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어머니라는 이름의 신화 - IS GOD IS [연극]

모성신화에 대하여
글 입력 2022.04.26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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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봄 밤의 혜화는 걷는 것만으로 하나의 연극을 상기시킨다. 정확히 어떤 이름을 가진 연극이 이 거리 위에 투사된다기보다는, 연극 같은 기분, 혹은 연극을 보는 느낌을 연상시킨다는 것이다. 연극의 메카이기 때문일까? 공연시간에 쫓기느라 찬찬히 거닐어보지는 못했지만, 종로에서 갈아탄 버스 위, 차창 너머로 보이는 세상은 믿기지 않도록 아름다워, 나는 조금 비현실적인 현실을 바라보는 어떤 느낌, 연극 같은 기분에 젖어든다.

 

거기에는 어둠 속에 묻힌 세운상가가 있었고 환히 불을 켜둔 채 폐점들을 시작한 광장시장을 지나 누군가의 공연으로 떠들썩한 마로니에 공원마저 마련되어 있다. 너무나 아름다운 것들을 지켜보는 나는 어느새, 이것이 현실일까 하는 어리숙한 질문에 더불어 나의 걸어온 길을 지나, 걷고 있는 지금을 되짚어본다. 나의 하루를 되짚어보는 것, 조금은 낭만적인 관점으로, 고로 혜화가 상기시킨 어느 연극은, 나의 하루, 즉 나에 대함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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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는 연극을 찾기 전에 아무런 사전 정보를 찾지 않곤 한다. 포스터와 소개의 짧은 스침만으로 선택은 쉬이 내리어지는 것이다. 작품의 내재적 해석을 우선시하기에, 그것의 해석에 영향을 끼칠만한 다른 것들은 부러 피해 보곤 해왔다. 오늘도 나만의 작은 해석을 갖고 싶은 생각, 이제 연극은 완전한 베일에 싸인 채 극장 속에 숨죽여 나를 기다리게 된다. 제목 하나만을 내 머릿속에 남겨두고 말이다.

 

무언가 대단한 의미가 도사린 듯한 비문非文 하나가 며칠 동안 뇌리 속을 돌아다녔다. 'IS GOD IS'라, IS GOD과 GOD IS가 같이 자리한 꼴, 신에 대한 질문과 신에 대한 나름의 정의가 같이 자리해 있는 모양, 그러나 목적어가 비어있다. 그렇다면 이 빈자리에 들어찰 만한 나의 작은 해석을 가져보는 방향으로 극을 바라보면 괜찮을까? 이런 생각 정도만 지참하여 극장을 찾았더랬다.

 

신 개념. 신 개념은 내 의식 체계 속에서 굉장히 특별하고도 특정한 위치를 가지는 것임에, 그에 대한 나의 흥미와 관심, 그리고 기대도가 따라 높아져 있기도 하다. 유형화된 신과 그에 대한 체계화된 신앙행위는 일절 없지만, 그 개념만큼은 내게 깊이 자리해 있다. 차설. 이번에는 어떠한 신의 비유가, 혹은 신 개념이 등장할까, 기대를 무척이나 했더랬다.

 

 

 

어머니, 모성이라는 이름의 신화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본 극을 쌍둥이 자매의 가정사로 읽는다, 조금은 기괴한 형태의. 그만큼 내 감수성이 단조로운 것일지도 모른다. 모든 연극을 사실 극의 관점으로 읽는 것에는 무리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연극이 몸으로 밀고 나아가는 장면 장면들을 통해서는 선형으로 이어지는 서사가 형성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서사가 지향하는 바와 표출되는 형태에 따라 극의 유형은 나누어진다. 개인적으로는 극을 볼 때 가장 우선적으로 두 개의 유형, 사실적인 연극과 비현실적인 연극으로 나누어보곤 하는데, 이것은 사실을 사실로써 믿게 하는 힘, 리얼리티와 핍진성에 달려 있다. 본 극은 후자로 해석한다.

 

십 수 년간 연락이 닿지 않은 어머니와의 조우, 그녀에게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녀는 아무런 해후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서 그녀의 가여운 두 딸들에게 곧잘 시련을 내렸다. '시련', 강한 목적성과 의무감을 수반하는 것에 있어서는 임무와도 유사하지만, 시련에는 필연적으로 고난이 수반된다. 그리고 그 고난이란 목적에 의해 지탱되고 감내되며, 동시에 목적의식을 더욱 고취시키는 역할을 수행한다. 목적의식을 시험하고 시험에 통과한 이에게 더욱 맹렬한 의식을 고취시키는 것으로서의 고난이다.

