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주체적이고 진솔한 사랑을 위한 돌직구의 향연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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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랑에 대한 인식이나 정의가 점차 바뀌는 추세다. 이는 연애를 주제로 하는 예능의 변천사에서도 드러나는 바다. 이전에는 <짝>과 <하트 시그널> 등 상대방과 연애로 발전하기 전의 단계를 보여주다가 최종선택을 하는, 안전하고 안정적인 사랑의 전형을 보였다. 그러나 요즘은 <환승 연애>를 포함한 <체인지 데이즈> 등의 예능이 판을 친다. 더욱 자유롭고 다이나믹하며 틀에 매이지 않는 경향성이 짙어진 것이다.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비단 누군가를 현실에서만 만날 수 있는 게 아니라, 각종 SNS나 앱을 통해서도 기꺼이 성사해내는 개방적인 분위기를 조성해냈다. 이는 MZ 세대를 거쳐 메타버스가 상용화되며 그 안에서 사람을 만나는 게 수월해진 시대적 흐름에서 기인한 것일지 모르겠다.
여기, 그 흐름에 편승하여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형식의 사랑을 추구하는 주인공 ‘함자영’이 있다. 함자영은 더는 연애를 하지 않기로 선언하는 한편 그저 욕구에만 충실해지려 한다. 데이트 앱을 깔아 사람을 만나며 가벼운 만남만을 이어가기로 한 것이다. 이후 함자영은 데이트 앱을 통해, 섹스 칼럼을 쓰려는 목적으로 데이트 앱을 설치한 '박우리'를 만난다. 영화는 이렇게 두 인물이 점차 감정을 쌓아가며 벌어지는 갈등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를 유쾌하게 그려낸다.
기존과는 다른 여성 캐릭터의 재현 방식
영화를 보며 인상 깊었던 것은 거침없고 직설적이며 통통 튀는 자영의 입담이었다. 자영은 성적 욕구를 드러내는 데 거리낌 없는 경향을 보인다. 욕정으로 가득했던 꿈에 대한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풀어내는 것은 기본이고, 데이트 앱에서 왜 자신을 선택했냐는 박우리의 물음에 “네가 그냥 제일 성병 안 걸린 애처럼 생겼던데?”라는 대답으로 받아치는 데서 그렇다.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기존의 영화에서 여성과 남성을 그려내는 방식에 대한 재현이 재고되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하여 한국 영화계에서 특정 성별을 재현할 때의 정형성을 타파하려는 시도들이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여전히 이러한 시도가 엿보이지 않는 경우도 다분하다. 그런 점에서 위와 같이 자영의 캐릭터가 성적 욕구를 가감 없이 드러내는 방식으로 재현되었다는 점은 기꺼이 그 정형성을 타파하는 시도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여기서 기존 영화에서 특정 성을 재현하는 방식을 언급해보고자 한다. 뿌리 깊은 가부장제의 영향 아래 사회적으로 여성에게 성적 욕망을 드러내는 일은 금기시된 것으로 상정되어 왔다. 그래서 기존 한국 영화의 여성 캐릭터들은 성적 욕망을 드러내는 데 다소 폐쇄적인 경향을 보였다. 반면 남성 캐릭터는 다소 거침없고 적극적이며 아무렇지 않게 성적 욕망을 표출하고 그것을 오히려 본능인 것으로 여기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일례로 영화 <스물>에서는 남성 세 명이 특정 여성을 두고 성적 발언을 서슴지 않고 유머로 소비하는 경향의 대화가 끊임없이 이어진 데 반해, 여성 캐릭터는 극 중 인물에게 성적 발언에 농락당하는 대상으로 등장한 데서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연애 빠진 로맨스에서는 이러한 기존의 재현 방식과는 다르다. 여성 캐릭터를 적극적으로 재현하는 것은 물론, 기존의 여성과 남성을 그려내는 방식을 전복시키는 양상을 보인다. 예를 들면 박우리가 “여자들은 감정 없으면 못 한다던데 진짜야?”라고 묻자 함자영은 “난 아닌데?”라고 받아치는 데서 그러하다. 기존의 로맨스 영화에서 여성들을 감정적이고 남성에게 의존하는 경향을 띠며, 사랑에 목맨 듯이 지고지순하고 수동적으로 그려낸 것과는 상반된다. 나아가 박우리가 “자영아 사랑해”라고 속삭이거나 손을 잡으려고 시도하자 도리어 자영이 거부하는 데서 역시 위와 같은 경향이 드러난다.
