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게 자연스러운 - XXL레오타드 안나수이 손거울

글 입력 2022.03.24 12:56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연극 [XXL레오타드 안나수이 손거울]의 무대는 특이했다.

 

바닥을 제외한 3면이 아무런 색이나 문양이 없는 흰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벽 쪽에 거울, 의자, 철봉이나 책상같은 것이 밀착되어 정렬되어 있고, 가운데는 텅 빈 교실 바닥만이 덩그러니 자리했다. 특이하게 거울과 철봉은 형광색으로 빛났는데 각각 제목에 있는 'XXL 레오타드와 관련된 인물' - 거울, '안나수이 손거울과 관련된 인물' - 철봉으로 연극 제목을 강조한 것 같았다.

 

꽤나 단순하고 납작하게 다뤄지기도 하는 주제들이라 (취향, 퀴어, 청소년, 임대 아파트, 입시 등) 연극을 보기 전에 조금 걱정을 했지만 스토리도 완전히 예상한 방향으로는 흘러가지 않았고 빠른 전개와 함께 납득가는 인물상을 그려낸 연극이라 흥미로웠다. 러닝타임 없는 80분이 사실 그리 긴 시간은 아닌데도 많은 주제를 이야기에 녹여 자연스럽게 잘 풀어냈다는 느낌을 받았다.

 

 

xxl_poster_arko_370x520.jpg

 


주인공 준호는 몸에 딱 붙는 레오타드를 입는 걸 좋아하는 남학생이다. 관람 전 준호를 '세상의 핍박을 받는 소수자'나 '공격받는 안타까운 이들'같은 단순한 프레임을 씌운 채 평범하게 이야기가 전개될까봐 걱정했지만 (마치 흔한 학교폭력 예방교육 동영상 같이) 예상했던 것 보다 훨씬 입체적이고 자연스러운 인물로 그려졌다.

 

스토리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절정 부분에서 주인공 준호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개연성이 조금 부족하다고 느낄 수 있지만, 개인적으로 지금껏 쌓아왔던 감정선들이 개연성을 구축한 것 같아 너무 갑작스럽거나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연극을 볼 때는 인물 간의 관계와 벌어지는 사건들에 집중하다 보니 인지하지 못했지만 끝나고 생각해보니 극에서 학교폭력, 가정폭력, 학벌, 입시 등 대한민국 사회에서 꽤나 무겁게 다뤄지는 굵직한 주제들을 다룬 것 같았다. 이정도로 자연스럽게 스토리에 녹아들게 한 것에 대해 박수를 보내고 싶다.

 

 

 

무대 구성과 연출


 

배리어 프리(barrier-free)를 고려한 것 같아 인상적이었다. 시작 전 배우 분들이 '저는 00역을 맡은 XX이고, 오른쪽에 리본 머리핀을 하고 있으며 항상 단정한 차림의 AA의 여자친구입니다.' 라고 한 명씩 말을 하셨는데, 시각장애인 분들을 고려한 것 같았고 하얀 벽 뒤에 뜨는 실시간 자막은 청각장애인 분들을 고려한 듯 했다.

 

어디서 배리어 프리가 실현된 세상은 모두가 편하게 살기 좋은 세상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걸 실감할 수 있었다. 가끔 배우 분들의 말을 다 못 들었을 때 흰 벽을 보면 약 0.5초 뒤에 방금 했던 대사가 나오면서 놓친 대사를 다시 볼 수 있었다. 신선했다.

 

책자와 서치를 통해 보니 원래의 구성에서 새로운 시도를 한 참신한 무대 구성도 마음에 들었다. 조금은 하얀색 벽이라는 장점을 통해 조명을 더 써도 좋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조명도 적재적소에 잘 쓰였다고 느껴졌다. 연기를 마친 배우 분들이 무대에서 퇴장하지 않고 구석에 앉아 극에 동참하는 구성도 인상적이었다. 같이 호흡하고 유기적으로 이야기가 흘러가는 기분이 들어 더 좋았던 것 같다.

 

 

 

등장인물


 

극 중 주인공 준호와 희주를 포함한 모든 인물이 다양한 면을 가지고 있는 입체적인 인물이다. 러닝타임 80분의 연극에서 보여줄 수 있는, 최대한의 자연스러운 입체적인 인물상을 구축하려 노력한 것 같았다. 여기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완전한 선인도, 악인도 아니다.

