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성공적인 지역 문화 콘텐츠로 다시 태어난 가야 왕국과 허황옥 - 오페라 '허왕후'

글 입력 2022.05.26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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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왕후>를 향유한 것은 평상시 관심사 때문이다. 전통 의복, 비행기도 없던 먼 옛날에 대양 혹은 대륙을 건너온 다른 문화의 역사적 인물, 그 인물이 보인 행보, 둘 이상의 문화가 교류하여 섞인 결과는 어땠는지에 대한 관심 같은 것들 말이다. 그리고 작품 차원에서 동서양의 만남이 있는 것을 보기 좋아하기 때문에 가야의 왕후가 된 인도 공주 허황옥의 이야기, 우리말과 우리 역사를 기반으로 한 오페라 <허왕후>는 내 관심을 쉽게 잡아끌었다.

 

 

포스터_허왕후.jpg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무대 아래의 오케스트라가 악기들을 조율하는 소리를 들었다. 라이브 연주 공연인 게 실감나는 순간이다. 프롬프터에 극의 배경이 되는 가락국(가야)에 대한 소개가 짤막하게 지나가고 이윽고 막이 올랐다.

 

무대 연출이 간결하면서 멋있었다. 무대 위에는 큰 타원형의 구멍이 뚫린 세트가 있고 그 빈 공간 한가운데로 거대한 단도 하나가 서서히 내려왔다. 그것은 검의 손잡이 끝부분이 고리 모양(환두)인 가야 철검이었다. 이 커다란 오브제 하나가 극의 시대적 분위기를 단번에, 압축적으로 조성했다.

 

철기 문화가 꽃 핀 가야는 부족들의 연맹 국가에서 왕정 국가로 변모하는 과도기에 서 있는 상태였다. 철기 물품들을 만들어내는 야철장을 배경으로 극의 주요 인물들이 소개된다. 왕이 될 인물이라는 신탁을 받은 김수로와 장자로서 또한 왕이 될 권리를 갖고 있는 이진아시, 가야의 부족장들인 9간, 사로국의 대좌인 석탈해, 가야의 문화에 관심이 많아 여행 중이던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 석탈해와 모종의 시선을 주고 받는 허황옥의 시녀 디얀시 등이다.

 

귀족과 평민들이 한 데 모여 야장일을 하는 것을 두고 아직 왕이 없는 부족 국가라 그렇다며 가락국을 비웃는 당의 사신들에게 허황옥은 재치 있는 말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고 사신들의 말을 가로막는다. 한편 일을 하다 저도 모르게 사신의 앞길을 막은 가락국의 백성을 두고 이진아시가 그를 노비라 칭하며 벌하려 들자 청년 김수로는 이 땅의 백성더러 노비라 부르는 것에 정색하며 이진아시를 막아선다. 그리고 그런 김수로의 모습을 허황옥이 유심히 눈에 담는다.

 

가락국에서 사신들을 대접하는 연회를 여는 동안 번잡함을 피해 혼자 나와 있던 김수로와 허황옥이 만난다. 허황옥은 맑은 청년의 모습 아래 단단한 의지와 소탈함과 합리성, 백성에 대한 사랑이 가득한 김수로의 본질에 마음을 빼앗긴다. 막 시작된 허황옥의 연심이 우리말로 지어진 허황옥의 아리아 ‘해맑은 웃음 뒤에 강인함이’와 함께 울려퍼진다.

 

그렇게 사랑의 달콤함에 빠져 있는 허황옥을 방해하는 소리가 있었으니 사로국의 석탈해와 허황옥의 시녀 디얀시의 비밀스러운 발걸음이었다. 석탈해는 디얀시에게 무언가를 구해오는데 성공했냐고 묻고, 디얀시는 석탈해에게 진정 자신을 사랑하는 게 맞는지 묻는다. 그러나 누가 보기에도 디얀시의 사랑을 빌미로 석탈해가 디얀시를 이용하고 있는 모양새다. 허황옥은 두 사람의 석연찮은 밀회를 숨어서 목격한다.

  

과연 사건이 터지고 만다. 가락국의 중요한 제의 행사인 주물예식에서 철기 기술에 관한 문서가 사라진 것이 드러나고, 설상가상으로 김수로는 매수당한 측근의 고발로 문서를 빼돌린 범인으로 누명을 쓰게 된다.

 

그다음 장에서는 허황옥의 담대함과 사려 깊음, 그리고 지도자로서의 자질이 보인다. 좋아하는 사람이 억울하게 잡혀갔으나 허황옥은 초조해하기는커녕 나중에 김수로에게 사람 잘 보는 법도 알려줘야겠다고 가뿐하게 말한다. 이미 석탈해와 디얀시의 범행임을 알고 있는 허황옥은 디얀시를 다그치는 대신 타국에서 오랫동안 아유타국 사람들의 수발을 들며 외롭고 서러웠을 그녀의 입장을 헤아리며 공감해주고 그녀의 아버지 이야기를 하며 양심을 일깨운다. 디얀시는 울며 고백하고 허황옥은 모두의 앞에서 사실을 밝혀줄 수 있겠냐고 묻는다.

