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함께'할 때 폭발하는 희열의 무대에서 춤을 추다 - XXL 레오타드 안나수이 손거울

글 입력 2022.03.24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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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디선가 본인이 동성애자는 아니지만, 치마를 입고 싶다고 생각했다는 글을 봤다. 남성 매장에 있는 옷은 약간의 차별성만 있을 뿐 거의 똑같아 단조롭다는 게 그 주장이었다. 물론 남자를 치마를 입는 행위를 두고 동성애를 하는 것으로 결부시키는 것 역시 어떤 편견을 읽어낼 수 있단 점에서 거슬리긴 했다. 그러나 이를 막론하고 해당 고민에 휩싸이게 된 원인에 주목해보고자 한다. 치마를 여성의 전유물처럼 보는, 경직된 사회 문화적 통념 말이다. 애초에 이런 시선이 없었다면 위와 같은 고민에서 자유로웠을 것이다. 이를 떠올리면 도리어 사회가 비정상적이고 야속하게만 느껴진다.
 
XXL 레오타드 안나수이 손거울에 등장하는 준호 역시 레오타드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낀다. 준호에게 레오타드는 바쁘고 고단한 수험생 생활 중 심신 안정을 주는 중요하고 소중한 무언가다. 그러나 준호는 위와 동일한 사유 때문에 그 사실을 자유로이 드러낼 수 없다. 만약 나를 나 자체로 봐주는 누군가와 손을 잡는다면 어떨까. 이 연극은 이처럼 연대할 때 폭발하는 시너지 효과를, 준호가 희주와 함께 호흡하고 맞추어가는 과정을 통해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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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기득권으로 강등되고 나서야 보이는 세계


본래 준호는 소위 인사이더의 위치를 점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키는 180cm에, 몸은 다부지며, 아주 잘생긴 외모를 가졌다'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것만 보아도 그렇다. 더욱이 고급 아파트인 ‘자이 아파트’에 거주하는 데다, 잘 사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스터디 모임에서도 중심부에 속해 있다. 이러한 준호는 자신과 다르게 임대 아파트에 사는 희관을 한심하게 여기며 비난하기 일쑤다. “게임을 할 거면 잘하기라도 하든가 그렇지도 않고 공부는 할 생각도 없다.” 이는 교육 기회의 측면에서 기득권의 위치를 점하는 준호가 얼마나 차별주의자적인 시선으로 사회를 바라보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준호가 비기득권의 위치로 전락하는 계기가 있다. 레오타드를 입고 찍은 사진이 SNS에 강제로 게시된 이후의 이야기다.

물론 레오타드를 입은 것이 준호라는 사실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준호는 주변 아이들이 ‘남자임에도 레오타드를 입었다’는 이유로 조롱하고 비난하는 것을 홀로 감내해야 했다. 준호는 앞서 기득권으로서 차별주의자적인 면모를 보였으나, 이 사건을 기점으로 그의 태도는 달라진다. 이전에는 아웃사이더인 희주를 욕했다. 그러나 이제는 “희주 그렇게 이상하진 않은 거 같아. 이상한 거치고는 조용하잖아”라며 두둔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비주류에 속한 이후 즉, 사회적으로 손해를 볼 위기에 처하고 나서야 비로소 사회에 깊이 내재한 불평등을 인식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셈이다.
 
 
 
불평등한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 아이들이 취한 투쟁 방식


연극에서는 비단 준호뿐만 아니라, 단지 분야를 달리하며 비주류에 속한 이들이 있음을 보여준다. 우선 희관은 임대 아파트에 산다는 이유로, 자이 아파트 소속 아이들의 스터디 모임에 낄 자격을 박탈당했다. 또 희주는 부모님의 이혼 이후로 성적도 낮아졌다는 데 결핍을 느끼며, 현재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 요컨대 학생들은 전부 학교라는 동일한 공간에서 생활하지만, '아파트'로 표상되는 사회적 위계가 존재하듯 다들 조금씩 소외되며 살아간다는 얘기다.
 
