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피로에는 약이 없을까? [도서/문학]

글 입력 2022.05.17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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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부터 갓생산다


 

"내일부터 갓생산다."

 

작년 즈음 인터넷 공간에서 드문드문 보이기 시작했던 '갓생'이라는 말을 친구의 입을 통해 직접 들었던 순간, 어쩐지 조금 웃음이 났다.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모두가 "욜로"를 외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욜로는 소리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이젠 나만 빼고 모두가 '갓생 살기'에 한창인 모양이다.


'갓생'은 '갓(God·신)'과 '인생(人生)'을 합친 신조어로, 하루하루 계획적으로 열심히 사는 삶을 뜻하는 말이다. 갓생에서 파생된 '갓생 살기'는 특정한 목표를 정하고 이를 성취하기 위해 일상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예컨데 아침에 일찍 일어나기, 퇴근 후 운동하기, 하루에 영어 단어 10개씩 외우기 등의 목표를 세우고 이를 꼬박 실천하면서 성취감을 느끼고 활력을 얻는 것이 핵심이라고 한다.

 

갓생이 근면성실의 키워드로 떠오르며 MZ세대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하지만, 사실 그 뜻을 알고나면 조금도 새로울 게 없다. 요즘 유행하는 '갓생'이나 '미라클 모닝', 더 거슬러 올라가 '힐링'이니 '웰빙'이니 하는 것들은 결국 본질적으로 다 같은 말이다. 매번 다른 신조어의 껍데기를 덮어쓰고 있을 뿐, 현대인들이 독기 가득하게 살아 온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거창한 자기계발은 말할 것도 없고, 현대인들은 놀고 먹고 자는 것에까지 열심이다. 두 주먹 불끈 쥐고 '갓생' 살러 뛰쳐나가는 누군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종종 지긋지긋한 피로감을 느낀다. 그래서 그네들의 뒤를 따라 함께 뛰는 대신 방구석에 틀어박혀 오랜만에 『피로사회』를 펼쳐들었다.

 

 

 

『피로사회』, 2010


 

철학자 한병철의 『피로사회』는 2010년 가을 독일에서 출간되자마자 대단히 큰 반향을 일으키며 단숨에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오른 책이다. 80쪽이 채 되지 않는 짧은 글 안에서 현대 사회에 대한 심도 있는 철학적 고찰을 다루고 있는 만큼, 철학 비전공자들이 읽기엔 사용된 용어들도 전문적이고 설명 또한 친절하지 않아 읽기에 녹록치만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대중들에게 이토록 큰 호응을 얻었다는 것은, 저자가 여러 철학자, 사상가들의 개념을 반박하며 새롭게 제시하는 현대사회의 문제점에 실제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공감하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저자는 시대마다의 고유한 질병이 있다고 말하는데, 그 중에서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한 신경성 질환 환자들이라고 명명하며 글을 시작한다. 이러한 사회는 ‘성과사회’라고 지칭되며, 이전의 ‘규율사회’와 비교한다. 근대의 규율사회가 금지, 부정, 억압의 사회였다면 성과사회는 자유와 긍정, 가능성의 사회이다. 규율사회 속의 ‘복종적 주체’가 강요에 의해 움직이는 존재였다면, 성과사회 속의 개인들은 스스로를 주체적인 ‘성과주체’로 인식하게 되며, 외부의 지배로부터 벗어난 상태에서 자발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자유를 얻는다.

 

그러나 저자는 억압받지 않는 상태와 진정한 자유를 동일시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성과주체는 타인의 강제 없이도 생산성의 향상을 위해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착취하며, 그로 인해 우울증이라는 심리적 질병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피로에는 약이 없을까?


 

저자는 성과사회에 피로사회라는 진단명을 내려줌으로써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여러 문제들의 근원을 파악할 수 있게 한다. 또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개인들이 갖고 있는 고민과도 닿아있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각자가 갖고 있는 문제를 성찰해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고, 또 작가 나름대로의 해결책도 제시해준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자신의 내면에 대한 자각과 타인과의 소통을 통한 인간성의 극복’이라는 작가가 제시하는 해결책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지는 미지수다. 개개인의 일시적인 피로감의 회복에는 도움이 될지 모르겠으나, 피로사회 자체를 구조적으로 변화시킬 수는 없다.

 

작가가 문제의 해결방법을 개인적 노력의 차원에서 찾으려고 하는 이유는 ‘피로사회에서의 현대인은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라는, 이 글의 가장 핵심이 되는 주장에서 비롯될 것이다. 무한한 가능성과 자유가 주어진 성과사회에서 개인들이 자기 성취를 위해 스스로를 끊임없이 채찍질하다가 정신적 탈진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이라고 작가는 설명하고 있지만, 성과사회를 외부적 지배와 억압이 없는 온전히 자유로운 사회라고 상정하는 것부터 납득하기 어렵다. 오늘날의 성과사회에서는 규율사회에 존재했던 지배와 억압이 교묘하게 가려지고 감춰져서 사람들이 이를 인지하기 힘들 뿐이지, 결코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예컨데 조지 오웰의 『1984』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각각 '규율사회'와 '성과사회'에 빗대어 생각해 볼 수 있겠다. 『1984』는 ‘빅브라더(big brother)’라는 허구적 인물이 등장해 당원들을 억압하고 감시하는 모습을 통해 전체주의와 독재, 즉 규율사회를 풍자하는 소설이다. 『1984』속 인물들은 비록 체제 전복에 실패하고 끝내 세뇌당하긴 하지만, 당의 통제에 저항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반면,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서 그려지는 유토피아는 성과사회와 동일시할 수 있다. 모든 것이 “행복하라”는 명령에 의해 지배당하는 멋진 신세계의 사람들은 조직되고 통제되지만 그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기에 어느 누구도 불행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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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율사회든 성과사회든,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효율성과 생산성의 향상을 통한 전체적 발전이고, 사회 속의 개인들은 그 생산성 증대의 수단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도록 만들어진다. 규율사회에서 택한 방법이 지배와 억압으로 사람들을 몰아붙여 생산량을 높이도록 한 것이었다면, 성과사회에서는 능력의 긍정성을 통해 사람들이 스스로를 채찍질해 생산을 최대화하는 것으로 전략을 바꿨을 뿐이다. 사회 속 개인들은 규율사회가 성과사회로 변했을지라도 변함없이 조직의 지배와 통제 하에 이용될 뿐이다. 따라서 성과사회의 사람들이 우울증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개개인의 명상과 소통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사회 구조적인 측면에서의 변화와 합의가 필요한 것이다.

 

*


피로에는 약이 없을까? 이 사회의 피로감을 근본적으로 없앨 수 없을지라도, 현대사회의 흐름을 매우 날카롭게 통찰하여 문제를 진단해냄으로서 사람들로 하여금 겪고 있는 현대적 질환의 원인에 대해 생각해보고, 끊임없는 경쟁사회를 살아가면서 스스로를 마모시키고 착취하지 않도록 스스로 각성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피로사회』는 출판된 지 1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작가가 진단했으나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못한 피로사회의 치료법은, 앞으로 계속해서 성과사회를 살아나가야 할 현대인들이 함께 연대하여 차차 찾아나가야 할 것이다.

 

 

[최지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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