 

그녀는 두 딸들에게 시련을 내렸다. 살인이라는 시련, 친족살해라는 더욱 커다란 시련을. 그리고 그 시련 길 위에 놓인 고난은 죄책감이다. 전 존재가 뒤흔들릴만한 정도의 죄책감, 필연적 동기나 맹렬한 적의 등이 생략된 살인 행위의 앞에서 인간이 겪게 될 정신적 고통은 그녀가 내린 시련에 뒤따르는 고난이다. 딸들은 마지막 목적지인 아버지에게로 가닿는 길 위에서, 조우하는 모든 인간을 죽인다. 아버지의 옛 변호사와 새 아내와 새로 낳은 쌍둥이 형제와 아버지까지. 그 모두를 돌로 쳐죽인다. 돌로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커다란 함의를 가지는 행위, 그 막대한 잔인성으로 말미암아 살인자의 인간성을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행위이며, 결과적으로 인간성을 아주 잃거나 파멸하게 만드는 행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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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 어머니, 남편의 배신에 희생당한 어머니에게는 이 정도의 시련을 부여할 만큼의 권위와 정당성, 그리고 권력이 있는가? 이 근본적 질문에 대해 극은 어머니를 '신'의 반열에 위치시킴으로써 대답한다. "딸들에게 어머니는 신이니까." 아주 간편하게 처리해버렸다. 모성신화의 레퍼런스를 곧바로 차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 어머니가 모녀관계라는 아주 자그마한 세계 속에서 기꺼이 신의 위치에 대두되기 위해서는, 그를 지탱하는 아주 작으나마 신화들이 필요하다. 그리고 모성신화란, 주로 무조건적 희생이라는 미덕을 통해 그리어지는 이야기, 그를 통해 인정받는 정당성이다.

 

안타깝게도, 모성신화라는 클리셰의 결과 값만 차용한 모양이 되어 버렸다. 애초 모성신화가 신화로 불리는 까닭은, 무조건적 희생이라는 어머니라는 존재가 보여준 신성神性(이것이 어머니라는 사회적 존재의 의의를 특정 짓는 표현이 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해두고 싶다)이 인간 일반의 행동 양태를 아득히 뛰어넘어버리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이해할 수도 이해될 수도 없는 사건이나, 그 이면의 유인들에 대해 인간은 예부터 신적 속성을 부여해왔다.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두려움, 혹은 고통을 느끼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는 의미에서의 신이란, 이제 '이해가 필요치 않은 것'으로 지위를 달리한다. 그것은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의 집체로서의 세계인 인간의 세계, 그 피안 너머에 자리하기 때문이다. 물론, 피안 너머의 순수 개념을 다시금 또 이해하고 납득해야만 하는 인간들에게는 신의 상징과 권위, 절대성이라는 각주가 필요하게 된다.

 

여하간, 모성신화는 내 어머니의 부르튼 손을 떠올리며 각자 경외감을 가지고 불러보는 자기 어머니의 이름이다. 즉, 지극히 개인적인 경외라는 것이다. 그 희생, 그 이면의 마음들을 이해치 못함에 너무도 고통스러운 나머지 불러보는 참회 어린 찬미이다. 연극 속 두 딸에게는 이러한 어머니 신화가 있었던가. 그러한 서사는 부재했을뿐더러, 그 서사가 함의될만한 배경 또한 부재하다. 그러므로 이제 '어머니는 신이니까'라는 그 말은 신앙적 배경과 철학이 부재한, 그들만의 이야기가 되어버린다. 그러니까 하나의 사건이 아닌, 극적 전제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녀들에게는 어머니가 신이구나'와 같은, 공감성이 결여된 하나의 사실로 극 속에 자리하게 된다.

 

 

 

딸들의 신앙행위



안타깝게도 딸들의 개인적 동기 속에는 무차별적 살인이라는 야만적 행위를 스스로 불러일으킬 만한 강력한 적의가 없다. 고로 이 행위, 돌로 사람을 잔인하게 살해하는 행위는 그녀들의 맹목적 신앙행위, 광신狂信으로 읽힌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돌로 쳐죽이게 만들 정도의 강력한 동기를, 죄책감이라는 거대한 정신적 형벌을 물리치고 발을 내딛게 할만큼의 강력한 동기를 찾아볼 수 없으니, 신앙심에 그 연유를 두어보게 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두 딸들은 이 시련과 그 끝의 목적을 성취해냄으로써 어머니 신에 대한 맹목적 신앙심을 세상에 증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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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딸이 어머니의 부름을 받아 어머니가 내린 시련을 곧잘 받드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여러 고난과 딜레마를 겪으면서도 훌륭히 그녀의 명을 따르고 완수하는 것. 이것은 신앙행위의 메타포이다. 어머니는 창조주이시며, 피조물인 두 딸은 그녀를 받든다. 이 과정에는 개연성이라는 것이 생략되어 있었다. 인간의 많은 정신적 행위 중 가장 심오하고도 불가사의한 것이 신앙 행위인 까닭이 바로 이것일 테다. 개연성이 생략된다는 것.

