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계속해서 대물림되는 사회 문제에 관한 이야기 [공연]

연극 <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 리뷰
글 입력 2022.03.23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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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은 각자 다른 이유로 시험 답안지가 있는 금고 열쇠를 얻어야 했던 네 명의 아이들 (발로쟈, 빠샤, 비쨔, 랼랴)이 엘레나 선생님의 집에 방문하면서 시작된다. 아이들은 엘레나의 생일을 축하한다며 비싼 크리스털 잔을 선물하고, 술을 건네고, 함께 춤을 추는 등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한다. 엘레나는 처음에는 거절하지만, 아이들의 진심 어린 호소에 하릴없이 부탁을 받아들인다. 어느 순간 아이들은 엘레나에게 시험 답안지를 얻고 싶다는 흑심 가득한 목적을 밝힌다. 엘레나는 심히 당황스러워하며 아이들을 내보내려 한다. 그러나 엘레나에게 했던 선행을 무기 삼아 언급하며 악행을 거듭한다. 상황이 극단으로 치달아가면서 아이들은 도덕적으로 잘못되었음을 깨달아가지만, 계속하라는 발로쟈의 명령에 멈추지 않는다. 끝내 발로쟈는 최후 선택이라며 랼랴를 강간하려 하고, 엘레나는 체념한 듯 열쇠를 내민다. 이후 엘레나는 극도로 충격을 받아 화장실에서 나오지 않는다. 랼랴는 그러한 엘레나에게 눈물로 호소를 하며 연극은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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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악/ 기득권과 비기득권의 대립 구도



엘레나는 ‘선’과 ‘진실성’이 사회의 전반에 자리하여야 한다고 믿고, 아이들이 그러한 결과를 끌어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반면 발로쟈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타인을 무너뜨리는 것도 서슴지 않는 ‘극악무도한’ 인물이다. 극은 근본적으로 두 캐릭터가 가진 신념의 대립을 통해 진행되고, 갈등을 쌓아간다.

 

여기서 필자는 발로쟈의 특성에 주목했다. 발로쟈는, 왜 악행을 저지르냐는 물음에 그저 “재밌어서”라고 답한다. 그는 “저한테는 아무 문제가 없다”라는 이야기를 구태여 보탬으로써, 자신은 다른 아이들과 달리 무언가를 얻기 위해 절박하게 힘을 쏟지 않아도 되는 상황임을 역설했다. 이는 일종의 우월의식에서 비롯한 것으로, 본인의 위치를 다른 사람들보다 더 높은 곳에 상정한 데서 기인한다. 기득권으로서의 면모를 톡톡히 보여준 셈이다.

 

이러한 기득권과 비기득권의 구도는 여성과 남성의 이분법적인 분류를 통해서도 드러났다. 이는 발로쟈가 자신의 말에 승복하지 않는 랼랴를 ‘야 여자애’라고 호명하며 자신의 권력을 강조한 것이나, 선생님이 힘 있는 ‘남자아이들’을 설득하는 데 지쳐, 랼랴만 불러 설득을 하고자 한 데서 그러했다. 여기서 랼랴가 대부분의 시간 동안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랼랴에게 아무런 의견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아무리 의견을 피력해도 무시되고, 힘의 역학 관계에 의해 밀려나기 일쑤였기에 함구했던 것이다. 발로쟈는 도리어 ‘너는 똑똑하니까 할 수 있지?’ 따위의 말로 자신의 계획에 따라 랼랴를 조종하려 들곤 했으니 말이다.

 

한편 극 중에서 발로쟈는 ‘비쨔’를 두고 ‘사회의 쓰레기’라 칭하며, 엘레나에게 따진다. 왜 자꾸 비쨔를 감싸주냐고 말이다. 이에 선생님은 ‘비쨔는 희생자다’라고 답한다. 이는 이분법적인 구도 속에서, 비쨔가 철저하게 발로쟈에게 이용당한 ‘약자’의 입장에 놓였다는 사실의 표명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봤을 때 ‘여성’이란 생물학적인 구분법에 따른 성별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약자의 위치에 입장한 이들 전부를 특정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철저히 악에 위치한 발로쟈가 단순히 생물학적으로 여성에 해당하는 이들에 한해서만 무력을 사용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렇다.

 

 

 

아이들은 희생자다?



아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아이들은 잘못된 교육적 체계의 희생자라고도 해석할 여지가 있을 것이다. 계급사회가 종식되었음에도 여전히 사회에는 보이지 않는 계급이 존재한다. 능력에 따라 사람을 판가름하는 사회에서는 더 놓은 학벌을 가진 사람을 우월하게 보는 시선이 짙게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꿈을 가져야 한다’는 말을 끊임없이 한다. 그러나 획일화된 교육 환경 속에서 아이들이 다양한 꿈을 갖기는 어려울뿐더러, 이루기도 어렵다.

