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중경삼림에 대한 기억 [영화]

글 입력 2022.06.22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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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눅진한 홍콩과 대만, 왕가위의 영화들을 배경으로 둔 플레이리스트 유튜브를 마주했다. 특유의 녹색빛으로 물든 사진들 중 하나를 누르니 오래전 영화관에서 상영했을 영화들의 영상과 함께 노래들이 하나 둘 이어폰에서 흘러나왔다.

 

 


 

한 달하고 보름 조금 더 전이었던 날, 오랫동안 자리를 지켜왔던 상영관의 마지막 상영이 이루어졌다. 여덟시가 넘은 시간의 중경삼림, 그 영화는 오래된 상영관에 대한 마지막 기억으로 남게 된다.

 

처음 중경삼림을 보게 되었던 날은 대략 1년 전 늦봄과 초여름 사이인 5월, 알게 된 지 얼마 안 된 이를 따라 가죽 공방에 들린 날이었다. 오전엔 401 강의실에서 셔츠의 패턴을 뜨는 것을 시험으로 둔 탓에 아침부터 분주했던 터라 조금은 지쳐있던 상태로, 그가 가죽으로 된 노트 커버를 만드는 동안 졸린 눈으로 친구의 노트북에 틀어둔 중경삼림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중경삼림, 처음 마주한 왕가위 감독의 작품은 묘했다. 어지럽고 불안하고 시리다가도 한없이 후텁지근한, 모순적인 감정들로 가득한 영화. 선명하게 이야기를 보여줘야 하는 영화에서 특유의 핸드 헬드 촬영 기법으로 무질서하게 흔들리는 장면들이 어쩌면 뜨겁다가도 한없이 차가워지게 만드는 '사랑'이라는 개념을 다루고 있는 이 작품을 가장 잘 담아낸 기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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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영화를 봤을 때 경찰 663과 페이, 양조위와 왕페이의 에피소드가 조금은 낯설고 당황스러워서 고개를 갸웃거렸던 기억이 있다. 누군가의 편지를 다 같이 돌려 읽는다던가, 누군가의 집에 몰래 들어가 물건을 바꾸고 흔적을 남기거나 한다는 것들. 이게 과연 로맨스일까, 내게 이러한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내가 이를 ‘사랑’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지만 집으로 돌아와 다음 날 다시 보고 생각나서 한 번 더 보고 그렇게 몇 번을 더 보다 보니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페이는 단순히 물건들을 별 이유 없이 바꾸거나 하지 않았다. 실연의 아픔에 지친 경찰 663을 위해 그의 집을 청소해 주고 물고기가 몇 없는 어항에 금붕어 여러 마리를 풀어주고,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의 cd를 두고 가거나 잠을 제대로 못 자는 그가 푹 자길 바라는 마음으로 물에 수면제를 풀어놓았다.

 

삶의 흔적이 가득 묻은 공간이자 살고 있는 이 자체라고도 표현할 수 있는 '집'이라는 공간에서 전 애인과의 이별에 힘들어하는 경찰 663의 마음을 청소하고, 전 애인에 대한 감정들을 하나둘씩 지워내린 빈 공간에 자신의 물건과 마음을 얹어둠으로써 경찰 663에게 새로운 사랑이 찾아왔음을 알리는 하나의 '사랑의 흐름'을 페이의 행동들로 표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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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663은 결국 그러한 페이를 사랑하게 된다. 누군가를 사랑하여 페이처럼 온 마음을 다해 본 적이 별로 없는 창문에 비친 나를 발견했다. 실연에 대한 두려움 혹은 떨어져 버린 자존감 혹은 잘 알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두려움으로 사랑이라는 두터운 벽의 표면만 만지는 나. 그러한 페이가 나의 눈에는 한없이 대단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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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663의 에피소드는 페이의 사랑에 대한 움직임들로 기억 한편에 자리매김을 했다면, 경찰 223의 에피소드는 대사들로 기억 한편에 남아있다.

 

 

제부터인지 몰라도 난 너무 소심하게 변했다. 

비옷을 입을 땐 항상 선글라스를 낀다. 

언제 비가올지 언제 화창해질지 영원히 모르니까.

 

- 중경삼림 中

 

 

어쩌면 가장 처음 봤을 때부터 이 에피소드에서 가장 감명 깊었던 건 위의 대사였다. 가발, 비옷, 선글라스 이 셋이 우리의 일상에서는 그리 일상적이지는 않은 물건들인데, 일상에서 비일상적인 것들로 자신을 보여준 임청하. 그녀만의 고독하면서도 쓸쓸한 감각들이 더 크게 닿았었다.

 

또한, 비가 오면 우리는 우산을 사기도 하지만, 우산을 들고 데리러 와줄 사랑하는 연인 혹은 가족들이 있다. 그에 반해 기댈 곳 하나 없이 외로움이 잔뜩 묻은 걸음으로 길거리를 걷는 극중 임청하는 무수히 내리는 비에 홀로 비옷을 입고 거닐어야만 했고 견딜 수 없는 햇빛에 그늘을 만들어주는 타인의 손이 아닌 선글라스로 견뎌야만 했다.

 

처음에는 어째서 소심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을까, 그를 대체할 수 있는 표현은 없을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소심'이라는 표현으로 소극적이고 방어적이며 멀리 손을 뻗지 못하고 고독하게 거리를 거닐어야만 했던 그녀를 완전하게 표현할 수 있는 단어임을 쓰다 보니 느낄 수 있었다.

 

결국엔 다 완벽한 단어들 그리고 문장이었다. 경찰 663의 "이 방이 점점 감정이 생겨난다. 강한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많이 울 줄은 몰랐다. 사람은 휴지로 끝나지만 방은 일이 많아진다. (중경삼림 中)" 혹은 "이과수 폭포에 도착하니 보영 생각이 났다. 슬펐다. 폭포 아래 둘이 있는 장면만 상상해 왔기 때문이다. (춘광사설 中)"과 같은 대사들처럼 흔한 단어들과 그리 길지 않은 문장으로도 서정적이면서도 기억에 새겨질 만큼 떨림 있는 문장들이 즐비한 왕가위의 영화들.

 

 

사실 다른 사람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과 사랑한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사람은 변하므로, 어제 파인애플을 좋아했던 사람이 오늘은 아닐 수도 있다.

 

- 중경삼림 中

 

 

세상에 유효기한이 없는 건 없는 걸까라는 독백이 나오는 이 에피소드의 주요 흐름을 이끄는 것은 '기한'이다. 그리고 임청하의 저 독백은 그에 대한 왕가위의 대답이 아닐까 생각했다. 언젠간 기억 속에서 흐려지다 잊게 되는 추억들 그리고 영원히 사랑할 것 같다가도 결국엔 헤어지는 연인들처럼 언제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어느 순간 변하게 되거나 끝이 찾아오기에.

 

하지만 그런 변화들이 있기에 우리는 새로운 것에 한껏 심취하기도 하고, 오랫동안 힘들게 했던 기억들에서 멀어져 가게 되기도 한다. 경찰 223, 하지무에게는 이별을 받아들이기 직전 러닝으로 온몸에 남아있는 슬픔을 없애가던 시간, 702호실의 생일 축하 연락이 찾아온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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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경삼림은 사랑이 시작되기 직전에 에피소드가 전부 끝난다. 열린 결말로 끝나는 에피소드들과 쓸쓸하면서도 찬란했던 미장센으로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가 뜸과 동시에 난 무언가 시작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중경삼림의 눅진하고 더운 홍콩을 배경으로 잠이 들지 않는 무더운 여름밤의 시간을 보내는 건 어떨까.

 

 

[김명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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