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4월 3일이야, 생일 축하해 [영화]

<나의 서른에게>
글 입력 2022.06.07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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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세상이 나를 놀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날이 있다.

 

시끄러운 알람 소리를 듣고 눈을 떴는데 창밖으로 보이는 건 흐리고 눅눅한 하늘이고, 비몽사몽 한 정신에 찬물을 끼얹으려 화장실로 가면 아빠와 동생이 각각 차지하고 있어 헛걸음질이 되어버린다. 부랴부랴 준비를 마치고 밖으로 나가서 탄 엘리베이터가 15층, 13층, 10층, 7층에서 멈춰 조금 거슬리지만, 아직은 참을 만한지 그래도 ‘점검 중’ 표시가 뜨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곧 그 인내심도 깨지게 되는데, 서울 1호선의 지긋지긋한 연착이 유독 심한 것이 그 원인이다. 1호선의 끝자락에 살고 있는 터라, 거의 모든 경우에 자리에 앉아 가는 소소한 호사를 누리고 있지만 왜인지 그 날따라 붐비는 열차에 숨이 막힌다.

 

긴 통학의 마지막 관문인 정문 앞 횡단보도는 눈앞에서 빨간불로 바뀌고 사람에 휩쓸리듯 계단을 올라 정각이 되기 전, 아슬아슬하게 강의실에 도착한다. 꺼진 핸드폰 화면에 비치는, 습기 때문에 잔뜩 부스스해진 나의 잔 곱슬머리가 한층 더 깊어진 짜증을 선사한다.


아주 최악은 아니지만 ‘적당히’ 최악인 일들의 연속은 어딘가 모르게 내 신경을 자꾸만 자극한다. 대놓고 화내기엔 머쓱하지만, 그렇다고 모른 척 넘기기엔 찝찝하다. 그렇게 자꾸만 곱씹어 보게 되는 것이다. ‘조만간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데, 내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나?’ 이 불길한 예감은 보통 들어맞는다.

 

잊고 있었던 과제가 불현듯 떠오른다거나, 새로운 팀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다.

 

 

 

스물아홉, 임약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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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주인공 ‘임약군’도 마찬가지다.

 

3월 3일, 그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이른 아침에 눈을 뜨고, 출근 준비를 한다. 바쁜 준비 과정 속에서 그의 마음에 계속 걸리는 한 가지는 바로 서른 번째 생일이 한 달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장난이라도 치듯이 약군을 둘러싼 주위의 것들이 그에게 곧 서른이 될 것임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출근길 버스에서 우연히 만난 고등학교 경제 선생님과 근황을 주고받으며 그가 이제는 보험 회사에 다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에게서 여자는 나이를 먹을수록 가치가 떨어진다느니, 미혼인 여자는 계획을 잘 세워야 한다느니 따위의 조언을 가장한 무례한 발언을 듣고, 보험 가입 신청 서류와 함께 버스에서 내린다.


퇴근 후, 한 달 먼저 태어난 고등학교 친구의 생일을 축하하려 모인 자리에는 진한 색 크림으로 ‘Happy 30th Birthday’라고 쓰여있는 케이크와 청첩장이 있다.


팀장으로 승진해 새로운 프로젝트를 맡게 되었을 때, 갑작스레 떠안게 된 책임감에 불안해하는 약군을 향해 회사의 대표는 ‘토성 주기’를 언급한다. 토성의 공전주기는 30년이므로, 사람이 30살이 되면 토성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 영향이 긍정적인 결과를, 혹은 부정적인 결과를 불러올지는 아무도 확언할 수 없지만, 토성 주기를 두 번 겪었고, 같은 분야에서 성공한 다른 여성의 말은 꽤 효과적인 위로가 된다.


보험 서류는 찢어 버리면 그만, 케이크 위 크림은 덜어내면 그만이다. 남이 쉽게 하는 말은 흘려버리고 ‘진짜’ 조언만 가져가면 된다. 하지만 시간의 압박은 그렇게 쉽게 떨쳐낼 수 있는 문제가 아님을 우리 모두가 경험하지 않았는가. 깊어지는 고민의 수렁 속에서 끌어올려 줄 손을 기다리지만, 정작 약군에게 내려온 것은 썩은 동아줄이다.


