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문화 전반]

글 입력 2022.05.16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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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진은영,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에서 차용했습니다.

 

 

“국립국어원에서 ‘뱃속’을 찾아봐. 진짜 배 말고 마음을 말할 때의 뱃속 말야. 예시문이 무시무시해. 내가 읽어줄게. ‘거짓말하지 말고 솔직히 말해봐. 이 엄마는 너의 뱃속을 들여다보니까.’ 진짜야. 진짜 예시문이 이래. 누구 엄마인지 되게 무섭다, 그치?”

 

 

“‘한눈팔다’의 한눈 말야. 어떻게 설명되어 있는지 알아? ‘마땅히 봐야 할 곳을 보지 않고 다른 곳을 봄’ 이래. 마땅히라는 부사가 쓰였을 줄이야. 마땅히는 강한 어감이잖아. 엄청난 자신감이지 않아? 넌 나를 마땅히 봐야 하는데 어디를 보니, 하고 묻는 사람은 자신감과 솔직함도 있을 것 같아.”

 

 

“괜히 ‘unforgetable’을 찾아봤다가 움찔했어. ‘보통 너무 아름답거나 재미있거나 해서 잊지 못할’ 이래. 아름다워도 안 잊히지만 재밌어도 안 잊히는구나. 우리 왜 이렇게 재미없게 사니? 잊혀져버릴 거야.”

 


정세랑 작가의 《이만큼 가까이》에 나오는 문장이다. 파주와 일산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여섯 명의 이야기를 담은 이 소설에는 출판사에 일하는 '주연'이라는 친구가 등장한다. 직업상 사전을 볼 일이 많은 주연이는 사전도 사전을 내내 찾아야 하는 자기 일도 좋아하는 인물이다.


어떤 단어가 가진 다정함에, 혹은 매정함에 대해 이야기하는 주연이의 태도는 마치 무언가를 모시는 사람처럼 무척 신실해 보인다. ‘나’의 말대로 ‘사전을 경전처럼 여기는’ 것 같기도 하고, ‘읽고 찾고 해석하고 비교하고 던졌다가 안아들었다가 하는 모습이 인간’ 같기도 하다.


이 책을 읽은 날부터 나는 사전을 자주 보는 사람이 멋지다고 느끼게 됐다. 아는 단어가 많고 똑똑할 거라는 동경보다 자신만의 단어장을 갖고 있을 거라는 환상이 먼저다. 시를 쓰지 않더라도 시인처럼 세상의 이런저런 미묘한 뉘앙스를 섬세하게 잡아채고 구별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가 쉽게 지나쳐버리는, 삶의 그늘진 곳을 발견하는 시선을 가지고 있을 것 같다. 낯익은 단어로 남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낯선 배열을 직조할 수 있을 것 같다. 언어가 가진 힘을 알고 있을 것 같다.


외국에서 오래 살다 온 주연이는 처음에는 그 나라말을 배우기 위해 사전을 찾았고, 외국에서 사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한국말에 거리감을 느껴 국어사전을 자세히 살피게 됐다고 한다. 외국어를 습득하느라 힘들었을 주연이 입장에서는 기만적인 말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주연이의 복합적이고 교차적인 위치가 부러웠다. 내겐 한국은 너무나도 가까이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한평생 한국에서 살아온 내게 국어사전 속 단어들이 가진 기표와 기의는 그저 당연한 것에 불과하다.

 

 

"'거침없이'는 붙여쓰면서 '가차 없이'는 왜 띄어쓸까? 붙이면 좋을 텐데."

 

 

"단 하나도 띄어쓰고, 단 셋, 단 넷도 다 띄어쓰는데 '단둘'만 붙이는 게 다정한 것 같아. '함께하다'도 함께 쓰는 게 좋아. 사전은 다정해."

 

 

나도 문학을 좋아하고 전공하는 사람으로서 사전을 종종 들춰보지만 대개 단어 뜻이 헷갈리거나, 똑같은 표현을 반복하는 것을 기피하는 한국어의 고질적인 특성을 피해 유의어를 찾아내기 위함이지 주연이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단어들을 발굴해내지는 않는다. 시어를 직조하려면 세상을 낯설게 봐야 한다는데 나에게 한국어는 지나치게 익숙하고 일상적인 언어라 고리타분한 표현밖에 써내지 못한다.


