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공각기동대, '인간다움'에 대한 고민 [영화]

글 입력 2022.04.15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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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만화를 원작으로 제작된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Ghost in the shell)>(1995)는 인간의 뇌와 컴퓨터가 상호 연결되는 ‘전뇌화’ 기술의 발달로 인간과 기술의 경계가 모호해진 근미래를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관객들에게 인간, 기계, 생명, 기억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들을 던지며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영화 <매트릭스>, <제 5 원소> 등의 작품의 원형이 된 SF 애니메이션의 걸작으로 꼽힌다. <공각기동대>가 제기하는 인간의 기억과 그에 기반한 자아 정체성의 문제는 애니메이션이 개봉했던 당시보다 인공지능의 비약적인 발전을 경험하고 있는 오늘날 더욱 큰 무게를 지니고 다가온다.


‘공각기동대’는 테러 진압을 주 임무로 하는 특수부대이다. 서기 2029년, 인간이 네트워크와 자유롭게 연결될 수 있는 시대에 정체불명의 해커 ‘인형사’가 등장한다. 인형사는 사람들을 마치 인형처럼 조종한다는 뜻에서 붙은 별명으로, 작품 내에서 네트워크의 정보를 빼낼 뿐만 아니라 인간의 뇌에 가짜 기억을 심어 조종하기까지 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공각기동대의 부대원인 주인공 ‘쿠사나기’와 동료들은 인형사를 잡기 위한 수사를 진행 하던 중, ‘공안 6과’의 비밀 프로그램이었던 인형사의 네트워크 안에서 자율적으로 생존하고 통제가 불가능한 인격이 생겨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인형사는 스스로를 ‘살아있는 상태’로 규정하고, 뇌의 일부를 제외한 전신 이 사이보그인 주인공 쿠사나기와의 융합을 통해 진정한 생명체로 거듭나고자 한다. 전신 사이보그로서 끊임없이 자기 존재에 대한 의심과 회의를 거듭하던 쿠사나기는 결국 인형사와 융합하고, 인형사와 쿠사나기는 마침내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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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다움'에 대한 고민


 

인간과 기술의 경계가 모호해진 가운데, 인간의 존재와 실존에 대해 <공각기동대>가 던지는 철학적인 물음은 주인공 쿠사나기와 인형사를 통해 은유된다. 뇌의 일부만을 제외하고 전신이 의체로 만들어진 쿠사나기 소령과 정보의 흐름 속에서 스스로를 자각하며 탄생한 인형사는 서로를 거울에 비친 양 닮아있는 점이 많다. ‘(인간의) 유전자도 자기보존을 위한 프로그램에 불과하며, 생명 역시 정보의 흐름 속에 생긴 결정체’라고 주장하는 작중 인형사의 대사는 오랜 세월 공고히 지켜져 왔던 인간의 고유함, 이성의 순수함에 큰 일렁임을 만든다.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이성적으로 사유하고, 정보를 기억함으로써 살아가는 것이 인간 존재의 본질이라면, 오늘날 우리는 어디까지 인간으로 규정하고 어디부터 인간 아닌 존재로 선을 그어야 하는 것일까?

 

앞서 인간을 기계와 다르지 않은 존재라 칭했던 인형사의 대사가 끝난 뒤, “말도 안 돼! 네 놈이 생명체라는 증거는 없어.”라고 외치는 외교성 직원의 말이 이어졌다. 아직까지 그 누구도 제대로 정의하지 못한 인간 존재와 생명에 대한 불투명한 정의 앞에서, 인간인 외교성 직원이 인형사에게 외칠 수 있는 말은 그 정도뿐이다. 필자 역시 마찬가지다. 작중의 인물들이 그러하듯, 필자도 영화를 보는 내내 인형사가 생명체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만한 이유를 즉각 떠올리기 쉽지 않았다.

 

결국 쿠사나기와 인형사가 융합해 전능한 존재로 거듭나게 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보다 보면, 결국 <공각기동대>는 0과 1로 치환되어가는 디지털 세상 속에서 ‘인간다움’을 정의하려는 노력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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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한편으로, 필자는 스스로를 생명체라 단언하는 인형사를 보며 쉬이 입을 떼지는 못할지언정 여전히 마음속 어딘가에서 피어오르는 불편함 내지는 불쾌감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대사를 통해 직접 언급되었을 만큼 서로를 꼭 닮은 쿠사나기와 인형사를 보면서도 어째서인지 그 둘을 동일선상에 두기는 어려웠다. 쿠사나기와 인형사 모두 같은 ‘껍데기(shell)’를 뒤집어쓰고 있었음에도, 쿠사나기는 생명체처럼, 인형사는 여전히 기계처럼 느껴졌던 이유는 무엇일까?

 

필자가 쿠사나기와 인형사에게서 느꼈던 결정적인 차이는 두 인물의 태도에서 비롯되고 있었다. 인형사는 스스로의 존재를 정의함에 있어 망설임이 없었다는 점에서 역설적이게도 인간으로 느껴지지 않았고, 쿠사나기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의심하고 고뇌하는 지점에서 더없이 인간적으로 다가왔다.

 

필자는 글의 서두에서 <공각기동대>의 감독이 이 작품을 통해 ‘인간다움’의 무의미함을 논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영화가 끝난 뒤 그 내용과 감상을 찬찬히 복기하는 과정에서, 결국 쿠사나기와 인형사에 비추어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를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있는 필자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몸에 기초한 삶


 

<공각기동대>가 던진 인간과 기계, 생명과 존재에 대한 거대한 물음 앞에서 고민을 거듭한 끝에, 필자는 다시금 처음으로, 즉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되돌아왔다. 다만 이번에는 새로운 관점에서 질문을 풀어나가 보려고 한다.