다른 요소들에서도 이처럼 변주된 재현 방식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본인 소속 회사에서 결혼을 앞둔 여성 상사에게 원나잇 상대로만 치부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바 있다. 이후 자영에게, “여자들은 왜 그래?”라고 묻는다. 이에 자영은 여자들은 원래 그렇다며, 줄곧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시선에서 분석한 말들만을 한다. 그러자 우리는 자영에게 위로할 줄 모르냐며, '여자들이랑은 대화가 안 된다'고 호소한다. 이러한 대화에서는, 특정 성을 두고 이성적이거나 감정적이라는 식으로 프레임화하는 데서 벗어나는 시도로 보인다. 여기서 자영이 할 말을 적극적이고 가감 없이 내뱉은 것은 정형성 타파를 통해 웃음을 자아낸 것은 물론, 현시대에서 제기되는 문제의식을 개선하여 재현했다는 점에서 영화를 신선하게 이끄는 데 일조했다.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 그러나 거듭되는 조연들의 공격
앞서 자영이 자신의 욕망을 직접 마주하며 진취적인 방식으로 극을 끌어간 것은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라는 모토를 실현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자영의 크나큰 포부와는 달리 스물아홉 자영을 둘러싼 사회의 현실은 너무도 각박하고 암담했다. 자영은 쌓아놓은 빚이 얼마인지를 거듭 언급하며, 이런 현실 속에서 연애하는 행위가 얼마나 사치인지를 토로한 바 있다. 이는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다는 뜻의 삼포 세대라는 신조어가 등장한 이 사회의 현실을 떠올리게 했다.
어디 이뿐인가. 친구 유미는 데이트 앱을 깔았다는 자영의 말에, “내년이면 서른인데 언제까지 중딩 따까리 같은 연애만 반복할 거냐”며, 본인처럼 좋은 짝을 만나지 않아 고생이라는 식의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자영은 분명 연애를 하고 싶지 않다고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더욱이 자영은 청년 지원 사업에 통과돼 팟캐스트에서의 활동을 앞둔 상황인데, 주변에서는 불안정함을 운운하며 혀를 끌끌 찬다. 요컨대 안정적인 직장을 갖고 이상적인 연애를 하는 것을 보편적으로 보는 이 사회에서, 자영은 줄곧 결격 사유를 지닌 결핍 덩어리로 상정되어온 것이다. 여기서 유미가 자영을 타박하고 자영에게 트라우마인 전 애인의 결혼 소식을 거듭 언급하는 것은, 자영을 자신보다 밑으로 놓으면서 우월의식을 느끼기 위한 심리가 기저에 있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영이 끊임없이 주체성을 찾으려는 과정에 놓인 것은 혹 사회의 억압에 대한 극심한 반동심리에서 기인한 것으로 볼 여지가 있지 않을까 싶다. 이는 근거 없는 추측은 아니다. 자영은 박우리와 함께 전 애인의 결혼식에 찾아가 한바탕 뒤엎은 다음에 "그동안 조연이라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서 도망쳤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라고 피력한 바 있다. 해당 발언은 언뜻 과거 기억에서 벗어난 데 대한 고마움을 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회에서 사랑은 어때야 한다는 어떤 틀을 규정하는 데 대한 반발심으로, 그간 감정에 솔직하지 못했던 자기 고백으로도 읽어낼 여지가 있다. 이는 박우리가 칼럼의 소재로 이용하기 위해 본인에게 접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친구들에게 애써 “나는 쟤도 저럴 줄 알았어.”라는 말을 한 것과 궤를 같이한다. 결국 그렇게 된 것은 본인 사랑의 실패가 아니며, 의도적으로 우리의 실체를 예상하고 밀어낸 것이라 애써 합리화하는 시도로 비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렇게 자영이 두꺼운 방어기제를 쌓아온 것은 '보편적인 것을 정상적인 것으로 여기며, 거기에 속하지 않으면 개인의 문제로 보는 이 사회의 문제'를 들여다보게 한다.
한편 함자영과 다르게, 박우리는 일종의 정통성에 갇혀 있는 인물이다. 원치 않는 난처한 상황에 부닥칠 때마다 본인은 고상한 문창과 출신임을 강조하거나, 잡지사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다른 층위에 있는 것으로 인식하는 데서 그러하다. 말하자면 함자영은 끊임없이 정상성을 탈피하고 해체하려는 데 반해, 박우리는 전통과 보편성을 안정되고 고결한 무언가로 인식하며 그 안에 안전하게 귀속되려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대립 양상을 보이는 셈이다. 이렇게 자영과 상반된 우리의 가치관은 자영이 심리적 갈등에 빠지게 하는 안타고니스트의 역할을 수행한다. 자영은 본인이 주인공인 삶을 추구하며 연애를 하고 싶지 않아 하지만, 우리는 기어이 연애하고 싶어하며 안정성을 도모하니 말이다.
