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종로 스케치 1 - 종로4가, 세운상가

멀리서 지켜보는 때에 그들은 하나의 촛불 같았다
글 입력 2022.05.02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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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를 향해 달렸다.

 

버스에서 내린 다음 고개를 들어 아직 불 켜진 건물들을 보고 있으면, 이제는 아름다움보다는 측은함을 먼저 느끼게 된다. 그럼에도 아름다운 이 통짜 유리들은 그 누구의 고된 일상이자 무대이자 희극일까. 나는 충분히 멀리서 바라본다. 서울은 내려도 내려도, 아무리 자주 버스에서 내려도, 심지어 여기 살아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 같다.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을 무표정한 산과 외로운 들판과 이따금 손을 흔들어주는 누런 벼들 사이로 지나 보냈기 때문인가. 이제 그런 것들은 기억에 잘 찾지를 않다지만, 아무래도 그 이유는 아닌듯싶다.

 

세간에 있는 시차라는 말을 빌려 따오자면, 고차 高差라는 생각이 문득 들 정도로, 여기는 사방이 하늘을 가리어 못마땅하다. 어디 얼굴도 없는 것들이 무게감을 드리우는 것이냐, 하면서도 어딘가는 포근한, 여기는 시멘트와 낡은 신문지와 케묵은 주식 이야기들과 우울함을 대충 무채색의 찰흙 속에 섞어 만든, 은색 골렘의 다리 사이다. 그래서 청계천이 아름다운 것이겠거니, 그래서 강남은 외로운 곳이다. 거기에 하이얀 이팝나무 가로수가 가지런히 자리해 있어 민들레 홀씨 같은 가루를 퍼나르고 있었다지만, 거기엔 사람과 건물이 지나다닐 수 없을 만한 넉넉한 빈 공간도, 어둠도, 적막함도 없다. 그런 곳은 내 아는 한 청계천과 종로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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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도시의 민낯을 반쯤 가리어, 아름답게 만들곤 한다. 깡마르게 드러난 누군가의 갈비뼈에 얇은 검은 천을 하나 씌워주는, 그런 느낌이다. 길 건너편으로 탑골공원이 보이는 종로3가역에 내려서, 뒤를 돌아 청계천 변으로 빠진다. 한 블록을 채 지나지 않아도 사위는 조용해진다. 드문드문 보이는 직장인들의 실루엣이 계속해서 이 놀라운 조용함이 가지는 신비를 상기시킨다. 종로의 밤을 찾는 이유일 것이다. 반쯤 가리어진 도시의 한가운데에서 고요히 잠겨 있을 수 있다는 것. 세운상가 광장이 보이는 데까지 걸었다.

 

유튜브에서 언뜻 보기론 이 사이사이에는 기대치 않은 것들이 잔뜩 있다더라. 반쯤은 문을 닫은 철물점 거리의 적막함 사이로 예기치 못한 아름다움들이 숨어 있다. 나도 그런 곳을 한 곳 알지. 생뚱맞도록 밝게 빛나는 붉은 자판기 앞을 지나다가 그것이 열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 우둑 멈추어 그 안을 슬쩍 엿본 기억이 있다. 이런 아름다운 공간들은 힌트를 지니지 않고선 감히 찾을 엄두도 나지 않는다. 인스타그램을 안 하는 나로서는 보물찾기 힌트를 발견해보기 어렵겠지만, 골목골목 다 들어가 보지 않아도 다정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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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특성상 인터넷 지도를 자주 보게 되는데, 종로 쪽 권역을 찾다가 보면 로드뷰로 부러 쭈욱 따라 걸어보곤 한다. 로드뷰의 박제된 세상은 언제나 낮이라 아쉽다지만, 상상이 간다. 세운상가와 청계상가를 잇는 구름다리에서 아래로 바라보는 대낮 청계천의 정경이. 언젠가 앉았던 그 노란 의자에서 본 그곳은 무척이나 따스해서, 업무의 스트레스마저 잠시 잊게 해주곤 한다.

