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무제

어떤 인간이 되어가는가
글 입력 2022.05.05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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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경 그러하리라.

비록 우연의 산물로 세상에 생겨나 썩 본받을만한 인생을 살지 않았다손 치더라도.

필시 어떤 의미를 가지리라.

 

*

 

한 아이가 기억하는 한 그 아이가 영화관에서 처음 영화를 보게 된 것은 10살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상암동의 영화관에서 보았다. '초승달과 밤배'. 그 아이는 영화 내용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아버지와 처음 영화를 보았다는 사실은 선명히 기억한다. 이후 그 아이는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전문적인 시각을 가지고 영화를 해부하는 사람이 아닌 그저 영화를 좋아하는-이 된다.

 

한 아이가 기억하는 한 그 아이가 스스로 원하여 책을 읽게 된 것은 12살 어느 봄날이었다. 어머니와 백화점에 들러 돌아다니던 중 한 책에 관심을 보이고 어머니를 졸라 책을 구입하게 되었다. '노빈손의 봄나들이'. 그 아이는 책 내용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어머니와 함께 있었던, 스스로 원해서 책을 골랐던, 그 책을 저녁 늦게까지 읽었던 사실은 선명히 기억한다. 이후 그 아이는 책을 좋아하는 사람-문학, 과학, 예술 분야를 두루 섭렵하여 완성된 진정한 문학인이 아닌 그저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된다.

 

한 아이가 기억하는 한 그 아이가 사진을 본격적으로 좋아하게 된 것은 23살 가을 날이었다. 사진 기능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모토로라 핸드폰에서 아이폰7을 부모님께 받은 날 사진을 찍으러 집 근처 산을 올랐다. 그 아이는 왜 그 산에 올랐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어떤 사진을 찍었는지는 선명히 기억한다. 비온 뒤 습기 찬 산의 느낌을 기억한다. 이슬 맺힌 떨어진 나뭇잎의 생김새를 기억한다. 이름 모를 열매의 모습을 기억한다. 그날 바람이 강하게 불어 정상 공터에 설치된 형형색색 바람개비들이 정신없이 돌아가던 것을 기억한다. 이후 그 아이는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마찬가지로 그저 찍고 싶은 것을 찍는 지식이라고는 없는 평범한,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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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아이라고도 부를 수 없게 나이가 든 한 사람이 기억하는 한 인간, 사람, 관계, 사랑, 모순, 공포, 상실, 공허의 집합을 어렴풋이 체험한 것은 26살 겨울날-실제론 9월 화창한 어느 날이지만 그 농밀함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는 겨울이기에-이었다.

 

그 사람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아직까지 명료하게 정리하지 못한다. 그 이후 그 자신의 감정의 파고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모순을 느끼고 모순을 설명하지 못하고 모순된 행동과 모순된 나날을 보낸다. 모순이 겹치고 겹쳐 이제는 그것을 뭐라고 불러야 하지 모를 즈음이 되어서 그 사람은 그런 '인간'이 된다. 모순된 인간이 된다. 설명할 수 없는 인간이 된다.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이 된다. 때때로 '삶은 악몽이고 꿈은 이상이다'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렇게 안갯속에서 길을 잃은 그 사람은 그래도 가만히 서 있을 수 없기에 뒤로도 걸음을 옮겨보고 옆을 쳐다도 보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 애써도 보고 전속력으로 달려도 보고 그렇게 뭐든 해본다.

 

*

 

다들 그렇게 각자의 지옥에서 살아간다-라는 터무니없는 혹은 누군가 들으면 화낼만한 결론을 그 사람이 낸 것은 이듬해 봄이었다. 그 지옥은 세상 사람들이 머리로 이해하는 지옥과는 개념부터가 다른 그러나 설명할 수 없는 그런 지옥이다-라고 그 사람은 제멋대로 정의 내린다. 스스로 행복을 포기한 그 사람은 불완전한. 불안한. 조용한. 시끄러운. 활기찬. 우울한. 거짓된. 모순된 그러나 자연스러운 지옥에서 살고 있다고 느낀다.

 

그 사람이 행복은 어디에 있을까- 생각한 것은 어느 봄날이었다.

그 사람이 타인은 행복할까- 생각한 것은 그 다음날이었다.

그 사람이 사소한 것이 행복인가- 생각한 것은 그 다음날이었다.

그 사람이 사소한 것에서 행복을 느껴보려 한 것은 그 다음날이었다.

그 사람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답을 강구하려 한 것은 그 다음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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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을 내리지 못하는 것이 정답이다. 인생은 불가해하다. 그것이 유일한 답이다-라고 그 사람이 느끼게 된 것이 언제인지는 그 사람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결론에 도달한 후 그 사람은 해방감을 마주한다. 슬픈 날이 있고 기쁜 날이 있다. 충만한 감정을 느끼는 순간이 있고 모든 것을 상실한 공허의 감정을 느끼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과 감정을 '있게'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더라도 성공하지 못한다. 그 순간과 감정은 불가해한 세상이 내게 일방적으로 던지는 강속구. 변화구. 느린 공. 딱딱한 공. 부드러운 공이다.

 

그 사람이 세상에 나와 행복을 느꼈던 적은 다섯 살 여름, 아홉 살 겨울, 열세 살 봄, 열여덟 살 가을, 스물다섯 살 봄, 학교에서, 공터에서, 집에서, 가게에서, 홀로, 친구와, 가족과, 사람들과 있었던 어느 지점이다. 그 순간은 영원하지 않다. 그저 지나간다. 불행도 마찬가지이다.

 

세상에 나와 세상에 살며 세상을 바꿀 수 없다면 세상을 살아가는 그 사람의, 나의, 세상을 느끼는 그 사람의, 나의 태도를 바꾸자-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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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그렇게 각자의 인생을 살아간다-라는 누군가 들으면 피식할 정도로 당연한 결론을 나는 내린다. 바로 지금, 꽤 나쁘지 않은 기분이다. 새벽녘엔 나쁠 수도 있겠다. 그러면 어떤가. 나쁘지 않은 기분은 또 찾아올진대.

 

인생에 의미가 찾아온다. 인간 되기. 인간으로 살기. 세상 속에서. 글과 사진과 영상과 인간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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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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