하지만 내게도 좋아하는 단어쯤은 있다. 예문이 인상 깊어서 좋아하는 단어도 있고, 단어가 가리키는 사물이나 의미 때문에 좋아하는 단어도 있고, 노랫말이나 시구절에서 사용된 맥락이 마음에 들어서 좋아하게 된 단어도 있고, 단지 단어의 형상이 재밌다고 생각해서 좋아하게 된 단어도 있다. 이 애매모호하고도 선명한 호감에 대해 다 설명할 겨를은 없지만, 이번 글에서 나에게 유의미한 단어 일곱 개를 소개해 보려 한다. 아래 나오는 단어의 정의는 모두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을 따르고 있다.

 

 

 

1. 숲 [명사]


 

숲은 수풀의 준말이다. ‘수풀’을 다시 풀이하면 ①나무들이 무성하게 우거지거나 꽉 들어찬 것 ②풀, 나무, 덩굴 따위가 한데 엉킨 것이다. 의미는 같아도 나는 수풀보다 숲이라는 말이 좋다. 일반적으로 ‘수풀’이라는 단어보다 ‘숲’이라는 단어가 더 많이 쓰이기도 하고, ‘숲’이라는 글자를 이루는 자모음이 마치 나무 같이 생겼기 때문이다.


'ㅅ'는 대개의 침엽수처럼 끝이 뾰족하게 다듬어진 잎을, 'ㅜ'는 곧고 단단한 줄기를, ‘ㅍ’은 그런 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땅을 연상케 한다. 비슷한 모양을 가진 ‘늪’이 수평을 이루는 음절들이 모여 당장이라도 발이 아래로 푹 빠질 것 같은 질척한 수면을 떠올리게 하는 데 반해, ‘숲’은 목본식물의 굵은 줄기가 아래를 향해 심지를 단단히 뻗고 있는 형상이다. 숲을 뜻하는 한자 또한 나무 목木자가 두 개 합쳐진 수풀 림林으로 간단해서 재미있다. 내 이름에도 들어가는 한자고 말이다.


이처럼 글자 모양에 대한 흥미도 있지만, '숲'이 정말로 좋은 건 단어가 가리키는 장소 내지 공간을 좋아해서다. 숲은 아름답고도 거대하며, 활기차면서도 축축하고, 신비하다가도 친숙하며 자연친화적인 동시에 어딘가 오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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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지형적으로 산이 많은 나라고, 부산釜山에서 나고 자란 나는 살면서 숲을 접할 일이 많았다. 도시 주변에 있어 규모가 그렇게 크진 않았지만, 울창한 삼림에 대한 환상을 갖게 하긴 충분했다. 많은 자연물 중에서도 숲은 그 웅장한 규모와 언뜻 무한한 수명으로 세월을 쉽게 간직한다. 줄기를 절단해 나이테를 드러내지 않더라도, 뻗어나간 가지와 울창한 잎사귀를 보고 있노라면 자연히 나무에 깃든 시간을 짐작하게 된다. 숲의 천장 아래 햇빛을 받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오랫동안 한 자리에서 버티고 살아온 시간을.


사전을 살펴보면 숲이 들어간 예문으로 ‘숲이 깊어야 도깨비가 나온다’, ‘숲이 짙으면 범이 든다’ 등 숲의 어두운 이미지에 초점을 맞춘 속담이 제시된다. ‘수풀’이 들어간 예문이 초본식물이 무성한 숲의 풍경 자체를 떠올리게 한다면 '숲'의 예문은 숲이 조성하는 으슥한 분위기를 강조한다. 하지만 속담은 숲 깊숙한 곳까지 돌아다니지 말라는 충고 따위가 아니라, 어떤 일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그 전제조건이 갖춰져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나는 이를 내 식대로 받아들였는데, 숲이 깊어야만 도깨비가 나온다면 범이나 도깨비를 만나기 위해서 기꺼이 짙은 숲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내게 있어 숲은 낯설어지고 싶을 때 방문하는 장소다. 부산에 살지만 바다는 생각만큼 가깝지 않고, 해변 주위로 들어선 각종 숙박시설 때문에 자연이 아니라 도시의 일부에 불과해보인다. 제아무리 파도에 어지러운 생각과 감정을 던져버리려 해도, 금방 발 밑으로 떠밀려오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숲에서는 나를 확실하게 잃어버릴 수 있다. 바삐 오가는 등산객들 사이에서 정해진 코스를 따라 걷다보면 내가 이곳을 계속 배회하기만 하는 NPC가 된 것 같다는 기분이 들 때가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숲은 내게서 그늘진 상상력을 끌어내는 단어다.

