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신들의 세계에서 인간의 이야기를 속삭이기 [여행]

캄보디아 여행기 : 신들의 도시 씨엠립
글 입력 2022.05.27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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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거리두기가 해제됨에 따라 일본이나 중국 등 주변 국가는 물론, 먼 유럽이나 미국으로의 여행길도 열렸다는 얘기가 종종 들려온다. 아직 입국 후 일주일 간 격리를 해야 하는 곳도 있고, 비행기 티켓값도 안정되지 못했지만 이대로 영영 해외여행을 못 가는 게 아닌가 싶어 발만 동동 굴리던 때에 비하면 무척이나 긍정적인 소식이다. 코로나가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기 불과 몇 주전, 여행을 다녀갔었던 캄보디아 또한 지난 3월 17일부로 해외 입국자에 대한 제한을 완화해 보다 자유롭게 여행을 다녀올 수 있는 나라가 되었다.

 

태국과 라오스, 그리고 베트남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캄보디아는 열대 기후로 뚜렷한 계절 구분 없이 사시사철 여름 같은 날씨가 지속된다. 대신 기후를 2종류의 몬순(계절풍)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11월부터 2월은 건기, 3월부터 10월은 우기다. 연중 무덥지만 우기는 특히나 고온다습하기 때문에 대부분 건기에 여행을 간다.


내가 캄보디아를 다녀온 12월도 마침 건기였다. 비가 많이 내리지 않을 뿐, 건기라고는 해도 덥기는 마찬가지다. 여름을 싫어하는 내게 캄보디아의 날씨는 숨 막힐 만큼 무더웠다. 여행 내내 시원한 물을 얼마나 찾고, 또 비웠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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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큼 힘들었지만 그 더위를 견뎌서인지, 혹은 팬데믹 직전의 여행이라 더욱 뜻깊게 기억돼서 그런지 지금 돌아보면 습하고 뜨거운 공기는 간데없이 높고 푸른 하늘만 떠오른다. 워낙 더위에 약한 터라 한국에 있을 때면 날씨를 탓하느라 여름이 어떤 풍경을 만드는지 잘 보지 못할 때가 많다. 캄보디아라고 해서 달리 시원했던 것은 아니지만, 새삼 여행은 일상을 재감각하게 만드는 일이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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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역시 앙코르 유적이다. 앙코르는 도시, 수도를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nagara’에서 파생한 말로 크메르어로 왕도(王都)/왕조를 가리키고, 와트와 톰은 각각 ‘사원/탑’과 ‘거대한’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앙코르 와트는 개별의 건축물이 아니라 한때 크메르 제국의 수도였던 씨엠립에 있는 유적의 일부다. 도성인 앙코르 톰(Angkor Thom) 역시 하나의 유적군으로 안면상으로 유명한 바이욘(Bayon) 사원, 영화 '툼 레이더'의 촬영지인 타 프롬(Ta Prohm) 사원 등과 함께 앙코르(앙코르 유적)에 포함된다.