한편 아이들은 상대방을 시기하고 질투하며 상대방을 끌어내리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물론 이러한 방식이 도의적으로 옳지 않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사람은 원래 자기가 얻지 못한 게 있으면 자신이 노력해 올라가려고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끌어내리는 방식으로 수평을 맞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아이들의 행위가 여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아이들의 행위를 그저 악행으로 단정하고 넘길 수 있을까? 사회 문화적 맥락을 고려한다면 단순히 아이들을 비난하는 데에서만 그치기 어렵다. 이에 대한 이유로 신자유주의 이후의 사회를 언급해야 할 것 같다.

산업화 이후 많은 것을 생산해야 했던 국가는 신자유주의 아래 개인의 능력을 끌어올리기 위한 방법을 고안해냈다. 소위 ‘노오력’을 운운하며 어떤 결과에 대한 책임을 개인에게 지우는 현실은 여기서 탄생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의 문제는 사회에 뿌리 깊이 박혀 있는 구조적 문제를 무화시키고, 만약 실패한다면 개인에게 그 문제를 돌리게 한다. 근본적인 사회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봤을 때 아이들이 서로를 질투하고 끌어내리려는 것은 '자신이 노력해도 어쩔 수 없게 만드는 세상의 불평등'에 순응하지 않고 나름대로 시위하는 방식일 수도 있는 셈이다. 오히려 살아남고자 하는 욕망에서 기인한 생존 방식으로 볼 수도 있고 말이다.
 
 
 
다른 폭력과는 다소 층위가 다른, 퀴어를 향한 폭력


앞서 말했듯 학교 안에는 엄연한 불평등과 차별이 존재한다. 그러나 퀴어를 향한 폭력은 그 층위가 다르다. 준호와 희관이 다투었을 때를 떠올려본다. 준호가 "걔는 맞을 만했어요"라고 하자, 선생님은 폭력의 잔인성을 운운하며 준호를 다그쳤다. 그러자 준호로부터 돌아온 대답이 인상적이다. “그럼 다들 자꾸 차별하고 제 말도 안 들어주면 그땐 어떡하라고요!”
 
선생님이 그러했던 것처럼, 물리적인 폭력은 누구든 폭력임을 인지한다. 그러나 소수자를 향한 폭력의 경우는 다소 다르다. 아이들은 준호가 레오타드를 입는 행위를 보고 통상적으로 남자들이 하지 않는 것이라는 이유로 온갖 혐오와 조롱의 반응을 던졌다. 이는 엄연한 폭력이지만, 그 사실을 간과한 채 쉽사리 자행되는 셈이다. 준호가 처음 거울 앞에 서서 레오타드를 입고 포즈를 취할 때 객석에서 아, 하는 부정적인 탄식이 터져 나온 것만 보아도 이는 과언이 아닐 것이다. 대개 다수는 보편적이고 정상적이며, 소수의 것은 비정상적으로 여겨지는 이 사회의 암묵적인 룰에 따라 소수자를 향한 폭력은 그 잔인성이 간과된 채 잦게 벌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준호는 숱한 편견과 폭력에 시달리면서도 기꺼이 비주류에 있기를 자처했다. 물론 “너 그거 안 입고 버틸 수 있어?”라는 희주의 물음이 표상하듯, 준호의 행위는 선택이 아닌 불가항력적인 영역에 해당한다. 동성애를 비롯한 퀴어는 '고칠 수 있는 것'이라는 무지에서 비롯된 혐오 발언이 활개 치는 세상이니만큼 이러한 재현은 중요하게 여겨진다. 요컨대 커밍아웃 이후 다른 친구들이 지었던 표정처럼 이상하다고 치부할 게 아니라,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한 정체성 확립의 과정으로 바라봐야 한다.
 
희주 역시도 준호와 마찬가지로 끝내 비주류에 속하는 것을 택한다. 여기서 희주가 들고 다니는 안나수이 손거울이 중요한 메타포로 쓰인다. 안나수이 손거울은 민지가 생일 때마다 매번 부모님께 받는 선물이다. 하여 희주가 안나수이 손거울을 들고 다니며 계속 거울을 보는 행위는, 한때 막역했으나 지금은 급이 다른 민지를 닮고자 하는 욕망을 상징할 것이다. 그러나 희주는 끝내 손거울을 제 손으로 깨뜨린다. 기어이 주류에 예속되고자 하는 욕망에서 벗어나 비로소 자기 자신을 찾고자 한 것이다.
 