 

예를 들어, 주인공 준호의 친구인 희관은 명문 아파트 (자이아파트)에 살지 않고 주변의 임대 아파트에 사는 성적 낮은 학생이라고 공공연하게 무시를 당한다. 이때 주인공 준호는 이에 가담하는 가해자의 위치에 있는 학생이다.

 

그러나 준호가 숨기는 비밀, 즉 레오타드를 입는 취향을 두고서는 그 위치가 뒤바뀐다. 희관은 레오타드를 입는 건 더럽다며 비하 발언을 거리낌없이 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어쩌면 자연스럽게도 희관은 처음부터 끝까지 준호의 친구였다. 그러나 마지막에 '준호 보고 잘 지내라고 전해주고... 레오타드는 입지 말라고 그래.'라며 준호를 위하지만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 밖에도 폭력은 안된다며 소리치지만 학교폭력을 저지른 아들이 있는 담임 선생님, 왕따를 당하지만 남의 비밀을 가지고 협박을 한 희주, 친구 사이를 중재하는 멋진 친구지만 웃음이 나올 정도로 굳센 신앙으로 남을 단정짓는 태우, 단정하고 성격좋은 여자친구지만 부모님의 압박에 시달려 일종의 강박을 보이는 민지가 모두가 극에서 의미있는 한 자리를 차지했다.

 

대사도 코로나, 오미크론 등 현 트렌드를 반영했으면서도 과하지 않게 잘 녹아냈다. 청소년으로서 청소년극을 보다보면 학생들의 말투나 행동들이 지나치게 '어른이 보는 청소년'인 것 같아 불편할 때도 있었는데, 극 중 고등학생인 등장인물들의 말투나 행동은 꽤나 자연스러웠다.

 

다만 한 가지,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극의 주인공은 레오타드를 입는 준호와 체대입시를 하는 희주로 두 명인데, 실질적인 주인공은 준호 한 명이라고 느껴졌다. 희주가 겪는 학교폭력, 민지와의 관계 등 상대적으로 얕게 다뤄진 이야기들은 그 내막이 뭘지 궁금하다.

 

민지는 희주가 자신이 가정폭력을 당했다는 헛소문을 퍼트렸다고 증오하던데, 민지의 옷차림, 그러니까 교복에 덧대입은 목폴라와 길게 신은 스타킹을 고려할 때 민지가 가정에서 폭력을 당한 건 맞다. 어찌된 일인지 좀 더 풀어줬어도 좋을 것 같다.

 

 

2009210643_R8T1WZvo_KakaoTalk_20220324_145516906_03.jpg

 


실제 무대 위 공간의 변화가 없고 몇 가지 소품들의 재배치와 조명 정도로만 모든 이야기를 표현했어야 했기에 쉽지 않았을 텐데 배우 분들이 연기를 잘 해주셔서 몰입할 수 있었다.

 

또 씬이 바뀔 때 자연스럽게 배우 분들이 구석에서 나오는 것으로 장면이 전환되었는데, 자칫하면 어색할 수도 있는 전환을 물흐르듯 연기하신 배우분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야기 상 체대 입시를 위해 턱걸이 자세를 오래 유지하며 긴 대사를 해야 하거나 근육질에 몸이 좋은 설정을 가진 인물을 연기하신 배우 분들이 얼마나 노력하셨을지.

 

무겁다고 느껴지는 주제를 자연스럽고 흥미롭게 다룬 연극이라는 생각이 든다.

 

주제 자체를 직접적으로 콕 찌른다기보단 부드럽게 누른다는 느낌이 강해서 보는 데에 부담스럽지 않았다. 이런 사회적인 메시지를 관객들에게 '가볍게 던진다'는 것 자체로 의미있는 연극이었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 직접적인 메시지를 마구 던져서 관객이 열심히 흡수하는 이야기보다는 관객 스스로가 생각을 하게 만들어서 의미있는 담론의 장을 만드는 이야기를 더 좋아해서 잘 맞았다.

 

이상 [연극 XXL레오타드 안나수이 손거울] 후기였다.

 



[이도원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3.18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