그중에서도 제일 인상 깊었던 유적은 캄보디아 국기에도 새겨져있는 앙코르 와트(Angkor Wat)다. 어린 시절 봤던 여러 컨텐츠로 캄보디아에 이미 낭만을 가지고 있었던 엄마와 달리, 나는 아는 게 딱히 없었다. 내일 드디어 앙코르 와트를 보러 간다며 들뜬 엄마 옆에서 3박 4일의 여행코스 중 하나로 치부하던 나는 그곳에 도착한 후 깜짝 놀라고 말았다. 보통 사원이라고 생각하면 떠올리는 규모보다 훨씬 거대했을 뿐만 아니라, 신전을 둘러싼 해자나 커다란 나무들과 어우러져 멋진 풍경을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오래전에 지어졌다고 믿기 어려울 만큼 경이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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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코르 와트는 문화유산이자 유네스코가 지정한 3대 불교 유적 중 하나로, 매년 500만여 명의 불교 신자가 순례를 오는 세계에서 가장 큰 사원이다. 캄보디아 서북부 씨엠립(Siem Reap)주에 위치한 이 사원은 12세기 초 크메르 제국 황제인 수리야바르만 2세에 의해 축조되었고, 그 이후 자야바르만 7세의 영향을 받아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앙코르 와트는 불교 성지로 알려져 있지만, 원래는 힌두교 3대 신 중 하나인 비슈누 신에게 봉헌한 사원이다. 당시 크메르족에게는 사후에 자신들이 섬기는 신과 하나가 된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자신과 합일할 신의 사원을 건립했다고 한다. 수리야바르만 2세가 믿은 비슈누는 인간을 보호하고 세계의 질서를 유지하는 신이다. 비슈누는 보통 검푸른 피부에 화려한 옷차림을 하고 4개의 팔을 가졌다고 묘사되며, 샨카(Cocnch Shell)*, 수다르사나(Charkra)**, 연꽃(Pamda), 지팡이(Gada) 등을 들고 있다. 반면 앙코르 와트에 있는 비슈누 상은 팔이 8개로 모두 빈손이다. 또한, 머리와 얼굴이 부처와 흡사하다. 흔히 보이는 비슈누 상보다 불상에 더 가까운 모습인데, 캄보디아의 공식 종교가 힌두교에서 불교 국가로 바뀐 영향을 받지 않았나 싶다.

 

*샨카 : ‘법라’라고도 부르는 소라.

**수다르사나 : ‘원반’, ‘차륜’이라고도 부르는 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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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코르 와트 전경을 보면 중앙에 알맹이가 빠진 옥수수처럼 생긴 중심 탑이 우뚝 서있고, 신전 주위를 비슷하게 생긴 탑과 회랑이 빙 둘러싸고 있다. 멀리서 보면 그저 엄청나게 큰 돌무더기들 같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부조를 무척 섬세하게 새겨놓았다. 긴 회랑에는 신들의 전쟁과 현실 세계에서 벌어진 전투가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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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야바르만 2세 왕의 행진’, ‘천당과 지옥’, ‘우유의 바다 휘젓기’ 등 39개 기둥 사이에 캄보디아 역사와 힌두 신화가 새겨져있다. 무엇보다 그렇게 긴 서사시를 무른 대리석도 아니고 암벽에 새겼다는 것이 놀라웠다. 조각예술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볼 만큼 매력적이었다. 하나하나 살펴보기에는 일정이 빡빡했을 뿐더러, 캄보디아 역사와 힌두교를 잘 알지 못해 설명을 듣고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는 내용이 많지 않아 아쉽다. 언젠가 갈 기회가 또 생긴다면 그때는 부조만 진득하게 둘러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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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 좌우로는 연못이 있는데, 사원을 둘러싼 외벽과 함께 외부와 공간을 단절해 성스러운 신전과 속세를 분리시키기 위함이다. 해자를 건너는 순간 신의 세계인 앙코르 와트로 입성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커다란 저수지는 이모작 벼농사를 가능케하는 관개 수로로 앙코르가 거대한 왕국을 이루는 경제적 기반 시설로도 이용되었다. 게다가, 건기와 우기를 반복하는 캄보디아의 기후상 토대가 쉽게 마르는 것을 방지해 건축물을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고 한다.

 

또한, 대부분의 사원이 동쪽에 입구가 있는 것과 달리 앙코르 와트는 서쪽에 정문이 있다. 여기에는 해가 지는 서쪽에 사후세계가 있다는 힌두교 교리에 의한 것이라는 설과 비슈누의 담당 방위가 서쪽이라는 설이 있다. 앙코르 와트가 가진 미적 가치도 대단하지만, 곳곳에 깃들어있는 크메르인들의 건축술과 종교 이념을 살피는 것 또한 큰 재미였다.