 

지도에는 참 구석구석 빼곡히도 골목길이 자리해 있다. 로드뷰 모드를 키면 모든 길이 시퍼렇게 두꺼워져 징그럽다. 누군가 끼워 넣어 둔 마냥 골목이 참 많다. 이것을 쭈욱 펴 이어보면 대단한 길이가 될 것이다. 그만큼 나는 아직 종로의 일부분도 모르리라는 생각에 퍽 신난다. 어느 길모퉁이를 돌면, 꿈에서도 그려보지 못한 곳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생각, 골목은 ㄱ자로 꺾여 있어 그 너머의 것들을 미리 보이지 않았다. 이렇듯 미지의 것들에 낭만적인 기억이 첨가되면, 동경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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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다리 위에서 찍은 사진이 없어서 오늘 다시 방문하였다.

 

 

가장 친한 친구의 생일을 맞으러 열심히 걸어보았으나,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은 나였다. 세운상가와 청계상가를 잇는 구름다리 위에서 일전에 보았던 이곳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그만큼 시간은 내게 여유를 권하였음에. 권한 여유를 뿌리치고선 할만한 다른 것이 없었기에, 나는 가로등 빛으로 머리가 하얘진 가로수들의 어여쁨을 지켜보았다. 여긴 아무도 없었고, 나는 도심 한복판에서 이런 사치를 누리는 것이 얼마나 신비한 일인지를 잊지 않으려 계속 되뇌었다.

 

주변을 어슬렁거리어보았다. 태생이 계획과 먼 나로서는 이렇게 어슬렁거리다가 이따금 기연들을 만나곤 한다. 굳센 철벽을 두른 듯, 완전하게 닫혀버린 철물점과 가전매장들을 지나 어딘가 두려움을 지피는 골목들에 접어드니, 이 공간의 엄숙한 분위기에 녹아들지 않는 노포들이 촛불처럼 죽은 상권을 밝히고 있다. 그것에는 분명, 어딘가 환상적인 면이 있었다. 철물점의 내려간 셔터 바로 앞에 붉은색 플라스틱으로 된 탁자들과 마찬가지로 붉은색인 플라스틱 의자들이 즐비해 있고, 밤은 깊고, 고기 굽는 내음이 그제야 풍겨오기 시작하고, 이 다 죽어버린 상권에 환한 불빛과 사람들과 수다로 가득 차 있음을 바라보고 있자니 잠깐 현실감이 옅어진다. 그러나 예정보다 늦게 도착한 친구들의 뒷덜미를 붙잡아 서둘러 보았음에도, 식당들은 전부 라스트 오더가 마감되었다고 대답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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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한이 되어 오늘 친구를 붙잡고 다시 다녀왔다. 웨이팅은 40분

 

 

삼미정, 향촌식당, 대원식당, 백만불식품, 이 밤을 꼭 야장(?)에서 보내야겠다는 타는 마음으로 그 근처 골목은 전부 돌아다녀 봤지만 자리를 잡을 수 없었고, 청계상가의 모 국수집 앞에서 20분을 더 대기한 다음에야 다행히 야장 테이블을 차지할 수 있었다. 바깥에서 먹는게 뭐가 그리 대수라고 사람을 이토록 기다리게 하고, 또 들뜨게 하는 것일까. 연달은 약속과 술자리, 그리고 회사생활로 더없이 피로한 날이었지만, 그 밤은 너무 설레었다. 그곳은 다만 조용했고, 어두웠으며, 공간이 넉넉했고, 바람이 잘 들었고, 야외에 테이블이 깔려있을 뿐이었는데 말이다. 매장 바깥에서 바람을 맞으며 술과 음식을 먹는 것만으로도, 다 큰 어른인 우리는 이렇게나 행복할 수 있는 것이었을까. 어쩜 허탈할 정도로, 그날 행복은 쉬이 우릴 찾았다.

