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영원한 낙원은 없다 - 엘멧 [도서/문학]

소설 '엘멧'
글 입력 2022.04.28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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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가 사는 세상에 대해 상상해보곤 한다. 자신의 숨구멍을 틀어막는 물을 공기처럼 끌어안고 살면서도 호흡하기 위해 물 밖의 세상을 영영 떠날 수 없는 삶. 인간이 고래처럼 살 수 있을까? 내 생명을 유지하는 것들로 충만한 세계를 버리고 차갑고 축축한 세계로 들어가 살 수 있을까? 소설 ‘엘멧’의 세 인물은 그런 삶을 선택하는 데에 주저하지 않는다.


대니얼, 캐시, 그리고 그들의 아버지인 존은 문명을 버리고 잡목림에 들어가 직접 집을 짓고, 먹을 것을 구하고, 장작을 때며 살아간다. 존은 커다란 몸집과 타고난 싸움꾼 기질을 이용해 돈을 번다. 그에게는 묻어두고 싶은 과거가 있고, 싸움이 여전히 주된 수입원이긴 하지만 그는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돈이 어디에서 오는지 알고, 그들의 삶의 방식이 다른 이들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지만 그것을 불편하거나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캐시와 대니얼에게는 존이 세상의 전부였기 때문이다.


캐시와 대니얼은 존의 소개로 오두막 근처에 살던 늙은 여자, 비비안을 만난다. 비비안은 존처럼 문명을 버리고 떠나온 듯하다가도, 그들과는 정반대의 세상에서 사는 것 같아 보인다. 대니얼은 비비안을 좋아한다. 비비안의 삶을 들여다보고 싶어 하고, 그의 집이 제공했던 따스함이 ‘보금자리’와 같은 느낌을 주었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어린 나이에 공교육과 사회를 떠나온 대니얼에게 비비안은 온통 새롭고 흥미로웠을 것이다.


 

“그녀는 그저 공 옆에 서 있다가 돌아서서 걸었다. 그대로 운동장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나중에 내가 물어봤을 때, 캐시는 어차피 그 게임이 그들의 게임이란 걸 알았다고 했다. 그녀가 축구를 했어도, 심지어 잘했어도, 그것은 언제나 그들의 게임이었다.”

 

“내가 너무 무기력하게 느껴졌어요, 아빠. 무슨 짓을 해도 걔들을 바꿀 수 없을 것 같았어요. 걔들에게 상처를 줄 수 없을 것 같았어요. 적어도 걔들이 내게 상처를 준 것처럼은요. 원하는 만큼 실컷 패주었지만 그런다고 달라진 건 하나도 없었어요. 그 애들은 진짜 저한테 못되게 굴었어요, 아빠. 아파서가 아니에요, 아빠. 아픈건 괜찮아요. 하지만 걔들 때문에 내 마음이 느낀 감정이 문제였어요. 무슨 짓을 해도 난 절대 걔들을 이길 수 없어요.”

 

“그렇게 끔찍한 몸뚱이는 처음 봐. … 그런 엉덩이를 달고 뛰는 걸 상상해봤어? 누군가로부터 도망쳐야 하는데 내 뼈가 날 뒤로 잡아끄는거 상상해봤어? … 몸 전체가 앞으로 나아가려는데 망할 놈의 뼈가 널 붙잡는거야."

 

 

반면 캐시는 비비안의 수업과 그의 따뜻한 집을, 성숙한 여성의 신체와 그 신체 주변으로 일궈진 삶을 경멸한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는 여성으로 살아가기를 두려워했다. 자신의 힘으로 통제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통제하더라도, 구조적인 폭력과 억압은 캐시가 이길 수 없는 상대였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렇게 첫 몇 장이 진행되는 동안 그들의 삶은 평온하다. 적어도 대니얼의 시점에서는 말이다. 숲에서는 음식과 물, 장작과 장난감이 끊임없이 샘솟는다. 이 작고 안락한 오두막은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그들을 보듬어줄 것이다. 그러나 어느 날, 숲과 마을의 농장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는 지주 프라이스가 찾아와 땅의 소유권을 증명하는 서류를 들이민 순간 그들의 평화는 깨진다.


존과 캐시는 같은 ‘세상’을 공유하고 있다. 존이 ‘살아 숨 쉬는 땅을 종이 한 장에 가두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근육과 맨손이 아닌 다른 것으로 어떻게 자신을 방어하거나 입지를 구축할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던 것처럼, 캐시는 ‘자기 자신을 지킬 방법을 아는’ 사람이었다. 대니얼에게 캐시는 늘 자신보다 커 보였던 누나이자, 존 못지않게 단단한 사람이었다.


집을 지키기 위해 존은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다 결심했던 세계로 돌아간다. 프라이스에 요구에 따라 큰돈이 걸린 싸움판에 나간 것이다. 존은 이것으로 집을 지켜냈지만, 캐시에게는 해결해야 할 다른 문제가 있었다. 프라이스의 아들은 오랜 시간 캐시를 성희롱해왔다. 존도, 대니얼도 그동안 캐시가 감내해야 했던 고통을 알지 못했다. 캐시는 지주의 아들을 상대하는 것이 온전히 자신의 몫이라고 믿었고, 그래서 어떠한 설명도, 망설임도 없이 그를 죽였다. 이미 많은 것을 포기한 아버지에 대한 걱정과 어린 동생에게 기댈 수 없다는 의젓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전혀 몰랐어요? 당신처럼 자식들을 살뜰히 챙기는 사람이 그걸 눈치채지 못했다고요? … 그 애와 당신 딸. 특히 그 아이. 그 애가 틈만 나면 당신 딸한테 찾아가서 말을 걸었잖습니까. 하지만 결코 다정한 태도는 아니었어요. 친해보자는 식이 아니었다고요. 사람이 없는 곳으로 당신 딸을 데려가려고 했어요." "그래서 내가 그 아일 죽였다고 생각한다는 겁니까?"
 


