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아무 생각도 안하는 생각

글 입력 2022.05.14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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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생각도 안 하는 걸 어떻게 해?"

"그걸 왜 못해?"

 

이유는 모르겠으나, 나는 참 생각이 많은 사람이다. '근데 진짜 언젠가는 좀비 비슷한 바이러스가 돌 수도 있을 것 같아'와 같은 터무니없는 상상부터 알 수 없는 내 미래에 관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걱정 가득한 생각까지. 생각을 하다가 어느 순간 멈추고 현실에 집중하면 그런 생각들은 큰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나는 생각을 하다 하다 머리가 아플 지경까지 이르곤 한다. 적당한 생각은 현재의 나에게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하고. 동기부여도 주지만, 분명한 건 내가 하는 생각은 정도가 지나쳐서 심리적으로 건강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아무 생각도 하기 싫다'를 입에 달고 산다. '어떻게 하면 아무 생각도 안 할 수 있지?' '아무 생각도 하지 말자라는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더니 친구가 '대체 그걸 왜 못하냐'고 황당한 반응을 보였을 때, 나는 결심했다. 아무 생각도 안 하는 연습을 해보기로.

 


[크기변환]플프.jpg

 

 

사실 나는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싶을 때 영화나 드라마를 봤다. 영화나 드라마 속 가상의 세계관에 몰입하게 되면 아무래도 현실은 쉽게 잊어버린다. 일시적이라 할지라도, 잠시나마 다른 곳에 있다 오면 불필요한 걱정과 생각을 잊고, 상쾌하게 지금의 것들을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실패하면 어떡하지' '제대로 하지 못하면 어떡하지'와 같은 불필요한 걱정은 멈추고, 때로는 정의로운 저 인물처럼, 포기하지 않은 저 인물처럼 해볼 것을, 반대로 악역인 저 인물처럼, 불의에 굴복하는 저 인물처럼은 살지 말 것을 다짐하게 되었다.

 

영화나 드라마는 나의 잡생각을 청소해 주고, 정신을 환기시켜,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했다. 좋은 영화나 드라마를 찾아내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한 이유다. 나처럼 불확실한 미래와 스스로에 대해 고민과 생각이 많은 사람들이 영화나 드라마를 보며 2~3시간 남짓 한 시간 동안 생각을 정리하고, 좋은 에너지를 얻을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꿈이 되었다.

 

그리고 그게 꿈이 된 순간부터 영화나 드라마는 더 이상 온전한 내 취미생활이 아니게 되었다. 내가 나를 위해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볼 수 있는 것에서 벗어나야 했다. 나에게 재미없는 것도, 취향에 맞지 않는 것도 연구하고 분석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더 넓은 시각에서 다양한 콘텐츠를 접해야만 좋은 콘텐츠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눈이 생기고, 콘텐츠의 발전을 위한 방향성을 제시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단순히 좋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를 업으로 삼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일이라는 게, 싫어하는 것도 감수하고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좋아하는 분야에서 일한다고 하더라도 하기 싫어질 때가 올 것이라는 걸 각오하기도 했었지만 '덕업일치'는 만만치 않았다. 나를 가상의 세계관으로 데려가 새로운 꿈을 꾸게 하고, 현실에서의 고민과 생각을 비우게 해주었던 영화와 드라마가 어느 순간 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었고, 나는 또 다시 무수한 생각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영화와 드라마가 아닌, 다른 것으로, 아예 내가 하는 일과 다른 것으로 아무 생각도 안 하는 연습을 시작했다. 무엇을 할까, 고민을 많이 해봤는데 (이 와중에 또 많은 생각을 거쳤다..) 기본적으로 에너지를 바깥으로 표출하는 성향이 아니다 보니 실내에서 혼자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했다.

 


[크기변환]유화2.jpg

 

 

그렇게 나는 <유화>와 만났다. 유화 그림을 보기만 했지 재료들을 본 건 처음이었다. 당연히 그려본 적도 없었다. 물 대신 기름을 쓰고, 완전히 마를 때까지는 일주일 이상이 걸리는 그림. 시작부터 생소했다. 스케치를 하는데 어차피 물감으로 칠하다 보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세세히 그릴 필요가 없었다. 내 인생에서 '세세히'를 배제했던 적이 있었나.. 유화의 질감도 어색했다. 그렇게 하나부터 열까지 처음인 상태로, 미끈하면서도 뻑뻑하게 종이를 조금씩 채워가고 있었다.

 

채색을 하던 첫 시간, 습관을 버리긴 쉽지 않았다. 그림이 아니더라도, 모든 일을 할 때 하나하나 꼼꼼히 채워나가야 한다는 강박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지라, 그려야 하는 기와와 풀들을 완벽하게 옮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종이에 빨려 들어갈 듯이 잔뜩 웅크린 채로 하나하나 그리고 있던 도중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하나하나 똑같이 그린다는 생각보다는 이쯤에서 이게 있으니 느낌 가는 대로 표현하면 돼요"

 

바로 마르지 않는다는 유화 물감의 특성에 의해, 유화는 그 위에 덧칠할수록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즉, 계산적으로 자리 나누기하듯이 색칠할 필요 없이, 정말 '느낌 가는 대로' 색을 조합해서 덧칠하면 알아서 여러 색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걸 확인할 수 있다. 빽빽하게 채워진 기와와 풀들을 이렇게 아무 생각도 안 하면서 편안하게 그릴 수 있을 줄이야. 처음으로 경험해 보는 기이한 현상이었다. 정말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드는 생각이라곤, '저 유화들처럼 살고 싶다' 정도였다. 이렇게 저렇게 하다 보면 잘 어우러져 완성되는 저 그림처럼 말이다.

 

 

[크기변환]유화3.jpg

 

 

어쩌면 나는 이미 그렇게 살고 있을 지도 모른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확신이 없고 불안해하는 것을 조금이나마 덜어내기 위해 치밀하게 계산하고 계획하는 것들이 내 머릿속에서 넘쳐흐르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오히려 불안감은 증대되고 다 해내지 못할 거란 생각에 자신감이 낮아지기도 한다.

 

내 무수한 생각들에 반해, 실제로는 이런 생각들은 다 차치하고, 아무 생각도 안 들 정도로 몰입한 상태로 무언가를 했을 때, 본능이 이끌리는 대로 따라갔을 때 그럭저럭 괜찮은 결과들이 나왔던 것 같다. 내가 그린 그림이 완성되는 과정처럼.

 

지금부터라도 차근차근히 건강하지 못한 생각들을 버리는 연습을 해보려고 한다. 아무 생각도 안 하는 생각. 유화를 그리면서.

 

 

[이현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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