결말 부, 준호가 결국 교복을 찾는 걸 실패하고 레오타드만을 입고 수행평가를 치른다. 앞선 내용에서 체육 선생님은 전혀 호흡을 맞추지 않은 희주와 준호의 춤을 보고 '아주 최악의 팀워크를 보여줬다'고 한 바 있다. 그런데 레오타드를 입은 뒤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드러낸 준호는 비로소 자유로워진 듯했다. 어쩐지 이 파트에서 울컥하며 차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지난하게 차별에 시달렸던 준호가 연대의 과정을 통해 비로소 자유로워지고, 춤에 몰입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준호의 커밍아웃은 사회의 근본적인 위계와 고정관념을 타파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희주와의 연대가 준호에게 용기를 주었듯 자신의 결핍을 나눌 수 있는 대상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 사실 자체로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연대는 투쟁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준호는 커밍아웃 이후 전학을 가게 됐지만 그건 회피가 아닌, 어떤 페널티가 따르더라도 자신의 것을 잃지 않으려는 굳은 자세로 읽어낼 수 있듯 말이다. 여기서 희주가 체육교육과를 진학하기 위해 철봉에 오래 매달려야 했으나 빈번히 실패하자, 준호가 했던 말을 떠올려본다. “철봉 그거 별 거 아니야. 어떻게든 올라가.” 사회에 만연한 숱한 차별들에 대한 대항의 선언이자, 네 결핍과 함께하겠다는 연대 의지의 표명이었다.
 
 
 
사회적 불평등이 재생산되는 방식


한편 끝까지 기득권으로서의 면모를 유지하는 이들도 있다. 태우와 민지가 그러했다. 연극은 둘을 통해 사회의 한계를 보여주었다.

민지는 매년 생일마다 부모에게 안나수이 손거울을 받으며, '네 자리에 맞게 대접받으며 당당하게 살 것'을 가르침 받는 인물이다. 여기서 민지가 준호와의 교제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지를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민지는 레오타드 입은 남자의 사진이 준호임을 눈치챘을 때, 희주를 찾아가 그 사실을 숨겨달라고 요구한 바 있다. 여기서 민지가 그러한 부탁을 한 것은 준호의 입장을 헤아렸기 때문이 아니다. 그저, "변태의 여자친구로 남기 싫다"라는 게 그 이유였다. 요컨대 민지에게 친구와 애인은 맹목적으로 사랑하는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입지와 명예와 커리어를 살리고 가치를 제고하기 위한 일종의 수단으로 상정되는 셈이다. 기득권으로서의 면모를 톡톡히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태우 역시 기득권자로서, 순수한 의도로 타인을 깎아내리며 전혀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특성을 보인다. 더욱이 비주류에는 공감하지 못한다. "준호는 천주교 집안이고 세레명도 있으니 절대 동성애자가 될 수 없다"라고 역설한 데서 그 면모가 드러난다. 이는 소수자일 경우를 아예 염두에 두지 않음으로써 사회에 엄연히 존재하는 차이를 무화시키는 태도다. 그렇게 해야 자신이 속해 있는 세계에서 비주류 없는 평화롭고 이상적인 상태가 유지되기 때문일 것이다.
 
처음 연극을 감상했을 때 각기 결핍을 안고 살아가는 인물들과 다르게 둘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어쩐지 빈틈처럼 다가왔었다. 그러나 둘의 결말을 보고 이는 의도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준호가 커밍아웃한 이후 민지는 태우와 연애를 하게 되는 결말 말이다. 빈익빈 부익부 사회에서 기득권은 한없이 잘 살고 비기득권은 한없이 소외된다. 요컨대 이러한 사회에서 동등한 위치를 점하는 둘이 만나게 되는 것은 이 사회의 불평등 재생산 원리를 재현하는 셈이다. 이는 준호의 노력에도 불구, 사회에서 불평등이 완전히 소거되지 않고 대물림될 것이라는 염세적이고도 안타까운 현실을 투영하는 지점이다.
 