 

 

 

2. 농담 [명사]


 

농담은 실없이 놀리거나 장난으로 하는 말을 뜻하는 단어다. 그 자체로는 명사지만, 뒤에 '-하다'가 붙어 동사로 쓰이기도 한다. 내가 농담이라는 말을 좋아하는 이유는 단어가 가진 알쏭달쏭함에 있다.

 

국립국어원에서는 농담의 예문 중 하나로 '어제 취중에 하던 농담이 아무래도 진담 같아서 속에 맺힌 것이 풀리지 않았다.'라는 문장을 제시한다. 농담과 진담은 반의어지만, 쉽게 구분되는 개념은 아니다. 꼭 쌍으로 가는 것 같은 느낌이 있으므로. 나만 그런지는 몰라도, 농담이라는 말에는 방어기제가 숨어있는 것 같다.  만우절 날 속에 담아뒀던 말을 스리슬쩍 해보는 것처럼 우리는 농담에 숨어 진심을 전달하기도 하고, 함부로 빈정거리기도 한다. 상대가 밝히기 전까지 우리는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알 수 없다. 일종의 페르소나인 셈이다.


'농담'을 좋아하는 또 다른 이유는 내가 재미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들과 대화할 때 혹은 글을 쓸 때 쉽게 진지해지는 경향이 있다. 소위 꼰대라 부르는 고집이 있다기보다, 가벼운 이야기와 장난으로 경계를 허무는 데 능숙한 사람이 아니라 그렇다. 왜, 사회성이 좋지 못한 사람들은 상대와 나의 거리를 제대로 재지 못해서 갑자기 어렵고 진지한 얘기들을 털어놓는다고 하지 않던가. 내가 그렇다.

 

하지만 농담은 필연적으로 재밌어야 하지 않은가? 재미없는 농담은 무의미한 진담만큼이나 실패한 발화다. 그래서 농담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든 언제나 쓸데없이 어둡고, 재미없는 이야기로 흘러가는 게 싫어 한때는 농담이라는 단어처럼 입버릇처럼 외고 다녔다. 그렇게 하면 농담 같은 이야기들만 할 수 있을 것처럼.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소년만화 책날개에 있는 만화가들의 한 마디처럼 실없지만 적당히 유쾌하고 기억에 남는 말들을 하고 싶었다. 결과적으로 재미는 커녕 시시콜콜한 사람이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3. 유령 [명사]


 

「1」 죽은 사람의 혼령.

「2」 죽은 사람의 혼령이 생전의 모습으로 나타난 형상.

「3」 이름뿐이고 실체는 없는 것.

 

유령이라는 단어도 좋아하고, 유령도 좋아한다. 오컬트나 괴담에 빠져있는 것은 아니고, 어릴 때 읽은 《폭풍의 언덕》에서 히스클리프가 "난 유령이 지상을 돌아다닌다는 것을 알고 있어. 언제나 나와 함께 있어줘. 어떤 형체로든지."라고 외치는 장면이 인상 깊었고 그 이후로 유령이라는 존재가 그만 내 머릿속에 콱 박혀 버렸다.

 

유령은 귀신과는 또 다르다. 귀신하면 머리를 산발로 풀어헤치거나, 피가 묻은 옷을 입고 있거나, 몸을 기괴하게 꺾는 모습이 연상되지만 유령은 그 실체가 명확하지 않다. 애초에 인간의 정신이나 영혼의 잔여물이기에 안개나 빛무리 같은 걸 떠올리는 게 고작이며, 서양에서도 이불보를 뒤집어쓴 형상으로만 그리고 만다. 하지만 이런 점이 바로 내가 유령을 좋아하는 이유다. 존재의 본질 자체가 희미한 것.


