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우울은 오랫동안 잔향으로 남아.

라벤더 향기
글 입력 2022.04.10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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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일이다.

 

핸드폰이 울렸다. 하루 한 번씩은 꼭 나를 찾아주는 친한 친구의 전화였다. 늘 그렇듯 우리는 별것 아닌 일들, 예를 들면 어제 엄마가 약속을 안 지켰네, 고양이가 옷장에 들어가 옷 위에다가 오줌을 쌌네 마네 하는 그런 시시한 소식들로 몇 시간 동안이나 이러쿵저러쿵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핸드폰이 반쯤 열을 받아 귀가 뜨거워졌을 때쯤 친구가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

 

- 내가 오늘 인스타에서 뭘 봤는데 자기 친구가 갑자기 자살을 했다는 글이더라고. 그 친구가 항상 자기는 30살까지만 살 거라고 말했다고 하는데…그냥 그거 읽으니까 네 생각이 나더라. 너도 30살까지만 살 거라고 했잖아.

 

- 뭐 내가 서른 살에 죽을까 봐?

  

- 아니, 그냥. 혹시나 해서 그러지.

 

친구가 무엇을 읽고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 글은 일전에 이미 읽었던 글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애써 모른 척 웃어넘기고 대화 화제를 바꿔 버렸다. 굳이 괜한 걱정을 더해주고 싶지는 않았다.

 

*


30살까지만 살 거다. 과거엔 종종 입에 달고 다녔던 말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해왔던 말이니 그리 역사가 짧지는 않다. 그때는 친구로부터 서른 살에 살아있으면 죽여버리겠다는 무서운 협박 아닌 협박도 들어봤고, 엄마에게 말했을 때는 ‘나도 그랬어’라는 답변을 받았다. 이상하게도 엄마의 말을 듣고 나니 <나의 수명>에 대한 거창한 계획은 순식간에 아무렇지 않은 일이 되어버렸다. 다들 그런 건가? 이런 생각은 흔한 생각인 것인가?

 

그리고 그 글을 발견했다. 서른 살에 자살한 친구에 관한 글에는 댓글이 달려 있었다. 그 친구 마음속에는 깊은 우울이 있었을 거라는 뉘앙스의 댓글이었다. 누군가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없음에 안타까움이 일었다. 어쩌면 그는 서른이 되기까지 오랜 시간 동안 누군가 자신을 알아봐 주기를 바랐을 지도 모른다.

 

돌이켜보면 고등학교 1학년 17살부터 스물이 조금 넘어가는 나이까지 내가 세운 계획은 서른 살까지 살기가 전부였다. 그럼 그때까지 뭘 하고 싶었느냐 묻는다면 그마저도 답변이 어렵다. 그냥 인생 되는대로 사는 거지 딱히 거창할 게 뭐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뿐이었다.

 

*

 

우울이란 단어를 딱 이렇다 정의 내리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굳이 말하자면 ‘긍정’과 ‘부정’에 속하는 단어들을 나열해 보라고 하였을 때, 긍정적인 단어들에 비해 부정의 개념을 담은 단어들이 머릿속을 월등히 많이 차지하고 있는 느낌이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인지라 예전과 달라져버린 나로서는 이제 그 감각과 느낌조차 희미하다. 친구가 다시 전화를 걸어와 이전처럼 나를 걱정 해준다면 아마도 난 그게 언제 적 일이냐며 웃어넘길 것이다. 이제는 취업을 걱정하고, 건강을 걱정하고, 서른 너머의 일어날 일들을 걱정하며 살아간다. 무언가를 걱정한다는 건 나름대로의 긍정적 신호이다. 이제 더 이상 스스로 인생의 마침표를 찍을 생각은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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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우울이란 감정의 씨앗은 한 번 뿌리를 내리고 나면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잡초와 같아서 과거와는 너무나도 달라져버린 지금일지라도 나는 여전히 그 태동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은 내 마음 한 편에 남아 지금까지도 자리하고 있다. 마치 미확인 바이러스에 전염됐지만 증상이 발현되지 않은 영화 주인공처럼 다른 이들에겐 들키지 않을, 스스로만 자각할 수 있는 존재가 몸 깊은 곳에 살아있다.

 

어쩌면 이건 더 이상 빼어내야 될 돌멩이가 아닌, 어느새 나와 결합되어 버린 모래가 아닐까. 다들 이 정도는 갖고 살지 않을까. 크기가 커지지만 않는다면 안고 살아가도 되지 않을까. 그래도 되지 않을까. 그렇게 홀로 되뇐다.

 

*

 

언니가 방에 피워 뒀던 향초를 끈다. 향초는 더 이상 자신을 태워 녹이며 향을 발산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한 라벤더 향기가 방을 나와 거실까지 날아든다. 내 슬픔도 한줄기 향초처럼 다 타버리고 사라진 줄 알았는데, 마치 언니가 피웠다 끈 라벤더 향초처럼 우울은 그렇게 오랫동안 잔향으로 남아있나 보다.

 

 

[강현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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