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다시 꺼내 본 영화 '로제타' [영화]

글 입력 2022.06.11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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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덴 형제의 대표작 <로제타>를 오랜만에 다시 시청했다. 덤덤하게 눈물 짓고 싶었으나 뻑뻑함만을 먹은 눈은 크레딧이 전부 올라갈 때까지 게으르게 껌뻑댈 뿐이었다. 짙게 남은 씁쓸함이 괴롭지만 삶이 죽음처럼, 죽음이 삶처럼 느껴질 때마다 꺼내 볼 영화가 있음에 감사하게 된다. 어릴 적에는 내가 로제타와 닮아감에 위로를 얻곤 했는데, 그의 나이를 애써 넘어 온 후로는 로제타가 나를 닮아갈까 두려워지는 어른이 된 것 같다. 아래는 영화를 보며 새롭게 정립한 생각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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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노테이션과 코노테이션 개념으로 본 <로제타>


 

섣부른 가치 판단을 배제한 채 인물의 현실을 진득히 쫓는 다르덴 형제의 연출 스타일은 <로제타>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이 피상적인 이미지만을 수용하는 한계를 지닌 건 아니다. 영화에는 분명 주인공 로제타를 둘러싼 다양한 오브제를 통해 디노테이션(외연적 의미)과 그 안에 씁쓸이 들어 찬 코노테이션(내포적 의미)까지 내제하는 장면이 풍부하게 배치되어 있다.


로제타의 삶의 요건들은 ‘임시’라는 코노테이션을 내포하고 있다.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 트레일러(실제로 로제타는 ‘여기 오래 살지도 않을 거면서.’라는 대사를 하며 현재 거주지가 일시적일 뿐이라 믿는다.), 아주 잠시 복통을 가라앉혀 줄 뿐인 헤어 드라이기, 찬바람을 막는 휴지 등의 디노테이션이 그러하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아주 일시적이며 급급한 해결책들을 의미하고, 로제타의 삶이 필연적으로 지닌 불안정성을 내포하는 오브제들이다.

 

물고기를 잡으러 갈 때면 잠시 갈아신는 낡은 장화나 어설프게 만든 낚시대 역시 마찬가지이다. 로제타의 삶은 항시 불완을 내제한다. 로제타는 이 불완전성이 오히려 아름다운 가능성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낙관을 가져도 좋을 나이이나, 그것은 남일일 뿐이다. 불완전한 가정 환경 속에서 그의 어린 나이는 어릴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되지 못한다. 불완전성의 수혜를 충분히 누리지 못한다. 이는 로제타의 비참한 일상에 대한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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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결말 부분에서 로제타가 힘겹게 옮기는 가스통 역시 해당 개념으로 해석해볼 수 있다. 해당 장면은 시시포스 신화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하는 부분이 있다. 이승의 죄에 대한 벌로 평생 제 몸의 수십 배는 되는 돌을 굴려야 하는 시지프스 말이다. 돌이 정상에 오르면 다시 굴러 내려가기 때문에 똑같은 일을 반복해야 하는데, 이는 로제타의 삶에 대한 은유처럼도 느껴질 정도로 흡사하다.

 

가스통이라는 디노테이션은 로제타가 짊어진 삶의 무게라는 코노테이션을 함의한다. 도와주는 사람 하나 없이 가스통을 들고 가는 로제타의 얼굴은 눈에 띄게 일그러지고, 출구 하나 없이 고통스러운 삶을 일궈 나가는 인간의 초상을 대변하는 듯 하다. 가스통이 대표적이긴 하지만, 팔기 위해 싼 헌 옷 뭉치, 밀가루 포대, 저보다 훨씬 덩치가 큰 엄마의 몸 등은 가난의 무게라는 코노테이션을 함축해 로제타를 짓누른다.