 

중앙 신전은 3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층은 미물계, 2층은 인간계, 3층은 천상계다. 1층은 앞서 살펴본 대로 회랑을 따라 그려진 부조를 구경할 수 있고, 3층에는 불상 등이 놓인 성소가 있다. 3층으로 올라가는 천상의 계단은 경사가 매우 가파르고 폭이 좁아 위를 올려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야만 한다. 여기를 오르기 위해서는 거의 기어가는 수밖에 없는데, 이는 신들의 세계로 가는 어려움을 담아낸 것이라고 한다. 내가 갔을 당시에는 이 계단은 폐쇄되고, 그 옆의 나무 계단을 통해 오갈 수 있도록 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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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코르 와트는 정글 속에 지어진 것으로 유명하지만, 개방된 지 150년이 지난 지금은 아쉽게도 관광지답게 개발이 많이 진행되어 밀림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대신 그보다 안쪽에 있는 타 프롬 사원으로 들어가면 거대한 나무에 휘감긴 유적을 볼 수 있다. 타 프롬은 12세기 말, 자야바르만 7세가 어머니의 극락왕생을 위해 지은 사당 겸 불교 사원이라고 한다. 다른 유적지와 다르게 복구가 진행되지 않아 사원의 벽을 뚫고 꽈리를 뜬 거목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수목에 침식된 유적 곳곳이 파괴되고 무너져있었지만, 시간의 흐름이 고스란히 느껴져서인지 장엄하면서도 오싹하다는 인상을 먼저 받았다. 자연에 의해 원점으로 돌아가는 인공적인 건축물이라니. 유네스코에서 앙코르 유적 복원 계획을 세우며 나무를 제거키로 했지만, ‘타 프롬’만큼은 아직 논의가 진행 중인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이걸 보존이라고 불러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무런 정보가 없었던 내게도 이국의 신비로운 낭만을 각인할 만큼 멋진 건축물이었다. 어깨 너머로 본 게 전부인 '툼 레이더' 같은 SF 영화에 들어와있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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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를 다녀온 지 딱 1년이 지난 작년 겨울, 왕가위 감독의 <화양연화>를 처음으로 봤다. 영화 말미에서 남자 주인공 차우(양조위 역)는 홍콩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캄보디아까지 가 수 리첸(장만옥 역)에 대한 마음을 앙코르 와트의 벽에 속삭인다. 언젠가 차우가 신문사 직원에게 말한대로 구멍에 자기 이야기를 말한 다음 '비밀을 영원히 가슴에 묻'는 일이다. 위대한 신들의 이야기가 새겨진 오래된 벽 앞에서 두 사람의 사랑은 그저 그런 사정일 뿐이다. 그리하여 부조의 틈새로 자연히 녹아들어갈 수 있게 된다.

 

왕가위 감독은 왜 앙코르 와트에서 위 장면을 찍었냐는 질문에 '현실화되기 거의 불가능한' 장소였기 때문이라는 답변을 한 바있다. 장엄하고 거대한 유적을 분명 내 두 눈으로 담고 왔음에도 영화 속 앙코르 와트는 또 다르게 신비롭고, 매혹적이었다. 필히 서로에게도 더 이상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수천 년의 역사를 간직한 유적에 깃들어 두 사람의 사적인 감정을 관객 모두가 가진 공통의 정서로 환기했기 때문이리라. 누구에게든 비밀은 있는 법이니 말이다.

 

뜨거운 햇빛이 가려지는 부조 아래서, 가이드가 설명해 주는 힌두교의 창조 신화를 듣던 때가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몇 세기 전의 사람들이 새긴 이야기를 이렇게 두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다는 게 황홀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좋았던 건 타국의 신화 앞에서 내가 엄연한 이방인이었다는 사실이다. 그곳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누군가의 눈에 나는 그저 한 무리의 관광객에 불과했을 테지만, 적어도 나는 그 풍경으로부터 유리되어 있었다.

 

지난 몇 년간 현실의 삶에서 한 발 떨어진 여행자가 되어, 온통 낯선 세계를 구경하고 싶다는 욕망에 시달렸던 나로서는 앙코르 유적이 내게 선사한 '유랑적 감각'은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두고두고 회자할 만하다. 조만간 발길 닿는 어디든 모르는 세상이었던 여행자로 돌아갈 수 있기를 고대해 본다.

 

 

[임혜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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