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21일, 사랑하기에 충분한 시간 [영화]

글 입력 2022.05.02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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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지구가 멸망한다는 음모론을 종종 들었다. 대부분 우스갯소리로 넘겼지만, 어떤 것은 아주 찰나의 순간 동안 믿었던 것도 같다. ‘2012 지구 종말론’이 바로 그것이다. 고대 마야인들이 만든 달력이 2012년 12월 21일까지만 존재한다는 이유로 12월 21일이 인류의 마지막 날이 될 것이라는 예언이었는데, 그 당시 초등학교 6학년생이었던 나는 과학실에서 친구들과 예언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물론 그것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그날따라 우중충했던 날씨와 불이 꺼져 있었던 과학실 덕분에 아주 잠깐 진짜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13살의 순수함이 있어 가능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종말론이 사람들 사이에서 떠도는 소문이 아니라면, 모든 뉴스와 라디오에서 지구의 종말을 보도한다면 당신은 그 방송을 듣고 어떤 생각을 할 것인가?


그리고 방송에 따르면 지구를 향해 소행성이 돌진하고 있으며 지구를 구하려는 마지막 시도는 실패했다. 우리 삶의 터전이 멸망하기까지 남은 시간은 21일. 당신은 마지막 21일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세상의 끝까지 21일: 죽음 앞에서 진정한 자유를 찾는 아이러니


 

영화나 소설에서 ‘지구 종말’은 꽤 자주 다루어지는 소재지만 그 안에서 주인공의 역할은 변함이 없다. 종말을 저지할 임무를 맡은 주인공은 모든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고 영웅으로 귀환하는 것이다. 하지만 1명의 주인공이 고군분투하는 동안, 나머지 평범한 사람들은 종말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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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끝까지 21’은 지구 종말을 마주한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아내에게 버림받은 ‘도지’와 고향으로 향하는 비행기를 놓친 ‘페니’. 각자의 사정으로 혼자가 된 둘이 상대방을 알아가는 과정부터 두려움에 무너지지 않도록 서로를 단단히 지탱하게 되는 과정을 무겁지 않게 보여준다.

 

도지와 페니가 함께 ‘로드트립’을 떠나게 된 계기를 이야기해보자. 도지와 페니는 몇 년째 같은 건물에 살고 있는 이웃이지만, 세상의 종말이 선언되고 나서야 처음 마주한다. 페니는 도지에게 잘못 배송된 우편물 뭉치를 건네주고, 도지는 그중에서 그리워했던 첫사랑의 편지를 발견한다. 그때, 종말 때문에 일어난 폭동이 그들의 집을 덮치고, 얼떨결에 페니의 차로 도망치게 된 도지는 한 가지 제안을 한다. 이 차로 자신의 첫사랑에게 데려다주면, 가족들을 보러 갈 수 있는 비행기로 데려다주겠다고. 인생의 마지막 목표를 위해 둘은 세상의 끝까지 21일을 남기고 모험을 떠난다.


도지가 종말을 바라보는 태도는 매우 비관적이다. 인생 자체에 대해 비관적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아내가 떠난 후 외도 사실까지 알게 된 후에는, 어차피 3주도 안 되어 끝날 삶을 먼저 포기하려 한다. 그에 반해 페니는 한없이 긍정적이다. 밝게 미래를 말하는 페니를 향해 도지는 ‘생존자(Survivor)’가 되었냐고 묻고, 페니는 그에 자신을 ‘낙관론자(Optimist)일 뿐이라고 답한다. 페니를 보고 있으면 정말로 모두가 생존자가 되어 먼 미래를 상상할 수 있을 것 같다. 이게 바로 긍정의 힘인 걸까. 긍정이 가진 또 다른 힘은 전파력이기에 도지도 페니에게 물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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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죽음 앞에서 자유로운가. 이 영화를 보기 전의 나라면 자신 있게 부정의 답을 내놓을 것이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의무적으로 아주 당연하게 하는 행동들은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삶을 영위하기 위한 최소한의 에너지를 위해 음식을 섭취하고 (물론 먹는 행위 자체에서 오는 행복이 존재함을 알고 있다) 매일매일 잠을 잔다. 만약 먹을 필요도 없고, 잘 필요도 없다면 그 많은 시간을 더 자유롭게 쓸 수 있을 텐데 말이다. 또한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교통 법규를 지키고 사회 구성원으로서 ‘살아’가기 위해 수많은 규칙을 지킨다. 그러다 병에 걸린다면, 약해져 가는 자신을 꼼짝없이 누워 바라만 볼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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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더 이상 눈앞에 닥쳐온 죽음을 외면할 수 없는 현실에서 페니와 도지는 자유로워진다. 잘못된 사람에게 시간을 쏟지 않고, 무슨 옷을 입을지 고민하지 않는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나에게 맞는 사람일지, 이 사람과의 10년 후가 행복할지 걱정할 필요도 없다. 그들을 구속하는 먼 미래에 대한 걱정이 사라지니, 도지와 페니는 지금 이 순간 옆에 있는 서로의 곁에 남기로 선택한다.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함을 버리고 온전히 현재에 집중하며 자유를 만끽한다. 비록 그들의 마지막 순간은 소행성이 충돌하는 소리와 함께 영원히 사라질지라도, 완전한 자유 의지로 선택한 손을 꼭 잡고 서로의 얼굴을 눈에 담고 있으니 그들은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

