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한 사람의 인생 이야기, 뮤지컬 '스메르쟈코프'

글 입력 2022.04.14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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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메르쟈코프] 메인포스터.jpg

 

 

<스메르쟈코프>. 발음하기도 어려운 제목이다. 역시나 어려운 내용을 가지고 있다. 더군다나 뮤지컬 <브라더스까라마조프>와 이어지는 스핀오프 작품이다. 앞선 뮤지컬을 관람하지 못한 필자에게는 너무나도 복잡하고 모호한 뮤지컬이었다. 빠른 템포에 스토리 라인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했고, 겹치는 내용들에 감탄하지도 못하였다.

 

하지만 누가 누구인지, 무슨 느낌을 전달하고자 하는지 완벽히 이해하지 못했음에도, 작은 울림이 있었다. 단지 한 사람의 인생 이야기 정도로 다가왔더라도, 그 자체로 의미 있었다. – 따라서 이 글은 필자의 단순한 생각, 그리고 뮤지컬을 보며 생각났던 비슷한 맥락의 다른 작품들을 중심으로 작성하였다. 극의 정확한 해석이 아닐 가능성이 다분하다는 뜻이다.

 

 

아버지라 여겨지는 표도르를 살해한 후, 며칠 간의 긴 발작을 시작한 스메르쟈코프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 속에서 긴 여행을 시작한다. 표도르의 제안으로 시작한 모스크바 요리학교부터 학비를 벌기 위해 일하던 공동묘지까지. 산 자를 자백하게 만드는 고문기술자로부터 죽은 자의 고백을 들어주는 조시마 장로까지. 수많은 시공간을 넘나들며 꿈인지 사실인지 모를 만남을 이어나간다.

 

그 만남 속에서 그는 하나씩 깨달음을 얻어나간다. 자신의 이름, 태어난 의미, 그리고 살아가야 하는 이유까지.

          

- 뮤지컬 <스메르쟈코프> 시놉시스

 


1. “이름이 있다는 건 태어났다는 증거니까” ; 자신의 이름

 

스메르쟈코프는 이름을 중시한다. 자신의 이름뿐 아니라, 죽은 자들의 이름, 만나는 이들의 이름에 집중하려는 것 같다. 그리고 ‘이름이 있음’을 ‘살아있음의 증거’로서 받아들인다.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고, 그 이름의 뜻을 생각해낼 때 비로소 자신의 존재이유를 찾는 듯하다.

 

‘스메르쟈코프’의 이름은 ‘수증기’의 뜻을 가진다. 올라갈 수도, 내려갈 수도 있는 수증기. 한없이 뜨거워질 수도, 차가워질 수도 있는 수증기 말이다. 무엇이든 될 수 있음을 상징한다. 뮤지컬의 뒷부분에서는 자신의 이름인 ‘스메르쟈코프; 수증기’의 내용을 담은 넘버를 부르며 비로소 자기 자신을 받아들인다.

 

비슷한 내용을 책 <자기 앞의 生(로맹 가리 작)>에서 읽은 바 있다.

 

 
모모는 말한다. '내가 이렇게 할아버지를 부른 것은 그를 사랑하고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아직 있다는 것, 그리고 그에게 이런 이름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주기 위해서였다'라고.
 

 

이름을 가진다는 것, 그리고 누군가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고 나도 그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 그것이 인간이 가장 쉽고 근본적으로 느낄 수 있는 사랑이자, 삶의 존재 증거 아닐까.

 


2. “내가 태어날 때 누군가 웃었을까” ; 태어난 의미

 

‘탄생’이라는 키워드로 생각해본다면, 극 중 ‘악마의 탄생’에 대해 말하던 장면이 생각난다. 뮤지컬 <스메르쟈코프>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 끊임없이 해체하고자 한다. 신과 악마, 빛과 어둠, 그리고 삶과 죽음까지도 말이다. 스메르는 계속하여 자신의 존재의미를 묻는다. 유난히도 죽음 혹은 신에 관련된 사람을 많이 만나게 된 스메르는 신의 존재이유에 대해서도 의심을 가진 듯하다.