 

기독교의 여러 일화들은 이러한 신앙행위의 구성을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이해를 위해 기독교 신앙행위와의 비교론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본 극 속 신앙의 구성이 가지는 한 가지 공백은 발견된다. 창조주의 권위를 인간에게 각인시키고, 나아가 받들게 하기 위해서는 형벌이 필요하다는 점. 창조주를 따르지 않음으로써 야기되는 거대한 형벌, 피할 수 없는 형벌이 그들에게는 필요하다. 인간의 내면에 창조주의 개념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과 그보다 더 나아가 그를 받들게 만드는 것에는 차이가 있기에. 딸들에게 어머니가 창조주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과 그 창조주의 명이 무엇이든 이행하게끔 만드는 것 사이에는 커다란 틈새가 있다. 전자는 전제이고 그 전제가 후자로 자연스레 이행되기 위해서는 약속되고 공표된 형벌이 필요하다.

 

아이아나의 내적 갈등 위에 러신이 뱉어본 말, '신이 곧 죽으니까'라는 이유는 그러므로 공허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다. 단순 필멸자 어머니에 대한 연민으로 두 딸들의 광신행위를 납득해보기에는 너무도 커다란 공백이 존재한다. 마지막 가능성은 유년시절 동안 부재했던 어머니에 대한 커다란 그리움과 사랑 정도가 되겠는데, 글쎄, 늘 생각해온 바이지만, 내리사랑의 역은 존재치 않는 것만 같다. 예를 들어보자면, 자식에 대한 복수로서 어머니가 행하는 무조건적 살인과 그 역은 최소한의 비교가 가능한 대등한 항으로써 내 안에 대두될 수가 없다는 말이다. 내리사랑, 즉 모성이 신화화될 수 있었던 것에는 초월성, 인과로부터의 초월이 있었다지만, 그 역에는 이러한 초월성이 자리할 공간이 없다고, 개인적으로는 생각해온 것이다.

 

나아가, 자식의 손에 피를 묻히고 자신의 복수를 대행하게 하는 어머니, 그런 신이라니. 기독교의 신은 '대속자'로써 그 사랑을 증명하고 그의 부모됨을 선보였지만, 이 어머니 신에게서는 이기만을 엿본다. '나의 남은 날이 얼마 남지 않았잖니.' 그것이 딸 된 자들에게 살인을 권할 충분할 이유가 되지는 못할 터이다. 이쯤 되면 어머니를 함부로 신적 위치에 올려둔 바로 그 행위가 어머니를 악신으로 묘사케 했다는 슬픈 귀결에 가닿는다. 어찌 되었건 애처로운 신에 대한 순애보라는 방식의 이야기만으로 미화될 수는 없을 테다. 우리에겐 정의롭고 공명정대한 징벌이 허락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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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며



신에 대한 순애보와 정의로움 사이의 상관관계, 즉 광신의 선악에 대해서까지 논의를 진행시키자니 글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뻗어 나갈 것 같아 이쯤에서 글을 접는다. 결국, 본 극 안에서의 신 개념에는 공백이 많았다. 그것은 이 서사를 지탱하는 개념이었으나, 그것이 부분적으로나마 기능할 수 있었던 까닭은 신 개념이 대단히 모호한, 불투명한 안개와 베일에 싸여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아쉬운 점은 제목이 가지는 함축성과 상징성에 대한 기대가 응당 클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신에 대한 질문과 그 대답을 나는 극 안에서 발견하지 못한다. 이 극이 '신은 어머니이다'라는 이야기가 될 수는 결코 없을 것이다. 위에서 이야기했듯, 필자가 바라본 극 중 신은 굳이 따지면 악신에 가깝기 때문이다. '악신도 신이다'라는 이야기를 반박하자면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할 테니 각설하겠다.

 

만약 초월성을 담지할 수 없었던 딸들의 그 신앙행위, 이것이 핵심 주제의식이었다면, 그것이 증명되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것들이 필요했을 것이다. 앞서 밝혔듯, 신화화된 내리사랑, 그것에 대등한 정도의 역이 아직까지의 삶과 일화 속에서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 굳이 따지자면 공자孔子 정도가 있겠다.

 

이상과 같이 극의 핵심 제재이자 서사의 주 동력원인 '어머니 신'에 집중하여 극을 톺아보았다. 지나치게 신화화된 모성은 사람들의 무의식 속에 스미어 불문율로 작용하게 되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지만, 한 명의 어머니 신을 가진 사람된 입장으로서는 이 이상 불경한 말을 뱉을 수도 없는 노릇이겠다. 모성신화 속 선신善神에 완벽한 대척을 이루지는 않지만, 특이하게 설정된 어느 어머니 신의 서사를 통해서, 미루며 벼루던 모성 신화에 대한 개인적인 정리를 마친다.

 

 

[서상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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