 

‘내가 주인공이라면’이라는 가정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세상의 멸망까지 하루가 남았다면, 고민도 없이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리라. 하지만 21일은 무언가 더 많은 것을 시도할 수 있는 시간이다.


우선 ‘해리포터’, ‘반지의 제왕’, ‘헝거게임’ 같이 좋아하는 판타지 영화 시리즈를 정주행해야겠다. 그리고 매주 챙겨 보고 있는 웹툰 작가들에게 결말을 알려달라는 메일을 보낼 것이다. 답이 오든 오지 않든, 나에겐 시도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다. 해외여행을 가기엔 너무 많은 시간이 소요되어 평소 가보고 싶었던 순천이나 여러 번 여행했음에도 부족하다고 느껴지는 제주도로 떠나볼까 고민하겠지만, 결국 나의 고향에 머무를 것 같다. 죽기 전에 멋진 풍경을 다시는 마주할 수 없다는 것이 아쉽지만 지금까지 내가 살아왔던, 나를 이루었던 장소가 더 소중하다.


나의 지난 인생에 함께했었던 인연들을 되돌아보는 시간도 가졌으면 좋겠다. 12년의 학창 시절 동안 나에게 큰 도움을 주셨던 선생님들께 안부 인사를 드리고, 이제는 연락이 끊긴 동창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보낼 것이다. 내게 상처를 주었던 사람에게 전화해 시원하게 욕도 해보고, 오래된 카세트테이프처럼 곧 끊어질 것 같이 오래된 기억 속의 짝사랑 상대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풋풋했던 마음을 전해보고 싶다.


지나간 인연들은 이쯤하고, 현재 내 삶을 행복하게 만드는 친구들과 만나야겠다. 언젠가 한 번 가본 적 있는 카페, 인테리어도 예쁘고 음료도 맛있어서 꼭 다시 오자고 말했던 바로 그 카페에 모여야지. 그리고 추억을 회상하며 웃다가, 이제는 함께할 수 없어서 서로의 손을 붙잡고 엉엉 울기도 할 것이다. 다른 사람 앞에서 우는 모습을 보이는 게 창피하다고 생각하는 편이지만, 이제 그런 건 아무 소용이 없으니까. 다른 사람들은 신경 쓰지 않고, 그때의 감정에 충실할 것이다.


음악도 빼놓을 수 없다. 일단은 ‘Taylor Swift’의 모든 노래를 듣고 싶다. 콘서트 영상과 함께 가사 하나하나를 곱씹으며 들은 후, 마지막으로는 ‘Long Live’를 들을 것이다. 지구 종말을 앞둔 상황과 모순되지만, 그 노래의 가사를 꼭 따라 부르고 싶다. Long live the walls we crashed through. All the kingdom lights shined just for me and you. I was screaming “Long live all the magic we made” And bring on all the pretenders. One day, we will be remembered.우리가 넘은 벽도, 우릴 비추는 빛도, 우리가 만들어낸 마법 같은 순간도, 우릴 기억해줄 사람도 며칠 뒤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지만, 그래도 조그만 위로 정도는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마지막 일주일은 집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고 가족들과 시간을 보낼 것이다. 선반 한쪽을 가득 채우고 있는 베이킹 재료들을 가지고, 그것들이 다 소진될 때까지 디저트를 구울 것이다. 남은 시간 동안 가족 모두가 배부르게 먹을 수 있을 만큼 말이다. 맛있는 음식과 함께 여느 때와 똑같은 하루하루를 보낸 다음, 거실 한쪽에 위치한 턴테이블로 아빠가 수집해온 레코드판과 내가 수집하고 있는 레코드판을 번갈아 가며 들을 것이다. 우리 가족의 추억을 그리는 일에는, 수십 년의 세월 동안 그 자리를 지킨 음악과 새로 그 자리를 물려받은 음악만큼 제격인 것이 없다. 그리고 서로를 꼭 껴안고 사랑한다고 말하면 세상의 끝까지 남은 21을 보내는 나의 완벽한 계획이 끝이 난다.

 

*

 

사랑하기 때문에 21일은 충분한 시간이고, 사랑하는 데에 21일은 충분한 시간이니까. 21일은 사랑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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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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