 

그래, 마음에 쏙 드는 야장을 찾아 여러 매장을 전전했고, 자리가 없었고, 주문은 마감됐고, 배는 고프고, 밤은 깊었으니, 절로 느끼게 되었을 행복일까. 국수는 맛있었고, 우리는 유쾌했다. 나는 늘 너무 진지했기에, 마법 같은 밤에 젖어들지 않고선 유쾌함이란 내 안에서 좀체 태어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유쾌했다는 것이다. 방정맞을 정도로 그날 밤의 나는 유쾌했다. 내 안에 깊이 뿌리내린 모든 체화된 자기 억제와 습관과 선입견들이 일순 기능을 잃게 하는, 그런 마법 같은 밤을 보낸 나는 이제 종로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갖고서 찬찬히 오래도록 그것을 궁리해보아야겠다는 생각에 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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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꼭 저기 아래 붉은색 플라스틱 테이블 하나를 당당히 차지해, 구운 고기 위에 이 밤을 싸서 먹어보자고 다짐하며, 다음날 출근에 대한 걱정을 반으로 접어 흘려보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에세이를 쓰는 오늘, 그날 골목길의 사진이 한 장도 없다는 것을 핑계로 종로4가를 다시 찾는다. 이번에도 물론 행복하리라는, 근거는 없지만 확신에 찬 기대를 안고 우리는 다시 모였다.

 

종로의 여러 길들이 가지는 매력들에는 무언가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다가 고즈넉함, 이 단어에 생각이 미쳤을 때에는 전율이 인다. 그야말로 가장 걸맞은 단어가 아닐까? 고즈넉함, 그것은 고요하고도 아늑하다는 것. 종로4가의 밤에는 고즈넉함이 안착할 공간이 있다. 그것은 어둡고 적막하다는 것, 그래서 약간의 외로움과 을씨년스럼이 날 감도는 즈음에 골목을 들여다보면, 사람들이 모여 있다. 그들은 각자의 테이블을 잡고 각자의 하루를 풀어놓고 있었지만, 멀리서 지켜보는 때에 그들은 하나의 촛불 같았다. 어두워야 빛나는 촛불처럼, 적막할 때에 빛을 발하는 고즈넉함이 거기 있다. 두 번을 다녀온 종로4가, 세운상가의 밤은 이렇게 내 안에 정의되어 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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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만찬을 끝내고, 다시 세운상가와 청계상가를 잇는 구름다리에 앉아서 청계천을 내려다본다. 가로등 빛으로 머리가 하얘진 가로수들의 어여쁨과 각자 알 수 없는 사정을 안고서 이 시각까지 천변을 거니는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고즈넉함, 충분히 높은 여기 사위 고요한 곳에서 멀리 마천루는 더욱 빛난다. 뒤로는 종각의 랜드마크인 종로타워가 빛나고, 이 앞으로는 보이진 않지만 DDP가 밤새도록 불을 지피고 있을 것이다. 그럴수록 어둠에 잠겨 멀리선 알아보지 못할 이곳의 적막함도 은은하게 그 아름다움을 피어올리는 듯하다.

 

5월 초파일을 대비해 길가엔 연등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우리도 내려와 청계천을 거닌다. 각자의 생각에 빠져 침묵하는 중에 나는, 다음에는 어느 종로에서 다시 이와 비슷한 행복을 찾아볼 수 있을지 그려보기 시작한다. 내일 출근길은 조금 더 험난하겠구나, 밤이 늦었다. 그래도 내게는 이제 변명거리 하나가 생겼다. 누군가 내게 '왜 용인이 아닌 서울살이를 고집하느냐'고 물어본다면, 내일 회사에서 피곤한 얼굴을 한 내게 '왜 그리 사서 고생을 하느냐'고 물어온다면, 나는 거기 종로가 있기 때문에라고 답해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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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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