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거지가 꿈이야?

가성비와 가심비 사이 어느 지점
글 입력 2022.04.18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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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 다시 회사가 되었다. 단축된 출퇴근 거리와 칼퇴의 나날이 나를 조금 다른 일상으로 이끌어 주리라 생각했지만, 전에 다녔던 곳에 재입사라 긴장감 제로, 익숙한 출근길 버스 안에서 퇴근을 생각하는 익숙한 과거를 반복하고 있다.


대책 없이 뛰쳐나온 퇴사였고 겁도 없이 덜컥 적금도 들어놔서 쪼들리는 생활을 했다. 돈이 없는 날 백수 생활은 처음이었기에 이곳저곳 나눠놨던 돈을 야금야금 까먹으면서 불안을 느끼곤 했다. 갈 곳 없어 보이는 구직사이트, 한정된 잔고 그리고 때 되면 빠져나가는 고정 지출들. 나이와 경력, 허술한 이력서에서 피어나는 노후대비의 불안감의 기저에는 하잘것 없는 잔고가 있었다. 걱정에 잠을 설치기를 여러 번, 현대 사회인들의 꿈인 돈 많은 백수를 꿈꾸며 잠에 들었다.


입사일은 조금 애매하게 월의 마지막 주였다. 며칠 분의 월급을 받을 것이냐 4월로 미룰 것이냐의 갈림길에서 나는 한 번이라도 기분이 좋으려고 후자를 선택했다. 관리부에서 일단 알아보고 알려준다고 했고 후자로 결정이 되었는데 문득 겨울에 찾아간 점쟁이의 말이 생각났다. 4~5월쯤에 회사에 들어갈 거라던 희망적인 이야기. 정말 4월부터 월급을 받게 되었다.


신용카드 결제일을 1일부터 말일까지의 사용 금액을 청구하는 14일로 설정해서 살고 있기 때문에 3월에는 취업의 기쁨을 터뜨리는 대신 철저한 체크카드와 은행 계좌 간편결제라는 철저한 잔고 중심의 생활을 지속했다. 그리고 월급을 수령한 내가 카드값을 내게 되는 시기가 도래했고 고삐는 풀어졌다. 아무도 나를 막을 순 없으셈.

 


월급을 받아서 하고 싶은 거요? 소비입니다.

 

월급.PNG


그렇다. 나는 지극히 소비 지향적인 사람이었다. 소비 요정으로 활약하면서 주변의 소비를 부추기고 간이 작다는 이유로 소소한 소비로 잔고를 탕진해오던 게 내 삶이었다. 일상에 과감한 소비라고는 필라테스 n개월 이용권뿐인 남기는 것 없는 건강하지 못한 소비가 곧 내 일상이고 삶이다.


월요일에는 화장품을 사고 화요일에는 저녁으로 샌드위치를 사 먹고 수요일에는 문걸이 행거를 사고 목요일에는 사탕을 사고 금요일에는 쿠키를 사고 커피를 쏘고 토요일에는 일어나자마자 은반지를 사고 일요일에는 과자를 사먹는데 사용한 돈 총 20만원. 여기에 병원비와 약값과 점심값 추가하면 금액은 더 커진다. 그런데도 이번 주는 얌전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가계부 앱이 알려주는 이 달의 지출은 잔여 할부금 5만원 포함 총 66만 5849원이니까.


그렇지만 딸이 돈을 버는데 어머니 드시라고 국내산 재료로 만든 반찬을 주문할 수도 있는 거고, 달달한 간식을 찾게 되는 직장인 책상 서랍에 설탕이 들어가지 않은 자일리톨 사탕을 구비해둘 수 있는 일이고 나란히 놓인 간식거리 중 사탕수수 설탕을 사용한 건조 망고에 손이 갈 수도 있지 않을까?

 

*

 

매일같이 이어지는 소비에 위기감을 느끼면서도 사고 싶은 목록은 해치우지 못하고 있는 전형적인 비 계획적 소비, 투자도 없고 남는 것도 아닌 단순 소비. 이렇게 살 건 아니지만 이렇게 살고 싶기도 했다. 한 달 예산 얼마, 하루에 사용할 금액 얼마 정해두는 긴축재정은 나름의 재미도 있고 미미하지만 뿌듯함도 있는데 한계가 주는 답답함을 견디기는 쉽지 않다. 원하는 것과 필요한 것보다 가격을 먼저 보는 일은 재미가 없었다. 그래서 가격이 아니라 내가 보려는 것이 보이는 소비를 하고 싶었다.

 

애초에 플렉스도 욜로도 내 것은 아니니 소소한 소비에 신경 쓰지 않고 싶었다. 이제 내 잔고는 그 정도에 타격 입지 않을 수 있으니까. 포괄임금제라 매일같이 야근하고도 수당 못 받고 탈탈 털리다가 스트레스성 소비하는 직장인에서 야근수당 있는 회사에서 정시퇴근하면서 소소하게 간식 사먹는 삶으로 전향했으니까.


거지가 될 용기가 없어서 오늘도 내일도 다음 주도 다음 달도 착실하게 가성비와 가심비 사이에서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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