캐시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지주의 아들을 죽인 순간, 존이 가까스로 엮어 놓은 평화는 영영 깨져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존은 마지막 순간까지 캐시를 원망하지 않는다. 캐시 또한 다짐한 대로 대니얼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다. 기회를 엿보다 대니얼이 도망칠 기회를 만들어주고, 그가 충분한 거리를 확보하자마자 주저 없이 오두막을 불태운다. 프라이스와 그 일당, 자신의 다친 아버지, 심지어 자신마저도 그 불길 속으로 몰아넣는다.


어떻게 보면 캐시는 이 소설 속에서 가장 ‘주인공’다운 인물이다. 캐시가 지주의 아들을 죽이는 부분, 그리고 자신이 살던 오두막에 불을 지르는 부분은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하다. 그에게는 지켜야 할 신념이 있고, 그럴 만한 이유가 있고, 그에 걸맞은 능력도 있다. 이 이야기가 캐시의 시점이 아닌 대니얼의 시점에서 쓰인 것이 이상하게 보일 정도이다. 그러나 작가가 대니얼을 화자로 정한 것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다.


대니얼은 다른 두 사람에 비해 너무나 어리고 연약하다. 거친 세상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실제로 소설 속 묘사에서도 그는 거구의 아버지와 악바리 같은 누나와 달리 깡마른 체구의 예쁘장한 소년으로 그려진다. 존과 캐시가 살았던 세상과 대니얼이 살았던 세상은 물리적으로 다르지 않다. 다만 대니얼에게 숲은 변함없이 자신을 지켜줄 단단한 버팀목으로 보였고, 다른 두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았다는 점이 다르다. 존은 언제든 자신과 가족을 깔아뭉갤 수 있는 더 넓은 세상을 알았고, 캐시는 누구에게 배우지 않았어도 숲이 언제나 안전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끈적한 눈빛, 수치심을 주기 위해 계산된 말과 손짓, 단단한 뼈와 강인한 마음이 아닌 그 위에 붙은 살덩이만을 감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캐시는 일찌감치 대니얼이 영원히 알 수 없을 무력감을 느꼈다. 자신이 아버지만큼 강해지더라도 영영 벗어날 수 없을 그 시선을 말이다.


만약 이 가족의 이야기가 캐시의 시점에서 쓰였다면, 지금과 같은 절망적인 결말은 어떤 결의와 숭고함, 부러질지언정 절대로 구부러지지 않는 단단함으로 메워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이 이야기는 대니얼 혼자 남아 마무리 지어야만 한다. 거칠고 무뚝뚝하기는 해도 늘 자신을 포근하게 보듬었던 아버지, 누나, 그리고 숲이 언제라도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을 가장 처절하게 깨닫는 사람은 대니얼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낙원이 오래가지 못해 짓밟힌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프라이스가 없었어도 머지않아 그 세상은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그들이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숲은 다른 누군가의 소유였고, 존이 언제까지나 싸움으로 돈을 벌 수는 없었다. 존은 그 사실을 알았지만 애써 무시했고, 캐시는 본능적으로 그 사실을 알았으며, 대니얼은 가족과 함께라면 그런 운명 따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여기에서 살아남은 것이 대니얼뿐이라는 사실이 모순인지, 아니면 당연한 일인지 나는 알 수 없다.


(대니얼만 살아남았다는 것은 순전히 내 추측이지만, 나는 소설의 마지막 문단을 읽는 순간 캐시가 그 화염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설령 캐시가 살아있다고 해도 둘은 다시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야만 이야기가 더 현실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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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암울한 가족사인 듯하면서도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실제로 일어날 수 없는 것 같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현실에는 이보다 더한 비극이 널리고 널렸다. 존, 캐시, 대니얼이 겪은 일을 단순히 힘없는 사람을 착취하는 지주의 이야기로 뭉뚱그릴 수는 없다. 우리 사회는 가장 약하고 보호받아야 할 이들을 오히려 사지로 내몰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이곳을 떠날 수 없게 만든다.


‘엘멧’은 우리 사회의 부조리와 억압에 대한 비판이자, 그런 세상을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가야 하는 이들의 삶을 이야기한다. 영원한 것은 존재하지 않고, 그건 내 세상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피부로 받아들여야 하는 이들의 이야기다. ‘엘멧’은 바로 그 깨달음의 순간을 포착한 순간이다. 우리가 애써 마주하려 하지 않았던 미세한 균열들이 결국 영원할 것만 같던 세상을 무너뜨리는 순간, 우리는 속절없이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는 깨달음 말이다. 하지만 삶이란 원래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나의 세상이 무너지는 아픔을 오롯이 감당하는 것. 대니얼이 이 모든 일 이후에 어떻게 살아갔을지는 순전히 독자들이 상상하기에 달렸다. 그가 어디에서 어떤 삶을 살아가도, 존과 캐시와 비비안이 있던 그 숲은 영원히 가슴 속에 남아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니얼은 어린 시절의 그 숲으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 ‘엘멧’의 잔해를 밟고 살아가야만 한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비단 대니얼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우리는 모두 ‘엘멧’의 잔해를 밟고 서 있다.

 

 

[이고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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