 

이 장에서는 글의 서두에서 던진 질문, 즉 ‘논리와 사유와 기억에 기초해 살아가는 것이 인간 존재의 본질이라면, 우리는 어디까지 인간으로 규정하고 어디부터를 기계로 정의해야 할 것인가?’의 물음을 다시 소환한다. 앞선 논의들을 통해 위의 질문에 제대로 답할 수 없었다면, 혹 질문의 전제가 잘못되었던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해 인간과 네트워크가 혼재하는 세상 속에서 ‘인간다움’을 규정하고자 할 때, 논리적으로 사유하고 기억하는 능력은 더 이상 인간다움을 정의하는 데에 있어 무용한 가치가 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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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에 대한 고민을 마주한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까지도 가장 먼저 떠올릴 말 중 하나는 아마 근대 철학자 데카르트의 명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일 것이다. 데카르트의 이 유명한 명제는 17세기 이래 근대의 진리 기준이 다름 아닌 ‘인간의 이성’이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근대인들은 이성적 방법으로 진리를 추구해왔는데, 이때의 이성적 진리는 수학적이고 논리적인 것, 다른 어떤 것보다도 명석 판명한 것이었다. 일말의 오차 없는 전자두뇌와 흠 없이 아름답고 강한 의체를 가지고 살아가는 <공각기동대> 속 인물들은 근대인들이 꿈꾸던 가장 이상적인 인간상과 일견 겹치는 듯하다.


한편 근대의 인류가 그와 같은 순수하고 명징한 이성의 영역을 지켜내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작동시키고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분리’와 ‘정화’의 과정이었다.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인 모든 것들을 누락시킨 뒤 지켜낸 단 하나의 이상적인 인간상은 단적으로 ‘효율적이고 계산적인 인간’이었다.

 

불필요한 낭비나 소모적인 일을 하지 않고, 나에게 주어지는 이익을 계산하도록 부추겼다. 사회학자 베버는 이러한 근대의 사회정신에 대해 “더 철저하게 공직 업무에서 계산을 벗어나는 사랑, 증오, 모든 순수한 개인적, 비이성적, 감정적 요소를 모두 제거할수록 더 완전하게 발전한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근대적인 인간은 사랑할 필요도, 증오하고 분노할 여유도 없었다. 모두 에너지 낭비이며 시간 낭비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인류는 이와 같은 가치관을 바탕으로 자본과 기계문명의 비약적인 발전을 일구어낼 수 있었으며, 그 과정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인류가 풍요로운 삶을 영위해 올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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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그와 같은 기조로 우리의 삶이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음을 지적하는 목소리들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공각기동대>가 20여 년 전부터 경고해왔듯이, 사고하고 계산하고 기억할 수 있는 인간의 지적 능력은 인공지능의 가공할 위력 앞에서 무력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고도로 발달한 인공지능을 마주하게 된 지금, 그 앞에 선 인간은 위축될 수밖에 없는가? 꼭 그렇지만은 않다. 인간의 ‘몸’ 안에는 논리와 이성이 아니더라도 무수한 영능이 살아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셀 수 없이 많은 인형사들의 틈바구니에 치이며 점차 발 디딜 곳을 잃어가는 현대인들은 이제 스스로의 존재를 새롭게 정의내려야 할 상황에 놓였다. 이를 위해 필요한 작업은 바로 지금까지의 이성적 주체와 다른 새로운 인간상을 그려보는 것이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의 명제는 오늘날의 인류를 정의하기에 불충분하다. 이제는 이성이 아닌 다른 능력에 주목해야 할 때다. 즉 근대의 이분법적 사고틀 안에서 늘 정신보다 열등한 것으로 취급되어왔던 것, 바로 ‘몸’에 기초하여 생각하는 ‘정동적 사유’가 필요하다.

 

*


<공각기동대>의 부제 ‘Ghost in the shell’을 통해서도 보여지듯이 영화 속에서의 ‘몸’은 사유할 줄 모르는 물질적인 덩어리, 의식을 둘러싸고 있는 ‘껍데기’로만 묘사되었다. 하지만 인간의 몸은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사건의 장이다. 어떠한 논리적 사고도, 이성적 사유도 몸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영화 내내 언급되는 ‘고스트’가 무엇이든, 그것은 결국 몸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이고 운동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몸을 기초로 살아가는 정동적 주체는 끊임없이 성찰한다. 내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어떤 감정과 감각들이 모이고 있는지, 그것들이 모여 어떤 가치관이 만들어지고 있는지, 그렇게 형성된 가치관이 어떤 행동으로 이어지는지를 면밀하게 살핀다. 이처럼 몸에 기초해 살아가는 태도가 확장되었을 때, 우리는 각자의 몸에서 비롯한 각자의 생각, 각자의 시각과 각자의 삶을 인정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이 0과 1의 데이터로 치환되어 가는 사회 속에서 인간이 수축하고 움츠러드는 대신, 나의 삶과 생명력을 더욱 활발하게 약동시키며 살아갈 수 있는 길이라 믿는다. 그때가 되면 인간은 더 이상 ‘인간다움’을 애써 주장하지 않더라도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불안해하지 않고, 수많은 인간 아닌 존재들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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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거운 기계 팔다리를 하고도 물속 깊숙이 잠수해 “두려움, 불안, 고독, 어둠, 그리고 희망”을 느낀다고 이야기하던 쿠사나기를 떠올리며 글을 마친다. 의체 깊숙한 곳 어딘가 남아있는 진짜 ‘몸’이 있었기에 쿠사나기는 인형사와 다를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 한 줌 남은 몸의 존재를 잊지 않는다면 쿠사나기는 앞으로도 쿠사나기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최지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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