상의 없이 약군이 살고 있는 집을 팔아버린 집주인은 한 달의 유예 기간을 주고는 집을 비우라며 통보한다. 그 어느 때보다도 안정된 삶에 대한 갈망이 지독한 시기에 몸 누일 곳 없이 그대로 쫓겨날 수는 없기에,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인간관계를 이용해 머물 곳을 찾아낸다.

 

 

 

스물아홉, 황천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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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번째 생일을 한 달 남겨둔 ‘황천락’은 올해로 10년째 음반 가게에서 일하고 있다. 단조로운 일상은 언제나 삶을 뒤바꾸는 생소한 결정을 내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게 한다. 그리고 그 충동이 행동으로 현실에 나타나려면 강력한 계기가 필요하다. 천락의 경우, 그 계기는 ‘유방암 말기’이다.


그는 항상 학교라는 공간에서 꿈에 대해 생각할 기회가 부족한 것에 안타까움을 가지고 있었다. 단지 돈벌이의 수단으로써 이용되는 꿈이 아니라 진정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이 그를 행복하게 만드는지 사색했으며, 그 고민으로 발견한 ‘무엇’을 폴라로이드 필름에 담았다.


좋아하는 음반, 좋아하는 사람들, 그것들과 있으면 밝게 빛나는 자신의 미소를 사진으로 기록했고, 텅 빈 벽에 기억의 에펠탑을 쌓았다. 영화 ‘선셋 인 파리’ 속 굳건히 서 있는 에펠탑에 언젠가 꼭 가겠다는 꿈은 천락의 마음속에 언제나 자리 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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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를 꿈꾸는 것 외에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은 존재하지 않았다. ‘크게 바라는 게 없어서’다. 그가 가지고 있었던 목적 없는 미래조차 장담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유일하게 바랐던 파리로의 여행을 떠난다. 한 달 동안 비어있을 집에 새로운 주인을 찾아주고서는, 자신의 이야기로 가득 찬 벽을 완벽한 타인에게 스스럼없이 공유한다.

 

 

 

4월 3일이야, 생일 축하해


 

완전히 독립적인 개체가 존재할 수 있을까? 이제껏 약군은 자신이 독립적인 인간이라고 여겨왔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오랫동안 만나온 남자친구와도 헤어진 그는 찾아온 공허함을 견디지 못한다.

 

스스로 그려온 주체적인 자신의 모습과 달리 그는 친구에게 의존했고, 남자친구에게 의존했고, 잠에 의존했다. 명백한 도움을 받지 않았다고 해서, 물질적인 지원을 받지 않았다고 해서 독립적인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어떤 것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기댈 수 있는 등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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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어서 힘든 일들을 털어낼 수 있다고들 하지만, 계속해서 흐르는 눈물은 바닥으로 떨어지기 전 마음을 적신다. 바람에 훌훌 털어버리기에는 눈물을 머금고 있는 마음이 너무 무거운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이 증발하여 날아가는 순간은 분명히 찾아온다. 그 무게를 주체할 수 없어질 때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슬픔을 극복할 실마리가 보인다.


완벽한 타인의 이야기가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른다. 아는 것이라고는 얼굴과 이름 그리고 같은 해, 같은 날 태어났다는 사실 뿐인, 아무런 연고도 없는 이의 애정이 가득 담긴 공간에 머무르며 30 너머의 숫자를 기대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독립심’이나 ‘자립심’이 바람직한 가치로 평가되는 사회에 살고 있지만, 의존하는 것이 꼭 나쁘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등에 기대고, 등을 내어주며 살아가도 괜찮다. 약군은 천락의 존재에 의지하고, 천락은 미래를 약속해준 친구에 의지한다.

 

어딘가에서는 약군의 존재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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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3일. 지구 반대편, 오랫동안 꿈에 그리던 장소에 있을 이에게 마음속으로 건네는 서른 번째 생일 축하 인사는 나의 서른에게 전하는 말이며, 너의 서른에게 전하는 말이다.

 

 

[김민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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