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우연히 들른 그곳에서 - ➀ [여행]

크로아티아 배낭여행기
글 입력 2022.04.27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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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오피니언은 크로아티아 여행기를 서간 형식으로 구성하여 작성하였습니다.

 

내가 버스 타는 걸 무척 좋아한다고 말했던가? 궁상떨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나는 정말로 버스 창가 자리에 앉아 몇 시간이고 창밖을 쳐다보는 걸 좋아해서 중학생 때에는 심지어 버스가 회차 지점을 지나고 다시 종점으로 돌아올 때까지 내리지 않은 적도 있었어. 학교에 가야 하는 데 말이야. 그날 엄마는 학교에서 받은 전화로 화가 머리끝까지 났고 내게 도대체 왜 그랬냐며 추궁했지만 나는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그 덕분에 나는 좋아하던 버스 대신 며칠 동안 엄마가 승용차로 태워다주는 등하교를 해야 했지만 난 아직도 그 일을 후회하지 않아. 쉼 없이 지나가는 아파트며 한강이며 부단히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던 그때, 내가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처음으로 알 것 같은 순간이었거든. 그전까지 나는 뭐가 좋다, 싫다, 이렇다 할 게 없는 애였으니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내가 불현듯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가야겠다고 결심한 것도 다 버스 때문인 것 같다. 유럽대륙은 다 이어져 있잖아. 그러면 전 지역을 돌면서 아주 오랫동안 버스를 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 너는 가까이에 있는 너를 찾아오지도 않았으면서 멀리 나가는 건 쉽다며 나를 비난할지도 모르겠지만, 그 결정은 전혀 쉽지 않았어. 정말이야.

 

그날 자그레브에는 눈과 비가 섞인 진눈깨비가 많이 내렸어. 바로 전날에 두브로브니크에서 성벽을 거닐 때만 해도 하늘이 정말 맑고 포근했는데. 구름이 아드리아해에 그 모양 그대로 비칠 정도였다니까. 열두 시간짜리 야간버스를 타고 여기로 넘어오면서 날씨가 시시각각으로 바뀌는 걸 바로 볼 수 있었는데 그게 그렇게 신기할 수 없었어. 밤하늘에 조금씩 먹구름이 끼더니 어느 순간엔가 완전히 눈이 내리더라. 창에도 조금씩 서리가 끼기 시작하는 바람에 몇 번이나 커튼으로 창을 닦았는지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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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버스 타는 걸 좋아하는데도 야간버스 여정은 너무 힘들었어. 며칠째 제대로 씻지도 못한 상태인 데다가 의자를 한껏 뒤로 제쳐두고 코를 골며 자는 사람들에 신물이 나던 참이었거든. 또 어떤 아저씨가 배탈이 났는지 버스 안 화장실을 계속해서 들락날락하시는 바람에 제대로 바깥을 구경하지도 못했어. 여기저기서 안 좋은 냄새도 났고, 여러모로 내가 생각하던 여행과는 많이 달랐어. 더구나 가디건 하나만 걸쳐도 충분히 따뜻했던 두브로브니크와는 달리 막 도착한 자그레브에는 예상에 없던 눈까지 내리는 거야.


어쩔 수 없이 전날 지역을 이동하면서 무겁다고 버린 스웨이드 부츠가 자꾸만 생각나더라. 여하튼 두 시간 후면 다시 비엔나로 가는 6시간짜리 버스를 타야 하는데 이렇게 젖은 천 운동화랑 얇은 코트 하나로는 도저히 버스에 몸을 싣고 갈 수 없을 것만 같은 거야. 그래서 새 신발을 사기로 했어. 기왕이면 새 양말도. 양말 하나를 꺼내려 28인치 캐리어를 척척한 눈 바닥에 펼칠 수는 없으니까. 나는 점점 발끝부터 감각이 무뎌지기 시작한 발을 겨우 움직여 무엇이든 다 취급할 것 같은 Tisak 매점으로 갔어.