 

그러나 교육에서는 목표를 이루는 것이 전적으로 학생들의 노력에 달려 있다고 주장한다. “진정한 재능이 있다면 자신의 길은 저절로 찾아지게 되어 있어!”라는 엘레나 선생님의 대사에서도 알 수 있듯 말이다. 또한 험난하고 복잡한 세상임에도, 끊임없이 선과 진실성을 추구하기를 요구한다. 이는 “위선자들! 우리가 도대체 어떤 애들을 교육하고 있는 거야?”라는 엘레나의 물음에, 발로쟈가 “질문의 형태를 바꿔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애들을 어떻게 교육한 거지? 이렇게요.”라고 답한 이유와도 일치할 것이다. 작가는 이렇듯 사회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지 않은 채, 아이들에게 무조건적인 노력과 희생만을 강요하는 기성세대의 부조리한 시선을 꼬집는다. 또한 아이들이 선하기를 바라면서 그에 관한 교육보다는 교과서적이고 획일화된 교육만을 주입하는 교육 문제를 비판하고 있기도 하다.

 

 

 

악행을 사회 탓으로 돌리는 태도의 맹점



그런데도 발로쟈 뿐만 아니라, 아이들 전부 다 그의 생각에 동조하고 범죄를 실행했다는 점에서 가해자인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다. 이들은 “원하는 대학에 진학해 원하는 전공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라는 이유로 자신들의 행위를 합리화하고자 했다. 과연 이들의 주장은 타당한가? 여기서 잠시 엘레나의 사정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엘레나는 경제적으로 넉넉지 못해서, 병을 앓고 있는 엄마에게 더 좋은 의료 환경을 제공하지 못한다. 또한 랼랴가 선생님의 외관을 두고 아이들이 모두 웃는다고 말했을 정도로, 행색도 허름하고 유행에 뒤처지는 모습을 보였다. 결국 랼랴나, 가난하고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 밑에서 자라는 비쨔와 비슷한 환경에 놓여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엘레나 선생님은 엄마에게 더 좋은 의료 환경을 제공하겠다는 자신의 바람을 이루기 위해 ‘악’을 범한 적 없다. 더욱이 과거 애인이 “이득을 탐하는 사람이라 헤어졌다”고 밝히며, 사랑과 선을 지키기 어려운 험난한 세상임에도 신념을 잃지 않을 수 있음을 입증했다.

 

이러한 잣대에서 봤을 때 아이들의 행위는 정당화하기 어려울 것이다. 엘레나의 사정이 방증하듯, 사회적 결함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것은 곧 ‘반드시 범죄를 저질러야만 어떤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과 일치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작가는 이를 통해 개인의 의지에 의해 악행을 범했음에도, 그 원인을 사회 구조적 원인에만 존재한다고 치부하며 본인의 잘못을 합리화하는 인간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셈이다. 동시에 어떤 목적을 가지고 한없이 비열해지고 인간성을 상실한 인간들의 모습을 비판한다.

 

 

 

연극이 우리에게 남긴 것



극의 결말 부, 아이들은 결국 열쇠를 얻고 목표 이루기에 성공한다. 그러나 결국 자신들이 저지른 행위가 불러온 처참한 상황들에 망연자실해 어느 한 명 열쇠를 집어 들지 않고 곧장 엘레나의 집을 빠져나간다. 타인을 지배하는 것에 성공한 데서 오는 쾌감에 도취한 ‘발로쟈’를 제외하고 말이다.

 

결국 이들이 얻은 건 무엇이었을까. 연극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으며,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이는 앞서 말 한 사회 문제와도 깊은 연관이 있을 것이다. 더불어 극은 인간의 본질과 이상적인 인간상에 관해 물음을 던졌다. 엘레나는 아이들을 보고, ‘인간성’을 상실했다고 했다. 그러나 인간성이란 게 무엇일지, 험난한 세상에서 그것을 지킨다는 것은 어떠한 의미일지 등의 질문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이 연극은 1981년에 초연되었다. 그러나 연극 내에서 다루는 사회 문제는 아직도 자리하고 있다. 학벌주의, 능력주의와 같은 단어가 유효하다는 것에서 그렇다.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여러 가지를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된 청년들을 두고, 일명 ‘3포 세대’라는 신조어로 특정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연극은 이렇듯 사회 문제가 어느 한 시대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시대와 세대를 불문하고 벌어질 만큼 뿌리가 깊다는 점을 시사했다. 연극 내에서 비쨔가, 원하는 대학 진학을 위해서는 전 과목을 두루 알아야 현 문제를 두고, “그냥 르네상스구만! 물리학은 서정시를 알아야 하고, 서정시는 또 물리학을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시대!”라고 비유했듯 말이다. 물론 사회 전반의 문제들을 완전히 뜯어고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깊이 고찰하는 과정은 필연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테다.

 

 

[추예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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