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내 별명을 불러줘

당신은 어떤 별명을 가지고 있나요?
글 입력 2022.05.08 09:27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꾸미기]1ear-2972890_1920.jpg

 

어린 시절 나의 별명은 주로 성씨(姓氏)에 관한 것이 많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대부분 유치하고 조악하기 그지없는 별명들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별명들을 친구들이 약 올리듯 부를 때면 항상 알 수 없는 억울함과 분노가 나를 괴롭혔다.


특히 그중에서 내가 가장 싫어하는 별명은 바로 '서운해'다. 심지어 친척 중에서도 '은해는 늘 서운해서 서은해 인가?'라며 서슴없이 나를 놀려대는 사람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웃어넘기곤 했지만, 항상 내가 무언가 실수를 하거나 잘못해서 서운한 일을 만들고 다니는 사람인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사실 유치하고 조악한 별명들을 마주하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내 이름이 내심 마음에 들었었다. 한자로 은혜'은'자에 바다'해'자를 써서 '은혜가 바다같이 넘친다'는 뜻이 담겨있는 것도 좋았고, 이름 자체가 너무 흔하지 않고 조금은 특별하며 적당히 무난한 것도 좋았다.


그런데 자꾸 주변에서 이름으로 놀림을 당하다 보니 이름을 좋아했던 만큼 상처도 컸었던 것 같다. 언젠가 속상한 마음에 엄마에게 애꿎은 성씨(姓氏) 탓을 하며 투덜대자, 엄마는 황당하다는 듯 웃으시며 "이름은 바꿔줄 수 있겠지만, 성(姓)은.. 내가 결혼을 다시 할 수도 없고" 하셨다.

 

물론 나도 아빠가 바뀌는 건 싫어서 그 후론 절대 투정 부리지 않았다.



[꾸미기]1call-me-7006153_1920.jpg

 

 

그런데 이렇게 별명에 대해 안 좋은 인식이 있던 나에게 생각의 전환을 가져다준 계기가 있었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 컴퓨터 자격증 취득을 위해 학원에 다닌 적이 있는데, 같은 반 인원 중 대부분이 고등학생 언니 오빠들이었고 나를 포함한 몇몇의 초등학생과 중학생이 함께 섞여 있었다. 그 다양한 연령 사이에서도 나는 가장 나이가 어린 막내였기 때문에 좀처럼 언니 오빠들과 어울리지 못했고 수업에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언니가 내가 메고 다니는 하늘색 가방에 그려진 텔레토비 캐릭터를 보더니 너무 귀엽다며 나와 잘 어울린다고 말했다. 순간 주변의 언니 오빠들이 내게로 몰려들었고, 기분 좋은 관심 속에 그날부터 내 별명은 '(텔레)토비'가 되었다. 나는 그 별명이 쑥스럽지만 참 좋았다.


별명이 생기니 유명 인사가 되는 건 한순간이었다. 여기저기서 나를 '토비'라 부르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특이한 별명 덕분인지 어느샌가 다른 반 친구들에게도 궁금한 인물이 되어있었다. 무엇보다 가장 좋았던 건 그토록 친해지기 어려웠던 언니 오빠들이 나를 '토비'라고 불러줄 때마다 엄청난 친밀감이 느껴졌다는 것이다.


이런 특별한 경험은 대학교 때도 이어졌다. 대학이라는 낯선 환경과 사람들 속에서 당시 개인적으로도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던 나는 새로운 친구를 만든다는 것이 무척이나 어려웠다. 모두가 표면적으로 다 함께 두루두루 친해 보였지만, 실제로 마음을 터놓고 깊게 얘기할 수 있는 친구는 찾기가 힘들었고 그게 반복될수록 점점 더 지쳐갔다.


그러다 기말 과제로 함께 작품을 만들게 된 친구 하나가 과제를 하다 말고 나를 '둥둥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부름을 시작으로 우리는 급속도로 친해지게 됐다. 마치 별명이 친한 친구를 불러오는 마법의 주문 같았다.


사실 우리는 아직도 그때를 떠올리며 즐겁게 수다를 떨곤 하지만, 도대체 왜 내가 '서둥둥'으로 불리게 됐는지는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그래도 별명을 부르는 일을 멈출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제는 서로가 서로에게 너무나 익숙해져서 오히려 이름으로 부르고 듣는 게 어색하기 때문이다.

 

가끔은 친구가 진짜 내 이름을 까먹은 것 같기도 하다.

 

 

[꾸미기]120220507_215501.jpg

'런닝맨' / 사진 = SBS 유튜브 캡처

 

 

그 외에도 나는 많은 사람들에게서 다양한 별명으로 불리고 있다.


일을 할 때 공평하고 평화주의자적인 나의 면모를 보고 동료들이 붙여준 별명 '서도브' (도브(Dove)는 비둘기라는 뜻으로 평화를 상징한다.),


친구와 찍은 스티커 사진에 적혀있던 포에버&투게더(Forever&Together)라는 문구 덕분에 서로의 별명이 돼버린 '에버'와 '게더' (나는 에버를 담당하고 있다.),


메신저에 있는 'Silver Sun(실버선)'이란 나의 영어 이름 표기 때문에 불리게 된 별명 '버선'이,


18년 지기 친구가 나를 부르는, 집에 있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란 의미의 별명 '집사람' 등등.


나 역시 그들의 이름을 부를 때보다 별명을 부를 때가 훨씬 더 많다. 그뿐만 아니라 휴대폰에 저장된 연락처도 모두 별명으로 저장해 놓았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면, 나와 친밀하다고 생각되지 않는 사람들은 애초에 별명으로 저장해 두지 않는다.


결국, 별명에는 부르는 사람의 애정이 깃들어있음을 깨닫는다. 또한 그 속에 우리가 함께한 추억과 시간도 담겨 있음을 알게 됐다. 그래서 이제는 내가 가진 별명 하나하나가 모두 소중하다. 그리고 애정을 듬뿍 담아 나를 불러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이 너무 감사하다.


이렇게 나는 내가 어떻게 불리고 있는지, 어떤 사람들이 나를 불러주고 있는지 돌이켜보며 미처 깨닫지 못한 애정의 한 조각을 찾아낸다. 부디 앞으로도 내게 사랑스러운 애칭이 되어줄 소중한 별명들이 더욱더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

 

 

 

컬처리스트_서은해.jpg

 

 

[서은해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4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