유령이라는 단어도 그렇다. 유령의 발음은 [유령]으로 비음 'ㅇ'(종성)과 유음 'ㄹ', 음성모음 'ㅠ'와 'ㅕ'의 결합으로 이루어져있다. 음성모음은 양성모음에 비해 어감이 어둡고 큰데, 이를 채우는 자음 두 개가 공명음이다. 그렇기에 아무리 강하게 발음하려고 해도, 잇새에서 자꾸만 소리가 푸스스 흩어진다. 유령에 대한 이미지가 확고하기 때문인지, 비슷하면서도 딴판인 야광이라는 단어를 발음할 때면 내 안에 있던 유령이 구마당하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든다.


귀신은 대부분의 매체에서 공포스럽게 묘사되지만, 비슷한 역할인 유령은 그보다 슬픈 존재들이다. (물론 서양 공포물에서는 대개 악령으로 등장한다) 전자가 인간 외적인 존재라면 후자는 인간이 감정적으로 개입할 여지가 많다. 귀신을 제령이나 구마 등으로 쫓아내야 한다면 유령은 떠나보내야 하는 존재 같다. 귀신에게선 날선 피비린내가 나지만, 유령에게서는 약간 연약하고 비린 냄새가 날 것 같다. 귀신은 시커멓지만 유령은 희끄무레하다. 하지만 어딘가 이상하고, 미쳐있고, 슬프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다. 공포영화를 잘 못 보기에 귀신은 잘 찾아본 적 없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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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부평초 [명사]


 

부평초(浮萍草)는 둥글거나 타원형의 광택이 있는 세 개의 엽상체로 이루어진 여러해살이 수초다. 부레옥잠이나 물배추 같은 수생식물은 전부 포함되지만, 흔히 개구리밥만을 이렇게 부른다. 한자 그대로 풀이하면 '물 위를 떠다니는 풀'이라는 뜻이다.

 

그래서인지 '보따리장수들은 부평초처럼 떠돌이 생활을 하였다.'라는 예문과 같이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신세를 이르는 말로도 사용된다. 나한테 의미 있는 '부평초' 또한 두 번째 뜻이다. 외톨이, 유랑자 같은 말로 대체할 수도 있지만 어찌할 수없는 쓸쓸함과 슬픔을 끌어 안고도 살아보기 위해 아둥바둥대는 뉘앙스를 풍기는 건 부평초라는 단어 뿐이다. 나는 이 단어가 가진 태생적인 한계가 좋다. 스스로 중력에 매여있지 않고 붕 떠있는 인간이라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부평초 같은 인생'이라는 표현을 처음 알게 됐을 때는 이 단어가 정말 귀하게 느껴졌는데, 하도 여기저기 남발했더니 이제 처음 같은 느낌은 남아있지 않다. 그럼에도 이 단어를 대체할 표현을 좀처럼 찾지 못해서, 혹은 습관처럼 부평초 같다는 비유를 종종 사용하고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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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문 [명사]


 

여기서의 문은 '드나들거나 물건을 넣었다 꺼냈다 하기 위하여 틔워놓은 곳. 또는 그곳에 달아 놓고 여닫게 만든 시설.'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다. 문은 단어나 사물의 생김새가 아니라, 사물에서 연상되는 동작 때문에 좋아하는 단어다. 무언가를 닫고, 열고, 잠그고, (창문 너머로) 무엇인가 비치고, (커튼으로) 무엇인가를 가리고, 막고, 틈을 응시하고, 엿보고, 마주하고, 건너가고. 사이 간(間)에서 달 월(月)을 빼면 문 문(門)이 남는 것처럼, 문이라는 단어는 무엇인가를 드나들게 하기 위해 틔여있다. 비어있음과는 또 다른 의미다. 상자처럼 물건을 담기 위해 제 속을 공허하게 만든 것이 아니다. 어딘가를 향해 벌어져있다. 이렇듯 문이라는 단어에는 이쪽과 저쪽의 공간성이 포함되어 있다. 내가 있는 '지금 여기' 말고도 다른 세계가 있음을 넌지시 알린다. 그리하여 이편에서 저편으로 건너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시사한다.