 

영화 내내 로제타는 단 한 번의 미소와 눈물을 보이는데, 모두 리케와 함께 있을 때이다. 특히 로제타를 웃게 했던 리케의 물구나무에 집중해보려 한다. 물구나무는 세상을 거꾸로 보게 된다는 속성, 즉 디노테이션을 갖고 있다. 이는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이 고통스러운 현실을 너무 쉽게 뒤집고 마는 방식의 제안이라는 코노테이션을 지닌다. 로제타로 하여금 그렇게 간단하고도 우스운 해결법이라는 점에서 웃음을 유발하게 이끈 것이다.

 

 

 

결말을 결말답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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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만찬처럼 계란을 까 먹고 가스 누출로 인한 자살을 도모하던 로제타. 그는 이내 가스마저 다 떨어졌음을 알고 트레일러를 나선다. 새 가스통을 구입해 힘겹게 옮기는데, 영화 내내 리케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등장하는 오토바이 소음이 가까워진다. 그것은 순간적으로 희망의 사인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로제타는 복통과 함께 바닥으로 쓰러지고, 리케는 오토바이에서 내려 그를 일으켜 세운다. 이는 로제타가 모든 문제적 상황에서 해방된 것도, 리케와의 완전한 화해를 드러내는 장면이라 하기에도, 그렇다고 자살로 비극적인 생을 마감할 것이라는 확신도 들지 않는 일명 불친절하게 열린 결말이다.

 

내가 이 불친절함이 온당하다 느끼는 이유는 옅은 ‘희망’의 표지이기 때문이다. 로제타는 영화 내내 바쁘게 움직이고, 그의 시선은 어딘가 황망한 곳을 바라보며 빠르게 교차한다. 모든 것이 일시적이고 불안정하기에, 로제타의 시선을 오래 묶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에서 로제타의 시선 너머에는 분명 리케가 있다. 영화 클라이막스에서 로제타는 리케를 배신하고 그의 일자리를 빼앗는데, 이는 그들이 친구이기 이전에 불안정한 노동자 계급으로서, 즉 일자리를 두고 경쟁해야 하는 위치에 놓여있는 현실을 보여준다. 자본이라는 거대한 시스템 앞에서 노동자들의 순수한 연대는 불가능함을 드러낸다.

 

연대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는 하나 당장 눈 앞의 생활고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장기적인 시각을 지니라는 말은 폭력이 될 것이다. 그러나 로제타를 일으키는 리케와 이런 리케를 눈물 젖은 눈으로 바라보는 로제타의 구도는 그들을 노동자 계급에서 다시 연대할 수 있는 친구로 돌려 놓는다.

 

영화 내내 미약한 희망의 끈마저 연달아 놓쳐버리게 되는 관객은 이 장면에서 정말 ‘희망’을 본다. 사회 시스템적인, 즉 어떠한 본질적인 변화가 되지는 못하더라도 이는 분명 의미가 있는 변화이다. 인간은 수많가지 이유로 죽고 싶어 하다가도 단 한 가지 이유로 살겠다고 결심하기 때문이다.

 

*

 

영화 중반에 트레일러에 돌아가고 싶지 않은 로제타가 리케의 집에서 머문 것처럼, 리케는 로제타가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을 때 그의 몸을 덮혀줄 천막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리케가 먼저 내민 화해의 제스쳐는 완전한 구제의 가능성이라기엔 비약이 있지만 적어도 로제타를 ‘죽지 않고 어떻게든 살아감’의 의지로 이끌 것이다. 로제타가 그토록 바랐던 ‘평범한 삶’에는 으레 삶의 동반자가 있기 마련이다. 나는 여기서 나약한 희망을 붙잡아 본다.

 

리케는 친구이자 함께 사회 주변부에 고립된 노동자로서 그의 동반자가 되어 줄 것이다. 영화의 결말은 끝맺음인 동시에 ‘평범한 삶’에 대한 시발점이 아닐까. 이러한 결말이 아니었다면 영화 <로제타>는 그저 답보 상태에 머물러 안타까움과 답답함만이 잔여한 작품이었을 수도 있겠다 생각한다. 이러한 이유로 결말은 매우 적절했다 여긴다.

 

 

[오송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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