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추앙을 통한 해방 - 나의 해방일지 [드라마]

글 입력 2022.05.27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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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추앙해요"

 

도통 일상 대화에서는 쓰지 않는 말이 드라마에서 들리는 순간, 아마 대부분의 시청자들의 반응은 '구씨'(손석구)와 같았을 것이다. 나 역시도 '추앙'이 대체 무슨 의미였는지 검색했었다.

 

남녀 사이의 로맨스를 '높이 받들어 우러러보는' 관계로 표현한 이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는 다소 생경한 단어 사용에도 불구하고 서서히 시청자들 마음속에 스며 들었다. 자칫하면 지루할 법도 한 지극히 평범한 사람 사는 이야기가 일상에선 접하기 어려운 문학적인 표현을 만나 제대로 날개를 달아 어느덧 종착지로부터 2회만을 남겨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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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드라마는 극적인 사건 하나 없이 정말 평범한 이야기를 담고 있고, 주요 스토리는 남녀가 사랑하며 서로 변화하고 성장하는 클리셰를 정석적으로 따르고 있다. 하지만 '추앙'으로 표현된 이들의 사랑은 그동안 수많은 미디어에서 다뤄졌던 사랑과 결정적으로 차별화된 몇 가지가 있다.

 

일단, 여자 주인공인 '염미정'(김지원)은 남자 주인공 '구씨'의 이름도 어디서 왔는지도, 무슨 일을 했던 사람인지도 모르는 상태로 냅다 추앙부터 시작한다. 드라마에서 '추앙'의 정의는 '응원'이다. 있는 그대로, 온 마음을 다해 응원하는 관계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이러한 설정을 넣은 듯하다.

 

즉, 이들은 사랑을 하지만 서로에게 파고들려고 하지 않고, 서로에게 바라는 게 없고, 위로와 조언도 건네지 않는다. 이는 염미정이 사람에게 지쳐 해방되고 싶어 만든 사내 동호회 '해방 클럽'의 강령과도 연결된다. 염미정은 구씨를 추앙하기로 결심하고, 해방 클럽을 만들고 나서 자신의 친언니인 '염기정'(이엘)에게 이런 말을 한다.

 

 

"전적으로 준 적도 없고, 전적으로 받은 적도 없고. 다신 그런 짓 안 해. 잘 돼서 날아갈 것 같으면 기쁘게 날려 보내 줄 거야. 바닥을 긴다고 해도 쪽팔려 하지 않을 거야. 세상 사람들이 다 손가락질해도 인간 대 인간으로 응원만 할 거야. 부모한테도 그런 응원 못 받고 컸어, 우리"

 

 

흔히 부모의 사랑은 '조건 없이 모든 걸 다 내다 주는 사랑'으로 정의되곤 하지만, 염미정의 말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모한테서 마저도 그런 사랑을 받아봤다고 확신하지 못한다. (당연히, 부모의 사랑을 비하하는 뜻이 전혀 아니다.) 드라마에서 두 남녀의 추앙은 단 한 번도 채워진 적 없었던 사람들이 '채워지기 위해', 그래서 봄이 오면 '다른 사람이 되기' 위해 시작한 만큼, 그 누구로부터, 하다못해 부모나 나 자신으로부터도 받아본 적 없어 비어 있는 사랑을 시도해 보는 것이다.

 

일반적인 사랑과 추앙의 차이는 구씨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도, 바라지도 않는 염미정이, 사람에게 지쳐 그 어떤 마음도 내주지 않는 것 같은 염미정이, 친오빠 '염창희'(이민기)가 위험하게 농수로를 뛰어넘으려고 할 때 '하지 마, 하지 말라고' 강하게 말리는 모습에서 한 번 더 나타난다. 우리가 해왔던 사랑은 염미정이 염창희에게 '하지 말라고' 하는 것과 비슷하다. 사랑하기에, 상대의 안녕을 위해서 이것저것 바라는 것이다. 추앙 역시 상대가 '오늘 당신에게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바라지만, 그러기 위해 상대가 무언가를 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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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신기하게도, 상대의 추앙을 받은 두 남녀는 좋은 일이 생기도록 하기 위해, '해방'되기 위해 스스로 무언가를 한다. 그렇게 구씨는 매일 밤을 술에 취해 보내느라 술병이 가득 찼던 방을 깨끗하게 치웠고, 염미정은 모든 관계가 노동이라며 피하고 싶었던 사람들에게 먼저 말을 걸어보기도 했다. 어두운 삶에서 해방'되기' 위해 술을 마시고, 회피했던 지난날들과 달리, 추앙을 하며 정면 돌파하고 주체적으로 해방'해보는' 용기를 얻은 셈이다.