 

'문'의 존재는 여기에 안과 밖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지만, 정확히 어디가 안이고 어디가 밖인지 가리키지는 않는다. 애당초 모호하므로. 안과 밖은 유동적이다. 열고 닫고 어딘가로 들어설 때마다 바뀐다. 문 뒤에 있다고 해서 반드시 안은 아니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완전히 열려있지도, 완전히 닫혀있지도 않은 상태 또한 존재한다. 이 단정할 수 없음이 흥미롭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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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각은 한때 좋아했던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로부터 비롯되지 않았나 싶다. 그의 작품에는 문(창문)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데, 이 문들은 언제나 어딘가로부터 어딘가를 열어보인다. 문 사이로 보이는 풍경은 여기와 이어져있기도 하고, 영화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나오는 것처럼 시공간을 훌쩍 뛰어넘어 여기로부터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곳과 이어지기도 한다. 어떤 방식을 취하든 문이라는 사물을 통해 일상적인 관계에서 사물을 추방해 이상한 관계를 만드는 데페이즈망 기법을 사용한 것은 맞다. 마그리트의 작품으로부터 나는 문이 가지는 이 기묘한 충격에 매료되었다. 초현실주의 그림들이 일상적인 관계에서 사물을 추방하는 시각적인 충격에 집중하고 있다면, 문이라는 단어는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연결에 집중하고 있어서 좋다.

 

문 혹은 창문의 생김새에는 크게 관심이 없지만, 그 형태가 비교적 단순하고 명료해 기능적인 측면을 쉽게 드러낼 수 있다는 건 재미있다. 직사각형이 보편적이지만, 다른 형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문을 문답게 그리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크기나 모양이 아니라 열고 닫는다라는 동작을 상기시키는 문고리다.

 

 

 

6. 탕진하다 [동사]



이 단어 목록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동사다. '탕진하다'에는 ①재물 따위를 다 써서 없애다. 그리고 ②시간, 힘, 정열 따위를 헛되이 다 써 버리다. 라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첫 번째 뜻의 예문으로는 '재산을 탕진하다.', '거액을 탕진하다.' 등 사기나 도박에 휘말려 순식간에 나앉아버린 암담한 상황이 제시된다. '탕진잼'이라는 신조어가 잔뜩 등장하는 방탄소년단의 '고민보다 Go'로 조금 장난스럽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탕진할 만큼 넉넉지 않은 재물을 생각하면 역시 슬프기 짝이 없다.


고로 내가 좋아하는 '탕진하다'라는 두 번째 뜻이다. 아무 보람이나 실속이 없다는 의미를 가진 헛되이라는 부사를 썼는데, 이 말에는 어찌할 수 없음이 깃들어있는 것 같다. 비슷한 의미를 가진 '공연히'나 '괜히', '부질 없이', '쓸데없이'라는 말과 비교하면 명확해진다. 이보다는 '덧없이'나 '허무히'에 조금 더 근접하지만 이 두 단어가 무의미하고, 쓸쓸한 뉘앙스를 내포하고 있다면 '헛되이'는 가지고 있던 것을 잃어버릴지 몰랐다는 당혹스러움을 담고 있다.


 

열정을 쓸데없이 바치다.

열정을 허무히 바치다.

열정을 헛되이 바치다.

 

 

부사만 바꿔 문장을 써보면 이렇다. 사람마다 와닿는 뉘앙스가 다를 테니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내게는 '헛되이'라는 부사가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자신을 내던졌지만 실패한 것처럼 느껴진다. 탕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알았지만, 탕진할 줄은 몰랐다고 해야 할까. 빛이 빛인 줄 모르고 놀다가 날개를 태워먹은 불나방보다는, 눈앞에 있는 빛에 사로잡혀서 뜨겁다는 걸 알면서도 기어코 제 몸을 홀랑 태워버린 불나방을 연상시킨다.

 

누군가 무엇을 탕진했다고 하면 그 일이 헛되다는 걸 알면서도 뛰어든 건 맞지만, 그다지 태연한 자세는 아니었을 것 같다. 오히려 절박할 만큼 탕진하고 싶어했다면 모를까. 동시에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내게 '탕진하다'라는 단어는 다소 탐미적이다. 같은 이유로 낭비하다는 단어도 좋다.

 

 

 

7. 쓰다 [동사]



'쓰다'는 정말 많은 의미를 가진 단어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등록된 단어만 해도 여섯 개인데, 각 단어의 첫 번째 뜻만 모아보면 이렇다.


쓰다1 [동사] : 붓, 펜 연필과 같이 선을 그을 수 있는 도구로 종이 따위에 획을 그어서 일정한 글자의 모양이 이루어지게 하다.

쓰다2 [동사] : 모자 따위를 머리에 얹어 덮다.

쓰다3 [동사] : 어떤 일을 하는 데에 재료나 도구, 수단을 이용하다.

