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이나 '시간을 달리는 소녀', '건축학개론'이 싫어서 히어로가 나오는 DC, 마블 영화를 봤다. 만화 대여점에 가서도 순정만화 코너는 절대 기웃거리지 않았다.

 

주변에 애니메이션을 보는 친구들이 '오늘부터 신령님'이나 '너에게 닿기를' 같은 만화를 얘기할 때 나는 꿋꿋하게 슬램덩크를 빌려 읽었다. 소녀시대의 Oh!는 MP3에도 담아놓지 않고 집에 혼자 있을 때 몰래몰래 뮤비만 재생했지만, 노래방에서는 빅뱅 노래를 선곡했다. 고작 핑크 같은 걸 골라야 하는 계집애로 남기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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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분홍색 같은 것들'을 미워한 것치고 지금 내 곁에는 핑크가 차고 넘친다. 여기서 내 손으로 고른 핑크는 필기구뿐이고, 대부분은 여자애라면 핑크라는 부모님의 고정관념에 따라 가지게 된 물건들이다. 벽지와 문패마저 분홍색이니, 이 얼마나 지긋지긋한 핑크인지.

 

하지만 지금의 나는 분홍색을 그렇게까지 꺼리지 않는다. 핑크에 둘러싸인 채 사느라 익숙해진 걸 수도 있고, 미술을 배운 후로 특정한 색에 대한 선호가 옅어진 까닭도 있다. 나는 빨간색 계열을 가장 많이 썼는데, 36색 팔레트에서 핑크에 가장 근접한 오페라는 빨간색의 채도를 확 살려주는 공공연한 비기였다. 어떤 색 하나를 완전히 미워하기에는 그 색이 아름다울 수 있는 경우의 수를 너무나도 많이 알게 된 것이다.

 

그림을 그리지 않는 지금 내게 있어 색이란 장을 보고 요리할 때 가장 신경 쓰게 되는 요소다. 아무리 맛있어도, 아무리 공을 많이 들여도 색이 하나라면 요리를 완성했을 때 영 멋이 없기 때문이다.

 

김밥에는 당근이 들어가야 색이 사는 법이고, 카레에는 브로콜리가 들어가야만 모양이 산다. 잘 익은 가지만이 광택이 살짝 도는 짙은 보라색을 내고, 신선한 오이만이 소금에 절였을 때 예쁜 연두빛을 띤다. 한때 싫어했던 색들은 그림을 그리면서, 음식의 겉보기를 신경 쓰면서 이제 아무래도 좋게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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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PINK의 주인공 하루오에게 핑크는 '다정하고 예뻤던 엄마의 손톱을 떠올리게 만드는 행복의 색이다. 그렇다면 나한테는? 나한테 행복을 주는 색은 뭘까. 내게도 하루오의 핑크처럼 그 자체로 마법 같은 힘을 주는 색이 생겼으면 좋겠다.

 

어쩌면, 핑크가 그런 색이 되어줄 수 있지 않을까.

 

 

[임혜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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