 

특별하고도 이상적인 사랑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드라마의 기승전결이 그렇듯, 그들 역시 이별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 오는데, 추앙을 베이스로 둔 이별 방식 역시 독특하다. 구체적인 사유 설명 없이 그냥 떠나려고 하는 구씨에게 염미정은 화는 나지 않지만 서운하다고 한다. 상대방에 대해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에게 쏟아 내는 '화'가 아닌, 나의 감정으로만 남겨두는 '서운함'을 표한다. 그리고 그동안 자신을 떠난 남자들을 저주했던 과거와 달리, 구씨가 감기 한 번 들지 않기를 바라며 추앙을 멈추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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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앙커플'을 포함하여 드라마의 등장인물들이 해방되고 싶어 하는 것들은 여러 가지다.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는 경기도민으로서 지긋지긋한 출퇴근길부터 시작해서 가부장적인 가정, 열등감, 비정규직, 마음에 들지 않는 선배와 직장 동료 등이 '염씨 남매'를 가둬 놓고 있다. 이들을 가둬 놓는 것은 특별한 드라마적 장치처럼 느껴지지 않고, 우리 일상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지현아'(전혜진)가 '드라마는 주인공이 무지 애쓰는데 안 되는 이야기를 써야 한다, 그런데 우리 삶이랑 똑같은데 뭐하러 쓰냐'고 짜증 섞인 말투로 말하는 장면이 있다. 사실 그렇게 우리 삶이랑 똑같으면 드라마가 될 수 없기 때문에 대부분의 드라마는 무지 애쓰는데 되지 않는 여러 환경적인 문제들을 꼬집는 전개를 펼친다.

 

예를 들어, 비정규직인 염미정이 무시당하는 모습들이 여타 다른 드라마였다면 염미정이 뒤엎든, 구씨가 뒤엎든, 아니면 제3의 요인으로 인해 염미정을 무시했던 직원들이 인과응보를 받는 모습들로 전개되어 주인공이 해방되는 결말을 맺었을 것이다. 열등감을 '아무나 사랑하며' 채워보겠다는 염기정이 다른 드라마였다면 오로지 염기정만을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나는 사실 소중한 존재라는 걸 깨닫고 해방된 뒤, '여러분도 소중해요' 라는 흔한 메시지를 던지며 끝났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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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드라마는 그냥 흘러간다. 무지 애쓰지만 생각보다 잘되지 않는다. 비정규직이라고 무시하는 상사한테 염미정은 그냥 참는다. 염기정은 사랑하고픈 상대가 나타났지만 아이가 있는 싱글대디고, 그에게 거절당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인생이 그러하듯, 화나지만 생각보다 각 잡고 싸우고 끝을 보는 일은 없으며, 동화 속 운명적인 상대는 없다. 지극히 현실적인 이 드라마에는 무지 애쓰지만 되는 일은 없어서 무기력해져도 그럭저럭 살아가는 인물들만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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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여기서 끝났다면 지현아 말대로 뭐 하러 드라마를 쓰냐는 소리가 저절로 나올 것이다. 하지만 이 드라마의 핵심은 '추앙'이다. 즉, 이 드라마는 결국 각각 택한 추앙의 루트를 통해 그럭저럭 살아갔던 인생을 그래도 좀 살만한 인생으로 만들어 본다. 염미정은 앞서 설명했던 구씨와의 추앙을 통해, 염기정은 머리 아프게 계산하고 애태우던 흔한 연애 방식에서 벗어나 본인 마음껏 표현하고 또 상대를 쉬게 하는 염기정만의 추앙을 통해 말이다.

