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나랑 같이 여행 갈래? - 눈을 뜻하는 수백 가지 단어들

'로리'와 함께하는 북극 여행
글 입력 2022.03.31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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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대 소녀 로리는 어느 날, 갑작스런 사고로 아빠를 떠나 보낸다. 로리는 북극 탐험가가 꿈이던 아빠를 대신해 그의 유골함을 가지고 홀로 북극 여행을 떠난다. (시놉시스 발췌)

 


첫 번째 발자국. 서재.

 

아빠의 장례식이 끝난 후, 로리는 유골함을 책상에 덩그러니 둘 수가 없어 마땅한 장소를 찾기 위해 서재로 간다. 서재에서 일기장을 발견하고 아빠가 내년에 자신과의 북극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대부분의 공연이 그렇듯, 무대에 모든 공간을 담을 수는 없다. 그렇지만 묘사를 통해 탐험가 포스터가 서재를 빼곡히 둘러싸고 있다는 것을 인지할 때, 서재의 분위기와 공간감이 살아난다. 포스터를 둘러보고 두꺼운 탐험기를 읽어보며 노트에 적힌 계획을 확인하는 로리는 마치 아빠와 함께 탐험 놀이를 하던 어릴 적으로 돌아간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로리는 아빠(유골함)와 함께 북극에 가야겠다고 결심한다.



두 번째 발자국. 트롬쇠.

 

북극은 한 군데가 아니다. 총 다섯 군데로, 모두 다른 곳에 있다.

 

지리적 북극, 자기적 (나침반으로 측정되는) 북극, 지자기적 (지구 자기장의 중심점) 북극, 접근불가 북극, 천구의 (연장된 지구 자전축이 천구와 만나는 상상의 지점) 북극.

 

사실상 갈 수 있는 북극은 '지리적 북극'이 유일하기에 로리는 지리적 북극으로 출발한다. 집에서 트롬쇠, 트롬쇠에서 스발바르까지 비행기를 두 번 타고, 스발바르부터 북극까지는 다른 수단을 통해 가야 한다. 트롬쇠에 도착한 로리는 박물관에서 탐험가들의 역사와 전시를 보고, 또래 친구들과 만나 파티를 간 후, 남자아이와 첫 성관계를 맺는다.

 

여기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은 이 이야기의 화자가 여성이자 청소년임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아무 생각 없이 엄마 카드를 들고 엄마 몰래 집을 나온 것, 박물관에서 여성 사냥꾼을 보며 학교에서 여성 위인들이 어떤 취급을 당하는지 말하는 것, 첫 관계 이후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자기처럼 천장을 보는 일을 겪었을지 생각하는 것, 스발바르행 비행기에서 중년 여성의 호의를 받으며 연쇄살인범은 대부분 남자니까 안심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까지.

 


세 번째 발자국. 스발바르.

 

앞서 언급된 중년 여성이자 북극 연구원인 프리다의 도움으로 로리는 안전한 곳에서 북극곰을 볼 날을 기다린다. 그러나 로리가 엄마 몰래 집을 나왔다는 사실을 알고, 프리다는 로리를 집에 보내려고 하며 이런 이야기를 한다.

 

슬플 때 무언가를 결심해서는 안 돼. 해봐서 알아.

 

그렇다. 로리는 단지 청소년이어서 미래를 생각하지 않은 결정을 한 것이 아니다. 갑작스러운 상실과 슬픔으로 인해 지나치게 빠른 결정을 내린 것이다. 로리는 극의 시작부터 계속해서 밝은 톤을 유지하지만 그 밝음 안의 상실과 슬픔은 함부로 헤아리기 어렵다. 결국 로리는 비행기를 타고 온 엄마와 재회하고 함께 북극에 가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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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발자국. 북극.

 

드디어 북극이다. 아무것도 없고 새햐안 북극.

 

로리와 엄마는 헬리콥터를 타고 북극으로 간다. 그 주변은 모두 얼음투성이다. 그 얼음 중 하나에 깃발이 꽂혀있다. 바로 저 곳이 북극이다.

 

탐험가들은 무엇을 위해 아무것도 없는 공허하고 허무한 곳을 찾으려 그렇게 수없이 목숨을 잃었을까. 북극은 정말로 새하얗기만 한, 얼음 덩어리만 가득한 곳일까? 그렇지 않다. 빙하에는 엄청나게 많은 구멍이 존재하고 그 속에 많은 생물들이 산다. 또, 탐험가들의 시체는 빙하 속에서 속눈썹까지도 유지되었다고 한다. 북극은 순환이 일어나는 곳이다.

 

북극을 본 로리와 엄마는 동시에 같은 생각을 한다. 그리고 창문을 열어 유골을 한 움큼씩 쥐고 창밖으로 뿌린다. 당연하게도, 헬리콥터의 거센 바람 때문에 유골은 바닥에 닿지 못하고 계속 위로, 위로, 위로 올라간다.

 

로리는 절망한다.

그러다가, 환호한다.

로리의 아빠는 '천구의 북극'에 도착한다.

 

 

마치며

 

눈을 뜻하는 수백 가지 단어가 있다는 건 거짓말이라고 한다. 그러나 북극의 눈을 보기 위해 로리가 지나온 아빠의 서재, 트롬쇠, 스발바르, 그리고 그 여정에서 만난 프리다와 다시 만난 엄마까지. 이 여정은 수백 가지 단어로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여성 청소년 화자의 1인극은 처음이었는데 로리가 혼자 재잘재잘 이야기하고 친구인 내가 그 여행기를 듣는 느낌이라 좋았다. 더하여, 아빠의 상실을 겪은 어린아이가 화자인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이라는 책을 추천받아 읽어 보았는데 '눈을 뜻하는 수백 가지 단어들'에서 상실과 회복을 다룬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면 읽어 보는 것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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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예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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