 

그는 ‘신이 모든 것의 창조주라면, 나도 만들었을까? 그렇다면 신이 악마도 창조했는가? 악마가 있어야 비로소 신이 더 빛나니까? 마치 죽음이 있어야 삶이 의미를 지니는 것처럼? 그럼 악마가 없다면 신도 의미가 없는가? 그렇다면 내가 신을 섬긴다는 것은 악마의 존재 또한 인정하는 것인 것? 신을 섬김과 동시에 악마를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의 흐름의 대사를 한다.

 

죽음들을 마주하며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고, 어둠을 봄으로써 빛이 있음을 깨닫고, 악마가 있음을 인식하여 신의 존재의미를 찾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결국 우리 모두는 결국에는 죽음을 마주하기 때문에 지금 살아있는 것이 의미가 있다. 뮤지컬이 끝나고 잠시 음악감독님과 인터뷰 할 기회가 있었다. 그는 뮤지컬 <스메르쟈코프>의 흐름이 마치 ‘죽음을 마주한 후 스치는 회고록’의 느낌이라 설명하셨다. 스메르쟈코프 역시 죽음을 인식한 후에야 자신의 탄생 의미를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데미안(헤르만 헤세 작)>에서도 비슷한 내용을 찾을 수 있다.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의 결합’이라는 말이 내 안에 울림을 주고 있었다. 연결고리가 있었다. 오래전, 데미안과 우정이 시작되었던 시기에 나눈 대화로 어느덧 친숙해진 생각이었다. 당시 데미안은 우리가 숭배하는 하느님이 우리가 마음대로 나누어 놓은 세상의 절반에 불과하다며 (공식적으로 허락된 ‘밝은 세상’ 말이다.) 우리는 세상 전체를 숭배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었다. 그러려면 신이면서 동시에 악마이기도 한 신을 섬기든가, 하느님을 향한 예배와 악마를 위한 예배를 동시에 드려야 한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여기 이 아브락사스는 하느님이면서 동시에 악마인 존재라는 것이다.
 


3. “나의 빛은 어느 어둠에 있을까” ; 살아가야 하는 이유

 

스메르쟈코프는 극 중 끊임없이 ‘발작’한다. 이것이 자신의 존재이유를 위해 처절하게 고민하는 모습으로 보였다. 뮤지컬의 말미에는 모든 등장인물이 함께 ‘발작’ 넘버를 부른다. 모두 저마다의 고뇌로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이다. 삶의 질을 평가할 수는 없다. 어떠한 삶은 ‘좋은’지, 혹은 ‘나쁜’지는 의미 없다. 각자가 처절한 투쟁을 할 뿐이다. – 그리고 이러한 고통은 모두 밀알로 변할 것이다.

 

뮤지컬 <스메르쟈코프>에는 총 3명의 스메르가 등장한다. 한 인물임에도 세 명의 배우가 연기한 것이 매우 인상깊었다. 그리고 이들은 복잡한 인간의 자아를 잘 표현하고 있다고 느꼈다. 한 명의 사람 안에는 매우 많은 인격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함께 삶을 견뎌낸다.

 

극이 진행되며 스메르의 감정들이 점점 고조된다. 처음과 끝에 동일한 넘버를 부르지만 느껴지는 감정선은 전혀 다르다. 음악감독님께서도 이를 의도하셨다고 하신다. 자신의 존재 이유, 삶의 의미를 깨달은 마지막의 스메르는 처음 등장했던 스메르와는 아예 다른 사람일지도 모른다. 자신에게 영향을 주었던 아버지, 형, 학교, 장로님 등 여러 사람을 만나며 점점 자신의 삶을 기억하고 깨닫는다. 또한 ‘엄마’라는 넘버를 부르며 전에 느끼지 못했던 섬세하고 깊은 감정으로 요동치는 모습도 보인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 물음을 던지는 스메르에게서 또 다른 처절한 투쟁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윤영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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