 

방식이 어떠하든 추앙은 '나'를 채워준다. 그리고 온전하게 채워진 나는 옥죄어 오던 것들을 뚫고 나아가 비로소 해방을 맞을 수 있게 한다. <나의 해방일지>는 결론적으로 '나'를 추앙하는 것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 궁극적인 메시지는 염창희가 하는 추앙으로 드러난다. 염창희는 다른 등장인물들과 달리, 혼자서 자신을 추앙한다. (물론 자동차도 추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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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으로 미친 듯이 힘들고 짜증이 났던 날, 버스 놓칠까봐 전전긍긍하던 뒷사람에게 ATM기 사용 차례를 양보해 준 자신을 뿌듯해하는 장면이 떠오른다. 비록 그 사람은 잔액 부족으로 돈을 인출하지 못했지만, 버스는 놓치지 않았을 것이라고 그의 하루를 응원한다. 남의 불행으로 위안을 삼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보면 잘 풀리지 않은 남의 사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건 괜찮을 테니' 하며 작은 응원을 보내고, 아무것도 되지 않던 하루를 산 자신에게 그래도 잘 했다고 심심한 추앙을 한다.

 

이렇듯 추앙은 단어가 주는 느낌과는 달리 생각보다 거창하지 않다. 우리는 자신을 향한 소소한 말 한마디로 그럭저럭 내일을 살아갈 수 있다. 아주 화려하거나 아주 못난 인생은 아니지만, 염창희 말대로 크게 물줄기가 있진 않지만, 가랑비 같은 우리 인생에서 그래도 살 만한 하루를 보낼 수 있는 방법이 이 '추앙'인 것이다. 나를 조건 없이 추앙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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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창희가 자동차에 집착하는 이유도 결국 자신을 추앙하여 해방하고자 하는 노력에 해당한다. 염창희는 자신이 차를 운전하면 이상하게 다정해진다고 하는데, 차 안이 온전한 개인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인생에 계획이 어디 있냐, 수능 점수에 맞춰 사는 거다' 라고 말했던 염창희의 삶은 우리와 가장 비슷하다. 학교를 다니고 나서부터 우리는 온전한 우리인 적이 없다. 매겨진 점수에 갇혀서 계속 살아가는 거다. 가족과 함께하는 집에서도 이 점수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만족스럽지 못한 점수를 가진 내가 밉고, 타인과 다른 내가 밉고, 미운 사람에게 그냥 당하고 마는 내가 또 미워서, 바라는 것 없이 응원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를 추앙하지 못했기에 타인을 응원할 수 없는 '찌질한' 사람이 되고, 모든 관계는 계속 흔들린다. 대신 외부의 시선으로부터 차단되고 나만 있을 수 있는 자동차는 다르다. 염창희는 자동차 안에서, 자신을 가로막는 것의 시초였던 수능 점수와 그 모든 연쇄적인 것들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자신의 차를 소유하지 못한 염창희는 결국 직장을 그만두는 것을 택했고 이는 온전한 해방을 주진 못했지만, 염창희의 본격적인 추앙이 시작되었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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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쓸쓸할 때가 제일 제정신 같아. 그래서 밤이 더 제정신 같아.

(중략)

인간은 다 허수아비 같아.

자기가 진짜 뭔지 모르면서 그냥 연기하며 사는 허수아비.

어떻게 보면 건강하게 잘 산다고 하는 사람들은

이런 모든 질문을 (내가 뭔지, 여기 왜 있는지) 잠재워 두기로 합의한 사람들일 수도.

인생은 이런 거야.. 라고, 어떤 거짓말에 합의한 사람들.

난 합의 안 해.

죽어서 가는 천국 따위 필요 없어.

살아서 천국을 볼 거야."

 

 

여기서 천국은 해방이다. 살아서 천국을 볼 수 있는 방법은 '추앙'임을 작가는 드라마 속 작은 순간들을 통해 증명하고 있다. 그리고 그 시작은 '자신을 추앙하는 것'임을 드라마의 서술자 역할을 하고 있는 염창희를 통해 여러 번 강조한다.

 

우리는 아주 짧은 시간이라도, 오롯이 혼자서 나를 마주하고 추앙할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 스스로 채워지는 것이 필요하다. 상대를 통해 추앙을 시작했던 염미정과 염기정도 결국 그 과정을 통해 자신을 추앙하는 방법을 배우게 되는 것이 이 드라마의 방향성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게 삼 남매와 구씨가 살아서 천국을 보는, 자신을 조여 왔던 껍데기로부터 '주체적으로 해방하는' 마무리를 지을 수 있을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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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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