윤리의식이 자아낸 딜레마와, 재현 방식 상의 결점
이쯤에서 박우리가 함자영에게 접근한 본래 목적 즉, 섹스 칼럼을 쓰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을 짚어보고자 한다. 작가라고 해서 온전히 상상에만 의존해 글을 쓰기는 어려울 수 있다. 글을 쓰는 과정에서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과정이 필연적으로 이루어지는데, 나 자신은 수많은 타인의 흔적과 기억과 숱한 말들로 이루어져 있으니 말이다. 이 과정에서 작가들은 고민에 빠진다. 그것들을 어디까지 글에 녹여낼 것이며, 얼마나 각색할 것인가. 그런데 박우리가 함자영과 겪었던 일을 그대로 적어낸 것처럼, 특정 대상을 소재로 소비하며 만천하에 올린다는 건 당연히도 심각한 윤리 문제를 야기한다. 물론 박우리는 대표의 강요에 의해 반강제로 시작한 것이며, 내내 발을 빼려고 시도하긴 했다. 그렇다고 글을 쓴 사실까지 부정할 수는 없다. 피해자는 명백히 존재하니 말이다.
박우리가 쏘아 올린 공은 자영 본인이 소재로 이용됐다는 것을 고통스러워하는 데서만 그치게 하지 않았다. 2차 가해를 낳는 것으로도 이어졌기 때문이다. 친구 유미는 칼럼을 읽은 뒤 자영에게 “네가 이렇게 말을 재밌게 했었나, 아니면 얘가 글을 잘 쓴 건가?”라는 손쉬운 발언을 하는가 하면, 댓글에서는 “(우리가 사과를 하는) 녹음 파일이 너무 절절하다. 용서하고 결혼하자.”라는 반응이 난무했다. 위 반응은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 한 채, 자영의 상황을 그저 쾌락을 위한 화젯거리로 소비하는 데서 기인한 것이다. 허구성을 담보한 장르의 예술에서 실제 인물을 소재로 이용하는 것이 얼마나 극심한 피해를 야기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여기서 작년 문단 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특정 사건이 떠오르기도 했다. 자전적 경향을 띠는 소설을 쓰는 작가 김봉곤이 실제 인물이 한 발언들을 가감 없이 등장 시켜 피해자가 난처함에 시달리며 논란이 된 사건 말이다. 당시의 파문만을 보더라도 이는 가볍게 여길 만한 사안이 아니다. 그러니 영화에서는 보다 조심스럽게, 이를 가볍게 여기는 것을 경계하며 그려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방식의 재현에 실패했다. 왜일까. 아래 기술해놓은 영화의 결말에 주목하길 바란다.
사건의 전말이 드러난 이후 박우리는 잡지사에서 해고를 당하고, 자영은 우리에게서 멀어진다. 그러나 자영을 잊지 못했던 박우리는 새해에 자영과 함께 평양냉면을 먹었던 추억을 떠올려 가게를 방문한다. 공교롭게도 자영 역시 그 타이밍에 우연히 가게를 방문하며 둘은 재회하게 된다. 이때 우리의 사과와 고백으로 둘은 연애에 골인하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돌연 급하게 마무리된 것만 같다는 느낌을 부정할 수 없었다. 여기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는데, 우선 해당 결말은 구조적 측면에서의 결점으로 남았다는 것이 그 첫번째다. 영화라는 장르의 특성상 클라이맥스 이후 돌연 둘은 멀어지지만 어떤 사건을 겪고 점차 갈등의 와해로 다시금 가까워져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은 생략된 채 바로 결말로 넘어가 버렸다. 이렇게 손쉬운 방식의 해결은 해당 사건이 그저 인물의 딜레마와 갈등 생성을 위해서만 달려온 소재로만 전락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치명적인 문제를 야기했다. 그 사건의 심각성을 논하는 것은 어느 정도 포기하고, 소재주의에 봉착했다는 이야기다.
또 다른 문제는 자영의 감정선이 부재하다는 것이다. 우리와 지속적 만남을 이어갈 당시 자영은 우리에게 흔들리면서도 애써 부정하고, 사랑한다는 우리의 말에 대답하지 않거나, 우리의 손을 잡지 않는 데서 갈팡질팡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런 그가 ‘보고 싶었다’는 박우리의 한 마디에 덥석 손을 잡을 수 있을까? 여기서 그간 쌓아온 자영의 캐릭터가 단번에 무너진 듯한 느낌을 받기도 했다. 영화는 자영의 주체성 찾기 프로젝트로 읽어낼 수 있다. 그러나 해당 결말은 자영이 그렇게 추구해왔던 목표와 욕구에 반하는 전개가 아닌가 싶다.