쓰다4 [동사] : 시체를 묻고 무덤을 만들다.

쓰다5 [동사] : 장기나 윷놀이 따위에서 말을 규정대로 옮겨 놓다.


쓰다6 [형용사] : 혀로 느끼는 맛이 한약이나 소태, 씀바귀의 맛과 비슷하다.

 

이 중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쓰다'는 쓰다1이고, 가장 좋아하는 '쓰다'는 쓰다3이다. 쓰다4와 쓰다5 뜻은 아무래도 다른 '쓰다'에 비하면 사용할 일도 없어 특별한 감흥이 없다. 쓰다6 역시 그다지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 단어다. 약재가 쓰다고 하면 우선 미간부터 찌푸려지고 입맛이 쓰다고 해도 마찬가지며, 인생이 쓰다고 하기에는 아직 젊은 내 나이를 곱씹게 된다. 이렇게나 복잡한 동음이의어라는 이유로 '쓰다'를 좋아하는 것이기에 어느 하나도 빼놓을 수가 없지만, 본 글에서는 단어 세 개만 추려서 설명하기로 한다.


'쓰다'1은 사실 특별함을 느끼기 어려운 단어다. 아무것도 쓰지 않는 상태를 찾기 어려울 만큼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를 낯설게 여길 틈이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글을 쓰고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그는 조그마한 수첩에 일기를 써왔다.'나 '방명록에 이름을 쓰다' 같은 예문을 읽으면 쓴다는 행위가 무척 진솔하고, 신중하며, 자아표출과 밀접한 행위로 읽힌다.


머릿속의 생각을 글로 나타내는 '쓰다'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붓이나 연필 등 필기구를 들고 종이에 글자를 쓰는 동작에는 묘한 두근거림이 있다. 지나치게 일상적이라 생각을 전환하기 어렵지만, 쓰기는 문자의 발원 과정이 그러하듯 무엇인가를 쓴다는 의식과 쓰겠다는 의지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쉽게 글자를 적는 것 같아도 이처럼 무의식적으로 쓰기까지는 수없이 획을 그어보며 쓴다는 행위를 몸에 익힌 시간들이 있었을 것이다.

 

또한 특수 제작한 잉크를 쓰는 게 아니고서야 웬만해서는 쓰는 순간, 쓴 것이 눈앞에 바로 드러난다. 그 직설적인 표출이 무척 거침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신중하게 느껴진다. 말과 다르게 생각에서부터 발화까지의 시차를 어림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즉각적일 수는 있어도 즉흥적이지는 않다.


'쓰다2'는 대개 착용과 관련된 상황에서 사용된다. 따지자면 쓰다1보다 무의식적인 행위기에, 쓰다라는 동작보다 과연 무엇을 썼느냐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예를 들어 '얼굴에 마스크를 쓰다.'는 코로나 이후 우리에게 무척 익숙해진 일이며, '머리에 면사포를 쓴 신부가 입장했다.'는 추억이 될만한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쓰다2가 재미있는 건 '사람이 죄나 누명 따위를 가지거나 입게 되다'라는 두 번째 뜻에 있다. 앞에서 모자, 탈, 먼지, 우산 등 직접적으로 신체에 닿는 물건 혹은 물질에 한해서 쓰다라는 표현을 쓴 것과 달리 여기서는 누명이나 혐의, 죄명 등 실체가 없는 사건을 향해 쓰다라는 표현을 허용한다. 어째서 비슷하게 표현할 수 있는 '입다'나 '당하다'가 아니라 '쓰다'가 연어(連語)로 채택되었을까?

 