 

드디어 극의 하이라이트다. 디얀시는 진실을 고백하고 김수로는 누명을 벗게 된다. 그러나 앙심에 찬 석탈해의 손에 디얀시는 살해당하고 석탈해와 사로국 부하들, 이진아시와 김수로 그리고 그들의 사람들이 칼을 빼들고 싸운다. 결과는 김수로의 승리와 왕위 계승이지만 허황옥은 마냥 기뻐하기엔 너무 소중한 사람을 잃게 되었다. 이 장에서 사랑하는 마음을 농락당한 디얀시의 처절한 심정을 담은 노래와 살해당한 디얀시의 시신을 끌어안고 두 사람이 울고 웃으며 보낸 시간을 되돌아보며 아픔을 내뱉는 허황옥의 노래가 참 인상깊었다. 두 인물의 감정도 잘 전달되었으며 허황옥과 디얀시, 두 여인만의 입장과 서사가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별개로 석탈해 배우의 딕션이 좋아서 기억에 남았다.

 

 

허왕후 (5)_ⓒ(재)김해문화재단.jpg

 

 

마침내 김수로는 왕이 되었으나 왕후의 자리를 비워두고 디얀시를 고향에 묻어주러 간 허황옥을 기다린다. 백성을 사랑하는 왕을 둔 왕정 국가로 들어선 이후 가야 백성들의 삶은 더 평화롭고 윤택해진 듯 보인다. 해상무역과 철기 기술 역시 발전한 듯하다. 허왕옥의 배가 가야 항구에 들어서고 드디어 가야는 왕후를 맞게 된다. 진정한 가야의 왕과 왕후가 된 김수로와 허황옥은 가야의 백성들을 위하는 왕, 왕비가 될 것을 노래한다.

 

극의 마지막 장에서 정말 허황옥의 배가 무대 위로 들어올 줄은 몰랐기에 무대 연출력에 또 한번 놀랐다. 그 배의 등장이 과하다고 느껴지지 않았으며 공연의 볼거리 측면에서 제 몫을 탄탄히 해냈다. 개인적으로 오페라 <허왕후>에서 제일 만족스러웠던 부분이 이런 무대 연출, 무대 활용이었다. 극 초반 거대한 가야 철검처럼 절제된 꾸밈으로 시대극의 분위기를 조성하는가 하면, 2막에서는 그 검을 치우고 타원형의 공간에 디지털 이미지로 꽃을 띄워 허황옥의 처소를 손쉽게 표현하며 이전 장들과 차별화된 공간임을 드러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대 위에 배를 들여 극의 클라이맥스를 시각적으로 뒷받침하고 도우며 시원하고 장대한 느낌을 연출했다. 마치 김수로와 허황옥이 다스리고 보살피는 가락국의 앞날이 크고 호쾌하게 흘러갈 것이라는 인상을 주는 듯하다.

 

 

허왕후 (7)_ⓒ(재)김해문화재단.jpg

 

 

극의 전반적인 완성도에 만족했으나 다만 김수로의 캐릭터가 지나치게 현대적인 지도자상이라 그것이 극 내내 몰입을 깨서 아쉬웠다. 왕권이 막 수립되려는 시기에 민주적인 정신을 가진 왕이 탄생한다는 것이 말의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느껴졌다. 물론 이 공연은 가야의 역사를 정확하게 고증하려는 극이 아니라 허구가 가미된 예술공연이고, 현대인이 만드는 사극이란 본래 현대적인 시각이나 가치가 들어가게 마련임을 안다. 그래도 통상적인 시대 개념과 맞지 않는 부분이 크게 있으니 ‘김수로의 캐릭터를 애민정신이 투철한 왕 정도로 풀었으면 어땠을까’하는 상상이 계속 일어 몰입을 해친 것은 사실이다.

 

한편 오페라 <허왕후>는 김해시와 김해문화재단이 제작한 창작 오페라이다. 오페라 <허왕후>는 김해시 지역 문화의 역사적인 원천을 드러낸 지역문화 콘텐츠로서 성공적인 결과를 냈다는 생각이 든다. 허황옥과 디얀시, 석탈해 같은 인물들은 정말 살아있는 인물 같았다. 가야의 첫 왕후이자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였던 허황옥의 이름은 <허왕후>의 관객들에게 깊이 각인되었을 것이다. 필자의 경우 이진아시 같은 인물은 <허왕후>를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실존 인물인지 궁금해 찾아보니 그는 대가야를 건국한 시조라고 한다. 가야사를 기반으로 한 대형 기획 콘텐츠가 드문 상태에서 이런 뛰어난 완성도의 콘텐츠가 있어 서울 및 타지역의 관객들에게까지 닿은 것은 지역 문화 콘텐츠가 이룬 큰 쾌거가 아닐까.

 

부디 이런 지역 문화 콘텐츠들이 융성해서 우리가 잘 몰랐거나 잘 알 수 없었던 우리 역사의 또 다른 흐름을 다시금 접하고 관심을 자극받게 되는 일이 점점 늘어나기를 바란다.


 

[신성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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