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This is PINK too [문화 전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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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좋아하는 것보다 싫어하는 게 더 명확한 사람이다. 좋아하는 겨울 이전에 싫어하는 여름이 있고, 골고루 잘 먹는 사람이 좋은 이유보다 편식하는 사람이 싫은 이유가 먼저 떠오르며, 발라드가 아닌 음악을 즐겨듣는 이유보다 발라드를 거부하는 이유가 더 구체적이다.
같은 이유로 누군가 나에게 좋아하는 색을 묻는다면 한참 고민하겠지만, 싫어했던 색을 묻는다면 단번에 답할 수 있다. 핑크라고.
어렸을 때 나는 분홍색이 그렇게 싫었다. 아동복 매장에 있는 여아 옷도, 공책과 필기구도, 실내화도, 침구도 전부 핑크였기 때문이다. 내게 주어진 유일한 색 같았다고나 할까. 내 또래의 여자 아이들이라면(그렇게 자라왔다면 말이다) 이에 공감할 지도 모르겠다. 내게 절대 주어지지 않는 색인 파란색도 좋아하지 않았다. 여자와 남자, 둘 중 어느 쪽도 연상시키지 않는 색이야말로 내가 마음대로 '고를' 수 있는 색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거부한 것은 단지 색만이 아니다. 나는 핑크가 연상시키는 모든 것이 싫었다. 쉬는 시간 여자애들이 공기놀이를 할 때 운동장으로 달려나갔다. 멀쩡한 길을 내버려 두고 남자애들을 좇아 산을 타고 담을 넘어 빙 둘러 귀가하기 일쑤였다. 걸 스카우트가 싫어서 기를 쓰고 컵 스카우트에 들어갔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바지만 입고 다녔다.
집에서는 캐릭캐릭체인지나 꿈빛 파티시엘, 프리큐어를 봤지만, 누군가 있으면 파워레인저나 바쿠간 얘기만 했다. 로맨스 장르에도 치를 떨었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이나 '시간을 달리는 소녀', '건축학개론'이 싫어서 히어로가 나오는 DC, 마블 영화를 봤다. 만화 대여점에 가서도 순정만화 코너는 절대 기웃거리지 않았다.
주변에 애니메이션을 보는 친구들이 '오늘부터 신령님'이나 '너에게 닿기를' 같은 만화를 얘기할 때 나는 꿋꿋하게 슬램덩크를 빌려 읽었다. 소녀시대의 Oh!는 MP3에도 담아놓지 않고 집에 혼자 있을 때 몰래몰래 뮤비만 재생했지만, 노래방에서는 빅뱅 노래를 선곡했다. 고작 핑크 같은 걸 골라야 하는 계집애로 남기 싫었다.
이렇게 '분홍색 같은 것들'을 미워한 것치고 지금 내 곁에는 핑크가 차고 넘친다. 여기서 내 손으로 고른 핑크는 필기구뿐이고, 대부분은 여자애라면 핑크라는 부모님의 고정관념에 따라 가지게 된 물건들이다. 벽지와 문패마저 분홍색이니, 이 얼마나 지긋지긋한 핑크인지.
하지만 지금의 나는 분홍색을 그렇게까지 꺼리지 않는다. 핑크에 둘러싸인 채 사느라 익숙해진 걸 수도 있고, 미술을 배운 후로 특정한 색에 대한 선호가 옅어진 까닭도 있다. 나는 빨간색 계열을 가장 많이 썼는데, 36색 팔레트에서 핑크에 가장 근접한 오페라는 빨간색의 채도를 확 살려주는 공공연한 비기였다. 어떤 색 하나를 완전히 미워하기에는 그 색이 아름다울 수 있는 경우의 수를 너무나도 많이 알게 된 것이다.
그림을 그리지 않는 지금 내게 있어 색이란 장을 보고 요리할 때 가장 신경 쓰게 되는 요소다. 아무리 맛있어도, 아무리 공을 많이 들여도 색이 하나라면 요리를 완성했을 때 영 멋이 없기 때문이다.
김밥에는 당근이 들어가야 색이 사는 법이고, 카레에는 브로콜리가 들어가야만 모양이 산다. 잘 익은 가지만이 광택이 살짝 도는 짙은 보라색을 내고, 신선한 오이만이 소금에 절였을 때 예쁜 연두빛을 띤다. 한때 싫어했던 색들은 그림을 그리면서, 음식의 겉보기를 신경 쓰면서 이제 아무래도 좋게 되어버렸다.
만화 PINK의 주인공 하루오에게 핑크는 '다정하고 예뻤던 엄마의 손톱을 떠올리게 만드는 행복의 색이다. 그렇다면 나한테는? 나한테 행복을 주는 색은 뭘까. 내게도 하루오의 핑크처럼 그 자체로 마법 같은 힘을 주는 색이 생겼으면 좋겠다.
어쩌면, 핑크가 그런 색이 되어줄 수 있지 않을까.
[임혜진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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