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그는 너무도 외로워 때로 뒷걸음질로 걸었다. 자기 앞에 찍힌 발자국을 보려고. [영화]

무인도에 갇힌 남자, 영화 <캐스트 어웨이>
글 입력 2022.04.22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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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줄거리를 비롯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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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인정사정없이 우리를 지배하죠.

마치 불과 같이 사람을 파괴하거나 따뜻하게 덥혀주죠.

그래서 모든 페덱스 사무실에는 시계가 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우린 시계에 의해 죽고 살기 때문이죠.

우리는 절대로 시계를 등 돌리지 않아요.

그리고 우린 결코 시간 가는 걸 잊어버리는 죄를 범해선 안 돼요.”

 

 

물류회사 FedEx의 현장 관리직원 척 놀랜드는 시간에 미친 남자다. 시간을 돈으로 환산하고, 아래 직원들을 갈구는 데에도 스스럼없다. 가능한 한 빠르게 많은 일을 하자, 그의 신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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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중요성을 일장 연설하던 그는 ‘시간 가는 걸 잊어버리는’ 공간에 떨어지게 된다. 모종의 사고로 무인도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약혼을 기약한 켈리와의 오붓한 시간을 포기한 채 몸을 실은 쿠알라룸푸르 행 화물 여객선은 폭파되었고, 척은 노란 구명보트에 간신히 매달려 생존하지만 무인도에 갇힌다.

 

나뭇잎에 고인 물 마시기, 돌을 부딪쳐 날카롭게 만든 뒤 열매 깨기, 작살 던지기… 비행기와 버스를 타고, 휴대폰으로 정신없이 연락받으며 세계 곳곳으로 신속 정확하게 소포를 배송하던 그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문명의 초기화. 그는 이곳에서 태초 인류로 돌아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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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명보트를 타고 드넓은 바다를 건너는 위험도 감행해보지만, 거대한 파도에 보트는 구멍이 뚫리고, 척은 산호초에 찔려 상처를 입는다. 유일한 탈출 수단과 체력은 모두 바닥났다. 완벽히 고립된 그는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야만 한다.


 

 

Help, Anybody? Here! Please.



간절히 내뱉던 짤막한 문장은 거센 파도 소리에 묻혔다. 이곳은 무인도. 그를 도와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구원은 제 몫이다. 척은 빠르게 현실을 인지한다.

 

척은 더 이상 모래사장에 HELP를 적지 않는다. 그는 매일의 의식주를 해결하는 데에 집중한다. 여자친구에게 시계를 선물 받을 정도로, 시계에 의해 죽고 산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 정도로 시간에 집착하던 그는 물리적으로 시간의 흐름을 감지할 수 없는 곳에서 오로지 자신의 감각으로 시간을 가늠한다.

 

그의 시간은 때맞춰 배를 채우고, 거처를 꾸리는 데에 소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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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여객선 추락 당시 함께 떨어진 소포들을 뜯는다. 비디오테이프와 이혼 합의서, ‘조니’에게 보내는 생일 카드와 윌슨 AVP 배구공, 피겨스케이팅화, 화려한 호피 무늬 원피스. 날개 무늬가 새겨진 마지막 소포를 뜯으려던 척은 이내 박스를 고이 간직한다.

 

언젠간 이 소포를 직접 전달하리라. 투철한 직업의식에서 나왔다기보다, 확실한 목표가 필요해서라고 느꼈다. 날씨와 시간, 파도의 높이와 당장의 음식. 그가 서 있는 땅은 불확실한 것투성이다. 이런 곳에서 그는 ‘확실함’이 절실해보였다. 그가 생활하는 동굴 곳곳에는 그가 그린 날개 무늬가 새겨진다. 무인도를 나가고 말겠다는 生의 의지가 드러난다.

 

무려 4년이 흘렀다.

 

무인도 Lv. 100에 도달한 척은 자연인과 같은 모습에, 작살로 단박에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그는 무인도를 탈출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척은 파도에 밀려온 화장실 문짝을 돛으로 세우고, 밧줄을 꼬아 뗏목을 만든다. 미풍이 부는 최상의 날짜를 고른 척의 항해는 비로소 시작되었다.

 

고래와 눈을 마주치는 공포와 드센 폭풍우를 견딘 그는 마침내 증기를 내뿜는 거대한 여객선을 마주하고, 구조된다!

 

 

그 사막에서 그는

너무도 외로워

때로는 뒷걸음질로 걸었다.

자기 앞에 찍힌 발자국을 보려고


오르텅스 블루, <사막>

 

 

척은 아무도 없는 섬에 고립된 1500일간 서서히 닳아갔다. 처음 외딴섬에 표류돼 SOS를 요청했지만, 처참히 실패한 이후, 그는 묵묵히 삶을 꾸려나갔다. 영화에서 척은 인생의 고저를 전부 겪지만, 그의 감정이 격동적으로 그려진 것은 고작 세 번이다. 이때 그의 곁엔 늘 윌슨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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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도에서 가장 필요한 불을 피우기 위해 부싯돌을 만들던 그는 손을 다친다. 잉크처럼 번지는 피는 도화선이 되고, 그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다.

