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어느 주말 오후의 상념

시험 끝난 대학생의 한가로운 주말.
글 입력 2022.04.23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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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니 해가 중천에 떠 있다.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새들의 지저귐 소리. 어딜 그리 바삐 가는지 모를 오토바이의 엔진 소리. 주말마다 찾아오는 건어물 트럭에서 나오는 정겨운 아저씨의 목소리. 눈을 뜨거나 감는 것에 상관없이 들려오는 한가로운 주말 오후의 멜로디. 안 그래도 눈꺼풀이 무거우니, 다시 눈을 감는다. 그저 세상의 소리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인다.

 

언제 쌀쌀했냐는 듯 태양이 내리쬐는 날이다. 분명 어젯밤 확인했던 일기예보에는 비가 올 확률이 높다고 했던 것 같은데. 침대와 합체하기 일보 직전의 몸을 겨우 끌어내려 눈을 반쯤 감은 채로 화장실로 가 몸을 씻는다. 잠을 겨우 물리치고 집 안을 살펴보니, 이건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인가, 사람이 살았었던 집인가 헷갈리기 시작한다. 테이블, 책장, 바닥 여기저기 미처 숨지 못한 먼지들이 나를 맞이한다.

 

창문을 활짝 열고 청소를 한다. 본가에서 가져온 진공청소기는 고장 난 지 오래이기에 신발장 한구석에 있는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이용한다. 에이. 이렇게 맑을 줄 알았으면 어젯밤 빨래를 돌려놓는 건데. 하며 혼자 궁시렁(이러면서도 성실히 세탁기를 돌린다) 거린다. "오늘 교동의 최고기온은 27도에요." AI 스피커에게 오늘의 날씨를 물으니 친절히 알려준다. 저런. 아직 에어컨 필터는 청소하지 않았는데. 더 더워지기 전에 바로 행동에 옮긴다.

 

1시가 넘어서야 집 밖으로 나온다. 딱히 어떤 목적이 있어서 나온 건 아니지만서도. 뭐라도 해야지 하면서 나오게 되더라. 오늘은 영화를 볼 생각이다. 아직 뭘 볼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가서 정하련다. 아, 최근 몸무게가 줄면서 바지들이 전부 너무 커졌다. 세탁소에 들러 수선도 맡겨야 한다.

 

시험이 끝난 주말 오후는 이렇듯 나른하다. 한가롭다. 하릴없다. 정처없다. 할 일이 모두 끝난 건 아니고, 그저 시험이란 비교적 큰일이 마무리되었을 뿐인데. 다른 일들은 머릿속에서 일단 지워낸다. 고생했잖아, 고생했어 나. 우선은 쉬자. 밀린 잠도 실컷 자보자. 뭐가 되었든 영화관을 가보자. 먹고 싶던 음식을 먹어보자. 날도 좋은데 소양댐으로 드라이브를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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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에게 있어 벚꽃의 꽃말은 중간고사다. 그 아름답고 유려한 벚꽃이 활짝 피는 시기에 대학생들은 밤을 지새운다. 겨우 시험이 끝난 후 조금이나마 남아있는 꽃들을 구경하러 밖에 나가보니 온통 푸르른 녹음이다. 이래도 되는 거냐고. 그래도 겨우내 앙상한 가지만을 내보이던 자연이 멋들어지게 녹색 옷을 차려입은 걸 보면 마음이 퍽 안정된다. 그래, 내년에 보지 뭐. 내년이 안되면 내후년에 보면 되는 거지. 꽃이 올해만 필쏘냐.

 

대학에 들어온 나이, 스물하나. 지금 나의 나이, 스물일곱. 그간 치러온 12번의 시험들과 그 주말. 그리고 13번째 시험을 치른 후의 주말 오후. 크게 바뀌었으려나? 하긴, 바뀌긴 한 듯하다. 동기들은 졸업했고, 직장인이 되었다. 그때엔 없었던 스쿠터가 나에겐 있다. 딱 오늘과 내일, 토요일과 일요일까지 여유를 즐기고 나면 나는 다시 자격증과, 이력서와, 기타 여러 가지 일들을 준비하겠지.

 

어차피 이 시간이 지나면 해야 할 것들이다. 지금 그것들을 생각하던, 생각하지 않던. 나이를 표시하는 숫자가 올라갈수록 생각을 내려놓게 된다. 고민해서 해결될 것이 아니라면 고민하지 않게 된다. 나와 직접적으로 연결된 중요한 일이 아니라면 가볍게 지나가게 된다. 감정이 메말라가는 것인지,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정신이 방벽을 치는 것인지 알 길은 없지만, 퍽 싫진 않은 변화 같다고 종종 생각한다.

 

벚꽃은 지고 시험은 끝이 났다. 벚꽃은 다시 필 것이고, 시험 또한 다시 다가올 것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우로보로스. 한가로운 주말 오후는 또다시 찾아올 것이다. 정신없는 주중 또한 마찬가지. 앞으로 다가올 모든 일들을 지금 전부 대비하려다가는 몸이 먼저 나가떨어진다. 실제로도 비슷하게 번아웃이 여러 차례 오기도 했었고 말이다. 일 하나가 끝났다면, 우선멈춤, 쉼표를 찍는다.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도 아니다. 1보 전진을 위한 숨 고르기. 후퇴하진 않는다.

 

나른하고 정처없고 하릴없고 한가로운 어느 주말 오후. 그런 날 어떤 아무개의 일상 이야기. 이야기 속 상념들.

 

한가로운 주말 오후. 몇 시간만 있으면 해가 진다. 그래도, 해는 내일 다시 뜰 태니까. :D

 

 

[최원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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