우리 역시, 반강제적으로 자영을 소재로 글을 썼다고 할지라도 어쨌거나 자영에게 극심한 잘못을 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자영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했다면 그렇게 과감히 고백을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물론 이러한 결말은 ‘로맨스는 무조건 해피엔딩으로 종결되어야 한다’는 한국 관객의 정서에 맞추어 대중성을 살리기 위해 적절히 합의를 본 결과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문제들이 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결국은 사랑, "사실 다들 외롭잖아"
위와 같은 치명적 맹점에도 불구, 영화는 로맨스 코미디물의 구조에 충실했다는 점에서 장점 역시 보유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앞서 필자는 사회 문제까지 파헤치며 다소 무겁게 풀어간 경향이 있다. 그러나 기실 이 이야기는 ‘사랑 이야기’라는 본질에 초점을 맞추어 본다. 술집에서 함자영이 박우리에게 왜 소설을 지금은 안 쓰냐고 묻자 박우리는, “좋아하는 소설가가 사랑해보지 않은 자는 소설을 쓸 수가 없다고 했는데, 그 말을 들은 다음부터 그냥 안 써지더라”라고 답한다. 거기에 자영은 이렇게 묻는다. “내가 소설 쓰게 해줄까?” 그러니까 사실 자영은 얼핏 사랑에 빠진 것 같으면서도 그러한 감정에 매몰되고 싶지 않아 하는 괴리 사이에서 외줄 타기를 해왔으리라 추측한다. 다음 장면에서 자영이 한 말에도 주목해본다.
“오늘 나한테 이상한 거 많이 물어봐 줘서 고마워. 나 솔직히 얘기가 너무 하고 싶었거든. 친구들을 만나도 다 솔직하진 못 하더라. 대화도 하고 섹스도 하고 그러려고 사랑하는 거 아니냐? 근데 그게 왜 그렇게 어렵냐. 우리 센 척 작작 하자. 사실 다들 외롭잖아. 여기 안 외로운 사람 있어?”
이는 박우리가 잠들고 나서야 용기 내어 내뱉은 말이었다. 여기서 "사실 다들 외롭잖아"라는 대사를 짚어본다. 끊임없이 부정해왔지만 사실 자영의 속내는 위와 같았던 것이다. 이러한 자영의 심리는 혹 진정으로 우리를 사랑하지 않은 게 아닌, 이상적인 연애라는 일종의 틀 안에 갇히는 것으로 귀결되지는 않는 한에서 사랑을 하고 싶었던 것으로 읽어낼 수 있을까? 요컨대 자영에게 사랑이라는 건 그 언젠가 전 애인에게 받은 상처를 반복하기 싫을지라도, 이상적인 연애를 프레임화하는 이 사회에 신물을 느끼더라도, 이 사람이라면 그 안에 기꺼이 뛰어들어도 좋겠다 싶은 마음이 아닐까 싶다. 한편 영화는 이러한 자영의 내레이션이 등장하며 마무리된다.
“이 영화가 연애 영화가 될 수 있을까? 그럼 뭐가 필요할까? 달달한 고백, 로맨틱한 키스? 그런 게 없더라도, 설령 우리가 헤어지더라도 나쁘지 않은 이야기였으면 좋겠다. 이건 우리만의 특별한 로맨스니까.”
이쯤에서 사랑 이야기가 끊임없이 재창되어도 계속해서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유를 생각해본다. 그건 사랑이라는 이름의 보편성으로 하나로 묶였을지라도, 각자의 사랑은 전부 ‘아’ 다르고 ‘어’ 다른 형태를 띤다는 점에서 명백히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앞서 필자는 위 결말이 자영이 추구해왔던 것과는 다르지 않냐는 의문을 제기한 바 있다. 다소 모순적이지만, 자영이 이렇게 독자적 사랑을 구축하며 본인의 욕망을 똑바로 마주했다는 측면에서는 주체성을 찾고자 하는 욕망 이루기에 성공한 것으로도 읽어낼 여지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해당 영화에 대한 평이 갈린 것이 사실이다. 누군가는 이를 솔직담백한 재밌는 영화로, 또 다른 누군가는 남는 게 없는 킬링타임 영화로 읽어냈다. 필자는 해당 영화에 다시금 돌아서서 재고해봐야 할 거리 역시 잦게 등장했다고 생각한다. 윤리적 측면에서 딜레마에 놓인 인물의 심리를 들춰냈다는 점에서 그러했다. 더불어 자영의 심리와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각종 사회 문제들을 전면에 노출하면서 이를 무겁지 않고 가볍고 자연스럽게 녹여냈다는 점 역시 긍정적으로 보고 싶다. 비록 빈틈과 결점들이 존재할지라도, 두 인물의 티키타카와 케미가 빛난 재치 있고 유쾌한 영화였음은 분명하다.
[추예솔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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