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혐오와 차별의 시대 속 한국어 낯설게 바라보기- 미끄러지는 말들 [도서]

우리는 정말 순수한 언어를 말하고 있을까?
글 입력 2022.05.31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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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한국어를 ‘외계인’의 눈으로 살펴본다면 어떤 세계가 펼쳐질까? 우선 하나의 언어, 하나의 영토, 하나의 민족이라는 삼위일체의 신앙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우리들, 새로운 한국어들, 새로운 한국의 언어들을 발견하게 되고 또 상상하게 될 것이다.

 


미끄러지는 말들 2D_L.jpg

 

《미끄러지는 말들》은 사회언어학자 백승주가 2020년부터 <한국일보>에 연재 중인 ‘언어의 서식지’라는 칼럼을 중심으로 다른 매체에 쓴 글들, 논문, 에세이 그리고 추도문 등을 함께 묶은 것이다. 저자는 끊임없이 변하는 관계 속에서 ‘유동적이고 유예되고 미끄러지는’ 말들의 의미를 기어코 붙잡아, 그 말들이 숨기고 있는 관계들을 들여다본다.

 

1장부터 4장까지는 표준어와 일상어를 대하는 우리들의 온도차, 폭력과 재난, 혐오와 차별의 사회를 고스란히 반영하는 ‘지금, 여기’ 말들의 풍경, 한국어를 가르치지 않는 모순의 한국어 교실 등 언어와 언어 그 너머의 세계를 다룬다. 더불어, 한 장이 끝날 때마다 ‘금지된 언어 3부작’으로 역대 대통령들의 말에 대한 논쟁을 담았다.

 

 

 

“우리는 정말 순수한 언어를 말하고 있을까?”



저자 스스로 던진 질문에 대해 그는 책 속의 소제목대로, “도대체 순수는 어디에”라고 반문한다. 애초에 순수한 언어란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언어는 순수하게 존재하지 않는다. 언어는 끊임없이 변하는 관계 속에서 ‘유동적이고 유예되고 미끄러지는’ 속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언어에서 ‘관계’를 제거하고 순도 높은 결정체를 추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람들 간의 관계, 사람들이 세상과 맺는 관계, 그 모든 관계 사이에 언어가 있고, 그런 언어의 모습은 네모반듯하지 않고 언제나 울퉁불퉁하다.

 

- <그리고 남은 말들>에서

 

 

그러니 저자는 언어에 대해서 생각할 땐 사회와 언어, 삶의 얽히고설킨 관계를 들여다보라고 말한다. 지금도 미끄러지고 있을 말들을 주의 깊게 바라보고 의심하고 질문하라고.

 

요컨대 이런 질문들을 던져볼 수 있다.

 

‘다라이’ ‘벤또’ ‘빵꾸’ ‘구루마’ 같은 말들은 식민 시대의 잔재인 일본어일까, 우리의 진짜 삶 속에서 살아가는 지역 방언일까? ‘미싱’이나 ‘오함마’, ‘공구리’ 같은 노동 현장의 언어는 꼭 순화되고 고쳐야 하는 언어인 걸까? 아니면 이 땅에 존재하는 250만 이주민들의 언어는 한국어로 볼 수 있는 걸까?

 

이처럼 책에서는 구어, 지역 방언, 신조어, 노동 현장의 언어, 이주민의 한국어, 한국어가 아닌 한국어로 여기는 언어들을 향해 ‘왜’라는 질문과 함께 스스로에게도, 이 글을 읽는 독자에게도 질문을 계속 던진다. 그리고 끝없이 의심하고 탐색하는 과정을 통해  다시금 생각할 지점을 짚어준다.

 

그렇게 독자로 하여금 한국어와 한국 사회, 그리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삶의 장면들을 낯설게 보게 만듦으로써 ‘왜’ 우리는 한국어를 낯설게 바라봐야 하는지 설득시킨다.

 

 

 

“어떤 재난은 언어를 바라보는 시각에서도 만들어진다.”



안타깝게도 저자가 한국 사회라는 언어의 서식지를 탐구하며 가장 많이 관찰한 것은 혐오와 차별, 억압의 말들이었다.

 

각종 노동 현장에 아직도 일본어의 잔재가 '뿌리 뽑히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을 개탄하고, 하루 빨리 힘을 모아 이런 저급한 언어들을 '순화'해야 한다고 힘차게 외쳐야 한다. (중략) 그런데 나는 불온하게 자꾸 이런 질문을 떠올린다. 언어학자들은 공장으로, 건설 현장으로 찾아가서 그 공간의 사람들이 어떤 말을 사용하고, 어떻게 대화하는지 진지하게 탐구해 본 적이 있는가? _p.47

 

한국어로만 된 재난 문자가 당도하겠지만 그 문자는 그들을 재난으로부터 구하지 못한다. 그 문자는 한국 사회가 이주민들을 소통의 대상으로 삼지 않음을, 그들에게는 성원권이 없음을 보여 준다. 이때 한국어는 언어로 만들어진 분리 장벽이다. 이렇게 우리는 언어로 우리 안의 ‘외부’를 만들고, 250만 이주민들을 그곳으로 추방시킨다. _p.86

 

