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연결되어 있다는 위로 - 시선으로부터 [도서]

시선으로부터 뻗어나왔지. 지지 않고 꺾이지 않을 거야. 그걸로 충분할 거야.
글 입력 2022.04.28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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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은 모두 차갑고 도통 낭만이 없다는 사실이 괜한 상처였던 사춘기 시절이 있었다. 어른이 되면 낭만이 사라지는 줄 알고, 평생 아이처럼 살고 싶다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수신 없는 상처가 여전했던 어느 겨울, 정년 퇴임을 앞둔 미술 선생님이 함박눈을 보고 환호에 가까운 탄성을 내뱉던 순간 누구도 준 적 없던 상처가 치료되는 걸 느꼈다. 머릿속에 있던 알량한 고정관념이 와그작- 깨지는 순간이었다. 눈을 좋아하는 어른이 되기 위해 늙는 건 꽤 괜찮은 딜이라고, 조용히 생각했다.

 

정세랑 작가의 <시선으로부터,>를 읽은 지금, 그날이 떠오른다. 그 미술 선생님을 만나지 못해 여전히 어른에 대해 오해를 가지고 있었더라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으리란 생각이 든다. 어른은 하나의 종이 아니란다. 네가 자라서 되는 건 어른이 아니라 너 자신이란다. 시선으로부터 뻗은 가지들이 세세히도 말해줬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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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하와이에서 제사를 지낼 거야."

 

<시선으로부터,>는 한 가족이 '심시선'의 10주기를 맞아 하와이로 제사를 지내러 가는 과정을 담은 소설이다. 그의 유언에 따라 10년간 제사를 지내지 않던 가족은, 시선의 첫째 딸 '명희'의 파격 선언에 대가족 열두 명이 하와이로 간다. 하와이에서 지내는 며칠 동안 각자 심시선과 관련된 보물을 찾아 제사상에 올리기로 한다.


즉, <시선으로부터,>의 등장인물은 모두 심시선의 '가족'이다. 근데 그 수가 어찌나 많고 어지러운지, 책 앞장에 목차 대신 인물들의 관계를 설명하는 '가계도'가 실렸을 정도다. 이 가계도 없이 스토리 초반을 무리 없이 읽는 사람이 있을까 생각될 정도로 등장인물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나중 가서는 가계도를 볼 필요가 없었는데, 등장인물들을 다 익혀서가 아니라 그들끼리의 관계가 중요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시선으로부터,>는 인물끼리의 관계에 집중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아내 A, 남편 B, 그들의 딸 C가 있다면 AB, AC, CB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고 A와 B와 C 각각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이 책에서 중요한 것은 누구의 딸이, 누구의 아내가 아닌 오롯이 그 인물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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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캐릭터들이 하나같이 종잡을 수 없는 것이, 마치 야생에서 자란 나무의 나뭇가지들 같다. 이들이 '제사를 지내러 하와이에 간 가족'이라는 것만 봐도 도심 속 가로수와는 거리가 멀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들은 제사상에 올릴 팬케이크를 사 가는 대신, 팬케이크 요리사를 제사에 데려와 식을 일 없는 팬케이크를 올리는 비범한 인물들이다.

 

비범한 그들은 시선을 닮았다. 시선으로부터 뻗어 나왔다. 인물 간의 '관계'가 돋보이지 않는 이 소설은 실은 거대한 관계로 이루어져 있는데, 바로 심시선과의 관계다. 시선은 6.25전쟁 피난민으로 이민을 갔다가 세계를 돌아다니며 살기도 하고, 모종의 사건으로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는 등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아낸 여성이다. 책 곳곳에 실린 시선의 인터뷰나 책을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 수 있듯 심시선은 정형화되지 않은, 실로 비범한 인물이다. 시선이라는 비범한 나무에서는 비범한 나뭇가지가 뻗어 나올 수밖에 없던 것이다. 심시선을 포함한 모든 인물들이 날카로운 가위로 가지를 쳐내며 “이런 어른이 참 어른이야. 이런 사람이 진짜야”라고 말하지 않는다. 멋대로 뻗쳐있는 인물들을 보며 묘한 해방감이 느껴졌다.

 

무엇보다 등장인물들이 나무가 아니라 나뭇가지로서 고유하다는 점이 좋았다. 이 책에서 나무는 시선 하나뿐인 점이, 나머지는 전부 시선으로부터 파생된 가지라는 점이 희한하게 위안이 되었다. 읽는 동안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시선으로부터 뻗어나왔지. 지지 않고 꺾이지 않을 거야. 그걸로 충분할 거야. (330p)

 

우리는 추악한 시대를 살면서도 매일 아름다움을 발견해내던 그 사람을 닮았으니까. 엉망으로 실패하고 바닥까지 지쳐도 끝내는 계속해냈던 사람이 등을 밀어주었으니까. 세상을 뜬 지 십 년이 지나서도 세상을 놀라게 하는 사람의 조각이 우리 안에 있으니까. (331p)

 


책을 덮고 정리를 하며 그것은 ‘연결되어 있음’으로부터 오는 위로임을 깨달았다. 이 책이 부과해 준 나의 역할이 커다랗고 외로운 나무가 아니라, 그 나무에 연결된 가지라는 것이, 내가 뻗어 나온 그 나무는 추악한 시대를 살면서도 매일 아름다움을 발견해 내던 사람이라는 것이, 그 사실만으로 나는 지지 않고 꺾이지 않을 거란 것이, 이기적일지 몰라도 커다란 위로로 다가왔다.


타인의 외로움으로부터 받은 위로는 타인의 위로를 위해서라면 외로워져도 괜찮다는 용기를 주었다. 내가 20세기 여성으로부터 뻗어 나온 가지라면, 나도 다음 세기를 위한 나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외롭고 커다란 사람이 되어야지. 가지가 뻗을 자리가 많은 나무가 되어야지. 다음 세기의 '대충 희망'이 되어야지. 그런 다짐이 절로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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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을 전하기 위해서 이 거대한 세계를 만든 거였어. 정세랑 작가님의 기꺼운 설계가 느껴질 때마다 함박눈을 본 선생님처럼 탄성을 뱉었다. 서핑을 해야 하는 이유 10가지를 나열하는 대신, 그저 묵묵히 파도를 타는 모습을 보여주는, 그 파도의 거품을 제사상에 가져가는 인물들의 세계에 초대되어 읽는 내내 영광이었다.


김보라 감독의 영화 <벌새>를 보고 나도 나의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한 적이 있다. 만만해 보여서가 아니라 그냥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그렇게 영화 학회에 들어갔다. 그리고 지금, <시선으로부터,>를 읽고 처음으로 소설이 쓰고 싶어졌다. 나의 말을 전하기 위해 기꺼이 내가 없는 세계를 짓고 싶어졌다. 감동에서 그치지 않고 행동하게 만드는 것이 정세랑 작가가 가진 작은 초능력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정세랑 작가는 작가의 말에 이 책을 '20세기를 살아낸 여자들에게 바치는 21세기의 사랑'이라고 표현한다. 작가가 사랑으로 창조해낸 20세기 여성 심시선에게서 21세기 여성인 나는 용기를 얻는다. 세기를 번갈아가며 주고받은 사랑과 용기를 생각하면 무서울 것이 없어진다.

 

존재만으로 위로가 되는 심시선의 '존재한 적 없음'이 괴롭지는 않다. 우리에겐 정세랑이 있으니까. 그는 21세기 여성에게 위로를 주는 21세기 작가니까. 작가의 말에서 심시선처럼 죽는 날까지 쓰겠다고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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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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