 

원래는 트램표를 파는 매표소라지만 매대에 늘어놓은 매점 할아버지의 소장품들이 심상치 않았거든. 각종 영양제에 수동 카메라 필름, 성인 잡지는 물론이고 만보기까지 있는데, 양말이 없겠어? 라고 생각하고 다가가 물었더니 정말 없더라. 신발은 물론이고. 대체 매점에선 필요한 걸 안 팔고 왜 그런 걸 파는 거야? 나는 포기하고 비엔나 행 플릭스 버스표를 교환하려 내렸던 자그레브 터미널로 다시 갔어.


그날은 그냥 운이 없는 날인가 싶었어. 내가 미리 예매해간 바우처랑 여권을 내밀었더니 매표소에 앉아있던 빨간 머리의 아주머니가 거칠게 소리쳤어. 그게 영언지 크로아티아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무척 빠른 속도라 덜컥 겁이 났는데 그 상황에서 나는 나도 모르게 도바르 단(Dobar dan)? 하고 인사를 했어. 그러자 아줌마가 옆 모니터를 가리켰어. Zagreb → Vienna , 9 : 10, Cancelled. 그리고 아줌마는 쿠나 몇 장을 던지다시피 내놓더니 나를 그렇게 놔둔 채 제 할 일을 하러 들어가셨어.

 

그런데 사실 생각보다 막막하지는 않았어. 당장 비엔나에 예약해둔 취소, 환불이 불가능한 숙소가 생각나긴 했지만 그뿐이었어. 꼼짝없이 이곳에 발이 묶이게 되었지만, 이 정도 예상에 벗어난 일쯤은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아. 너도 알겠지만, 감당할 수 없는 일은 따로 있잖아.


나는 우선 무작정 걸어가기 시작했다. 진눈깨비는 계속해서 내리는데 우산을 쥘 손도 없어서 그냥 맞으면서 걸었어. 코트 안에는 커다란 기모 후드를 입고 있었는데 후드의 모자가 자꾸만 벗겨지는 바람에 다시 뒤집어쓰기도 진작 포기했었거든. 그리고 그곳을 향해 걸으면서 내리 생각했어. 역시 싼 데에는 이유가 있는 거라고. 숙소는 무척 높은 곳에 있었고, 계단은 계단이라고 부를 수 없을 만큼 만져지지 않은 커다란 바위를 가져다 쌓은 것에 불과했어.

 

나는 캐리어를 끌지도 못하고 족히 200개는 넘어 보이는 계단을 하나씩 힘겹게 밟고 올라가는데, 맞은편에서 하얀 스카프를 귀까지 친친 감은 할머니가 ‘너 신발 좀 봐!’라며 놀라시더라. 눈 내리는 하늘하고 내 젖은 신발을 번갈아 가리키면서 연신 뭐라고 하셨어. 나야 뭐, 그 상황에서 늘 그렇듯 멋쩍은 웃음밖에 못 짓지. 할머니가 그렇게 놀라고 나서 뒤에 덧붙여 몇 마디 더 하시는데, 정확히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긴 해도 꼭 ‘요즘 애들이란!’하고 말하는 것 같았어. 뒤에 혀를 차셨거든.

 

나는 다시 몇 분을 더 걸었다. 어떻게 올랐는지도 모르겠는 계단이 끝이 나고, 캐리어를 평지에 내려 끄는 순간 캐리어 바퀴 하나가 빠졌어. 내가 계단을 오르면서 캐리어를 돌에 마구 부딪힌 데다가, 바퀴가 더는 유럽의 울퉁불퉁한 돌바닥을 견딜 수 없었나 봐.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닌데 그 순간만큼은 정말 주저앉아 울고 싶더라. 그리고 정말 그 눈 바닥에 철퍽 앉았어. 온몸이 아파서 바닥이 차가운지도 안 느껴졌어. 대신 몇몇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나를 빤히 쳐다보거나 흘끔대는 시선만 느껴졌는데, 그때 그 시선들 사이로 보이는 게 상아색 건물의 한 박물관이었어. 입구에 귀여운 여자아이 인형이 웃으면서 보라색 플래그를 가리키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깨진 글씨로 ‘Museum of Broken Relationships’라고 적혀 있었어. 그 위에 조그맣게 한글로도 ‘이별박물관’이라 적혀있더라.

 

너는 들어본 적 있니? 한국에서 8천km나 떨어진 크로아티아에 한글로도 소개된 이별박물관이 있더라는 이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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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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