 
 
연출적 측면에서 바라본 연극


그렇다면 연출적 측면에서 연극을 바라본다면 어떨까. 연극의 도입, 등장인물들은 한 명씩 돌아가며 자기를 소개한다. 이때 필자는 누가 주연이고 누가 조연인지가 모호하다고 느꼈다. 처음 자신을 소개한 사람이 주연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다소 놀랐다. 여기서 주인공은 어느 한 명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서 있는 위치와 시선의 각도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주려는 의도는 아니었을까 싶다.
 
나아가 '배리어프리' 적인 연출이 눈에 들어오기도 했다. 대부분의 연극이 시작되기 전에 한국어로 안내 사항을 알리는 반면, 해당 연극에서는 영어로 먼저 소개했다는 사실이 그러했다. 연극이 실시된 곳은 한국이다. 그러나 모국어보다도 다른 나라 언어를 먼저 썼다는 것은 많은 이들이 감상 향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의도였을 테다. 자막으로 대사를 보여준 것 역시 마찬가지다. 연극의 향유 대상을 비장애인으로만 국한하지 않고 청각장애인들도 연극을 향유할 수 있게 하려는 의도가 함의되었으리라. 퀴어와 소수자에 대한 이야기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연극이니만큼 연출적 측면에서 역시 주제를 충실히 반영하려는 시도가 엿보였다.
 
한편 서사극과도 유사한 구조를 취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서사극은 독일의 극작가인 브레히트가 고안해낸 것으로, 관객들이 연극과 일정 거리를 유지하면서 서사 안에 온전한 몰입되는 것을 막는 연출 기법이다. 이는 일부러 상황을 설명하거나 자막을 사용하는 등의 방식을 통해 이루어진다. 해당 연극을 보는 관객들은 대사가 자막으로 전부 등장하는 것을 보면서 현재 연극을 보고 있다는 감각을 잃지 않았을 것이다. 하여 서사극의 목적처럼, 등장인물의 감정에 온전히 이입하기보단 이성적으로 상황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준호는 왜 저런 상황에 놓이게 됐으며, 사회에는 어떠한 문제가 내재되어 있는가와 같은 사안들을 말이다.

브레히트는 실제로 서사극에서 기독교를 비판하는 듯한 요소를 집어넣기도 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해당 연극에는 이와 유사하게, 태우가 천주교를 운운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러한 점에서도 브레히트의 서사극 계보를 잇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브레히트는 사회적 불평등을 주제로 연극을 올릴 때 신이 있었다면 그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을 것이며, 애초에 문제를 만들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문제의식 하에 그러한 내용을 넣은 것으로 안다. 물론 해당 연극에서는 준호가 절대 동성애자일 수가 없음을 역설하기 위한 증거로 이용했다. 그러나 서사극과 결부 시켜 본다면, '신으로 표방되는 절대적인 힘이나 진리에 대한 문제의식을 담아낸 것'으로 추측할 수도 있겠다.
 
 

 

누군가의 것이 아닌, 우리 모두의 이야기


이 연극은 준호, 그리고 준호와 연대하는 희주를 중심으로 하는 이야기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는 “배역의 비중이 크고 작음에 상관없이 배우 모두가 무대에 등장해 있는 것이 시각적으로 가장 큰 변화입니다”라는 연출가의 의도에서도 그렇고, '우리 모두는 연결되어 있다'는 연극의 명제에서도 시사되는 바다. 앞서 말했듯 우리는 각자 분야만 다를 뿐 서로 결핍들을 떠안고 사는 존재다. 게다가 평등은 특정 분야를 나와는 다르다는 식으로 소외시키고 변방으로 밀지 않는 태도에서 출발한다. 그러니 우리 모두가 마주해야 할 문제라는 차원에서 접근해봤으면 좋겠다. 연극 내 준호와 희주가 연대하고 춤을 추었을 때 시너지가 폭발했듯, 함께 한다는 감각을 잃지 않는다면 그 가치와 그로 인한 변화는 무궁무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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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예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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