쓰다2가 활용된 '뒤집어-쓰다'를 통해 추측할 수 있다. '뒤집어쓰다'에는 ① '온몸을 가려서 내리덮다.' ② '남의 허물이나 책임을 넘겨 맡다', ③ '생김새나 성질 따위가 누구를 그대로 닮다.'라는 뜻이 있다. 죄를 일종의 허물, 껍데기로 본 셈이다. 의복이나 소품 착용이 나를 치장함으로서 외부로부터 보호한다면, 이런 류의 주홍글씨는 세상과 다른 사람에게 공격받아도 되는 사람이라고 지시하는 것과 다름없다. 누명을 썼다는 데는 다른 사람이 그를 모함했다는 이야기와도 종종 연결되는데, 본인이 아닌 다른 이로 오해받고 있다는 점에서 혹은 죄인으로 낙인 찍혔다는 점에서 원치않는 컨셉에 갇힌 상황이기도 하다. 페르소나, 즉 가면은 당연하게도 쓰다2의 뜻으로 착용하는 물건이기에 이 역시 쓰다2 활용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쓰다3에 관해서는 확실하게 좋아하는 예문이 있다. '~에게 ~을'에 속하는 '어떤 일에 마음이나 관심을 기울이다.'의 '신경을 쓰다.', '그리고 마음을 쓰다.'이다. '~에 ~을'나 '~을 ~으로' 문형으로 쓰이는 첫 번째 쓰다3이 '써먹다'에 가깝다면 두 번째 쓰다3은 '베푼다'와 밀접하다. 주체가 누군가를 위해 자신이 가진 무엇을 기꺼이 내주는 것이다.

 

마음/신경을 쓰다. 라는 표현이 재미있는 이유는 이 용례의 다의어에서 주로 등장하는 돈이나 시간처럼 마음과 신경 역시 누군가의 소유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쓰다3은 무엇인가를 어디에 이용하고, 쓰는 행위와 관련된 단어인데, 적어도 사전을 편찬한 사람들은 마음과 신경 역시 소비되는 것이라고 보았음이 틀림없다.

 

동시에 쓰다1이나 쓰다2의 '쓰다'로도 읽혀서 좋다. 마음을 쓰는 것은 물론 표현하지 않아도 가능한 일이지만, 이를 정말로 베풀기 위해서는 쓰다1와 같은 행위로 내보이거나 쓰다2처럼 그 사람이 감각할 수 있도록 덮어씌워줘야 하기 때문이다. 즉, 내 마음이고 내 알 바(신경)임에도 불구하고 이걸 받는 사람과 상관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저 멀리서 염려하고, 속으로만 응원을 보내는 걸로는 충분하지 않다. 마음은 반드시 품을 들여 누군가에게 써야 한다. 그래야 올바르게 소비된다. 사전은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다.

 

 

시, 일부러 뜯어온 주소 불명의 아름다운 편지

너는 그곳에 살지 않는다

 

진은영,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제목으로 차용한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은 일곱 개의 단어를 시인이 새롭게 정의해 독창적인 의미를 제시하는 시다. 그만한 사유는 못하겠지만, 이 시를 따라 내 나름대로 상기한 단어들을 정의하면 다음과 같다.

 

숲 : 소진되는 않는 엽록소. 그늘의 천장. 360도 돌아가는 나침반. 지도 없는 자들의 터. 가로등 깜박이는 집 앞. 눅눅한 비명을 지르는 잎사귀.

농담 : '닳지 않는 사탕.' 암묵적인 거짓말. 짙은 웃음, 옅은 슬픔. 엎드린 채 악수하기. 둘이 하는 자기 위로, 혼자서 하는 비난. 잇새로 새어나가는 스파클링. 눈치보는 말.

유령 : 속이 없는 것. 보이지 않아도 보이는 것. 밀랍으로 만든 사람. 불이 붙지 않는 심지. 날숨 없는 호흡. 없음의 있기. 예비된 인간. 계속해서 희미해지는 얼굴. 나는 저기에 있는데 너는 여기에 있는 상태. 여름의 입김. 겨울에도 성에가 끼지 않는 거울. 버려진 선물 상자. 수수깡으로 못 박힌 관. 빈손으로 끌어안기.

부평초 : 부유하는 부류. 개울에서 배영하기. 잎맥과 닮은 투명한 손금. 중력 보존 법칙. 끝까지 뽑혀 나오지 않는 뿌리. 나이테가 새겨지지 않는 줄기.

문 : 열린 괄호. 공개적인 열쇠구멍. 어떻게 해도 삐걱대는 소리가 난다. 검은 상상력. <카스테라>의 냉장고 같은 것. <어린왕자>의 상자 같은 것.

탕진하다 : 소유 불가능한 공허. 젖은 맨손으로 돈 세기.

쓰다3 : 손때 탄 인형. 신발 밑창에 껌 붙이고 다리 떨기. 많이 사랑하고 조금 미워하기.

 

언젠가 나도 나만의 사전을 편찬할 수 있을까?

 


[임혜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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