얼마 전 한 지인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나는 제주 말 중에 '속솜하다'라는 말이 제일 좋아요. 고요하다는 뜻이잖아요. 너무 편하고 느낌이 좋은 말 같아요." "네?" (중략) 내부 식민지의 언어는 질곡의 역사가 담긴 말조차도 '예쁘고' '팬시'하게, 오리엔탈리즘적으로 소비된다. 당황한 나는 잠시 뜸을 들인 후 이렇게 설명한다. "속솜하다는 보통 '조용히 해라'라고 경고할 때 쓰는 말이에요. 저는 대학에 들어가서야 43에 대해 알게 되었는데요, 그때 할머니께 할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여쭤봤어요. 제 질문을 듣자마자 할머니가 하신 첫 말씀이 '속솜허라'였습니다." _p.105~106

 

나는 X세대가 아니었다. 지금에야 깨닫는다. 사회가 나를 그렇게 호명했지만 그건 나의 이름이 아니었다는 것을. 마찬가지다. 누군가 당신의 이름을 부른다면, 일단 의심하시라. 그게 진짜 당신의 이름인지를. _p.127

 

"-에: 「조사」명사와 결합하여 사물이나 건물, 장소의 위치를 표현하는 격조사."

이 설명은 언어의 불순물을 거르고 걸러 만들어 낸 순수하고 단단한 결정 같다. 누가 감히 여기에 어떤 편견이나 차별이 개입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녀는 이런 '-에'를 이용해 세탁기가, 냉장고가, 전기밥솥이 어디에 있는지 말한다. 그녀의 남편은 묻는다. 여보, 양말은 어디에 있어요? 서랍 안에 있어요. 어느 서랍에 있어요? 침대 옆 서랍에 있어요. 조사 '-에'가 제시된 이 교재의 세계에서 장소란 '집 안'의 방들만을 가리킨다. 사물들은 가전이나 가구뿐이다. 이 세계에서는 결혼이주여성의 신체가 집 안에만 머물도록 설계되어 있다. 새롭게 배운 언어로 이 여성이 말할 수 있는 것은 집 안 물건의 위치뿐이다. _p.172~173

 

이처럼 저자는 당연하다는 듯 지나치는 ‘접촉의 순간’들을 정지 버튼을 누르고 살펴본다. 그리고 혐오와 차별의 말들이 포장된 ‘상식의 말’들을 끝없이 의심한다. 혐오와 차별의 산맥 사이, 깊은 계곡에 갇혀 침묵당한 이들의 목소리를 붙잡아 수면 위로 떠올린다. 각 지역의 방언, 외국인 노동자의 말, 통속어, 트라우마 생존자의 드문드문 끊어진 말들을.

 

텍스트 위로 떠올린 수많은 ‘접촉의 순간’들을 살펴보며 독자는 마음 한구석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나의 권력과 편견이 또 다른 누군가를 차별하거나 배제시키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의심하게 된다. 길게 이어지는 의심의 끝자락에서 침묵 속 부끄러움을 드러낸다. 저자는 직설적으로 이 점을 짚어낸다.

 

 

나는 차별한다. 내가 여기에 올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갈 수 없는 곳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차별한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녀가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차별한다. 내가 가질 수 있던 많은 것들은 그녀가 가질 수 없었던 수많은 것들 때문이다. 이렇듯 내가 위치한 이 공고한 세계는 그녀에게 금지된 것들 위에 세워져 있다. _p.176-177

 

 

저자의 말을 빌려, ‘우리는 차별하지 않으면서도 차별한다. 부끄럽지만 사회에서 유통되는 언어의 성질을 살펴보면 볼수록 나 자신이 차별의 체계를 구성하는 일원임을 깨닫는다.’

 

그러니 끊임없이 불편해하며 언어를 둘러싼 수많은 관계들에 대해 예민한 촉수를 곤두세워야 한다. 그리고 이제는 말해야 한다. 피해자와 연대한다고. 차별에 반대한다고. 그래야 혐오와 차별의 고리가 만들어낸 지층의 벽을 뚫고 묻힌 이들의 말들의 풍경도 만들 수 있는 희망이 생긴다.

 

 

 

“사회란 사람들끼리 ‘말을 섞는 순간’ 만들어진다.”



아직까지도 우리는 너무나 손쉽게 지역민, 이주민, 트라우마 생존자, 여성 등 이들의 언어들을 감금되어야 하는 언어, 사회와 격리되어야 할 언어로 여긴다. 그렇게 이들은 '들어서 뭐 하겠나'하는 냉소적인 말과 함께 사회에서 배제된 '없는' 존재가 된다. 이에 저자는 이들 모두 ‘함께 사회를 만들어 내는’ 소통의 대상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 사회의 진짜 모습이란 긴 의자에 이주민을 포함한 수많은 ‘우리’들이 뒤섞여 함께 앉아 있는 것에 가깝다. 우리는 분리되어 있지 않고 분리될 수도 없다. _p.87
 

 

다양한 정체성들을 인정하고 서로의 말들이 자유롭게 섞이고 넘나들 수 있을 때, 저자가 비유한 문장처럼 우리는 지금과는 다른, 긴 의자에서 장벽 없이 모두가 뒤섞여 즐겁게 떠들고 있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신송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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