 

비행기 추락부터 무인도의 고립까지 모든 것은 너무나 갑자기, 너무나 확연하게 일어났다. 놀라고 슬퍼할 새도 없이 새로운 삶을 일궈야만 했던 척. 피범벅이 된 손을 보던 그는 끝내 참았던 감정을 표출한다. 눈물과 고통, 답답함과 두려움이 한 데 뒤섞여 그는 소리를 지르며 주변의 모든 것을 집어던진다. 그의 손에 잡힌 배구공엔 피 칠갑 된 그의 손바닥 자국이 묻는다. 그 유명한 ‘윌슨’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그는 분노를 가라앉힌 뒤, 이내 배구공을 ‘윌슨’이라고 부르며 친근히 대한다. 버팀목이 생긴 것이다. 사무치게 고독한 곳에서 척은 윌슨과 대화하며 시간을 보낸다.  오르텅스 블루의 <사막>에서 ‘그’의 뒷걸음질과 같은 이유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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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타인을 통해 나를 규정하고, 이해한다. 윌슨의 존재는 척을 척으로 존재하게 하는 타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배구공을 친구로 삼은 척의 행동은 아무도 없는 땅에서 점차 희미해지는 자신의 존재를 선명하게 하고자 하는 본능 아니었을까.

 

또한, 윌슨의 존재는 타자인 동시에 척 놀랜드, 자기 자신이다.

 

항해를 위한 뗏목의 밧줄을 꼬던 척은 울컥 감정이 치솟아 윌슨을 발로 차 내버린다. 남은 인생을 망할 배구공과 말하며 보낼 순 없다고. 그러나 그는 곧장 자리를 박치고 뛰어나가 윌슨을 애타게 찾는다.

 

바위틈에 처박힌 윌슨을 찾아온 그는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며 윌슨을 소중히 끌어안는다. 그리곤 미안함을 표현 하려는 양, 제 손등을 찔러 낸 피로 윌슨의 연지곤지를 조심스레 찍어 바르는 광기 어린 모습도 보여준다. 비정상적인 행동이나, 그가 4년간 겪은 외로움을 생각하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척은 윌슨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너를 알아.

너 괜찮은 거지?

괜찮아? 좋아.


아직 안 잤어?

나도 그래.

무서워?

나도 그래.

 


윌슨은 척의 내면을 꺼내는 도구다. 어쩌면 그의 내밀한 자아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그는 ‘나는 너를 알아. 괜찮아? 좋아.’와 같은 자기 암시적 말을 되뇐다. 항해 전날, 설렘과 두려움에 잠 못 이루며 뒤척일 때도 ‘무서워? 나도 그래.’라며 솔직한 속내를 비친다. 윌슨은 ‘무인도 생활’을 위해 척이 만들어낸 또 다른 자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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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바다 한 가운데에서 폭풍우와 비바람을 맞으며 앞으로 나아간다. 여러 번의 폭풍우를 견딘 뗏목은 잔뜩 헐거워졌고, 뱃머리로 걸쳐둔 윌슨은 떨어져 나간다. 척은 윌슨을 잡으려 하지만, 살기 위해선 윌슨을 포기해야만 한다. 결국 윌슨은 저 멀리 떠내려간다. 바람과 파도에 부서진 뗏목에 누운 척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통곡한다.

 

윌슨은 척이 무인도의 생활을 위해 만들어낸 자아다. 그렇기에 무인도의 생활을 끝내기 위해선, 반드시 윌슨을 보내야만 한다. 윌슨과 작별해야 비로소 고립과 표류가 끝났음을 알리는 방점을 찍을 수 있다. 생존을 위해 만들고, 생존을 위해 보내야만 하는 상황. 더럽게 얄궂다.

 

윌슨은 잃은 척은 끝내 실의에 빠져 노를 바다에 버리고, 삶을 포기한 채 눈을 감고 눕지만, 바다 한 가운데서 커다란 여객선에 발견된다. 한때 그는 모래사장에 커다란 글자를 써 도움을 요청했지만 어떤 구원의 빛도 그에겐 곁을 내주지 않았다. 그러나 生의 의지를 상실한 지금, 살게 된다.

 

 


 

 

인생은 얄궂다. 진리와도 같다. 켈리를 생각하며 4년을 버텨 망망대해를 헤치고 문명의 세계에 복귀했지만, 켈리는 척의 치과 주치의와 결혼해 가정을 꾸리고 있었다. 척과 켈리는 여전히 서로를 사랑하고 있음을 확인하지만, 결국 척은 켈리를 밀어낸다.

 

 

내가 통제할 수 있었던 유일한 건

언제 어떻게 그리고 어디서 죽는 건지 정하는 것이었어

그래서 난 밧줄을 만들었어

꼭대기에 올라가서 스스로 목을 매려고 했어

하지만 시험해 보고 있었어

물론 알겠지, 나를 알잖아

결국 내 무게 때문에 나뭇가지가 부러졌어

그래서 내가 원하던 방법으로 자살도 할 수 없었어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그때, 마치 따뜻한 담요 같은 느낌이 나를 덮어왔지

나는 왜 그런지 모르게 살아 있어야 한다는 걸 알았어

왜 그런지 모르게 나는 계속 숨을 쉬어야 했어

아무 희망도 없었지만 말이야

나는 살아있었고 난 계속 숨을 쉬어야 해

그리고 난 지금 여기에 있어

누가 알겠어, 조류가 뭘 가져다줄지 말이야

 

- 척 놀랜드

 


통제할 수 있었던 유일한 것조차 뜻대로 되지 않았다. 척은 죽기 위한 다른 방법을 찾는 것 대신, 목숨을 끊기 위한 밧줄을 엮어 항해를 위한 뗏목을 만들었다. 미치광이처럼 배구공에 혼잣말을 퍼부었던 것도, 마지막 하나의 소포를 뜯지 않은 것도 결국 살기 위함이었다. 그는 계속 숨을 쉬어야만 했고, 마침내 죽고자 했을 때도 살 수 있었다.

 

누가 알았겠는가. 아무도 없는 땅에 버려질 줄은. 그 척박한 땅에서 항해를 준비해 결국 탈출할 줄은. 영원할 줄 알았던 사랑이 저물 줄은. 날개 소포를 배송하리라는 것을.

 

 

[권수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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