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속하지 못한 자들, 디아스포라 기행 [공연]

고통의 연대는 가능한가?
글 입력 2022.03.1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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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디아스포라 기행_포스터.jpg

 

 

연극 <디아스포라 기행>을 보기 전, ‘디아스포라’의 어원부터 찾아보았다. 익숙하지 않은 단어였기 때문이다. 제목을 통해 대충 극의 흐름과 분위기를 가늠하는 게 습관처럼 굳어진 내게 <디아스포라 기행>은 ‘낯선 것’이었다.

 

디아스포라(Diaspora). 팔레스타인 또는 근대 이스라엘 밖에 거주하는 유대인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으나, 소문자 diaspora로 의미가 확장되면서 이주민, 국외로 추방된 난민, 초빙 노동자, 망명자 공동체, 소수민족 공동체와 같은 의미도 지니게 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즉, 자∙타의적으로 기존에 살던 곳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여 집단을 형성하는 행위, 그리고 그 집단 자체를 일컫는다.

 

디아스포라의 뜻을 확인한 나는 ‘쉽지 않겠다’란 생각이 들었다. 이주, 추방, 망명… 내가 겪지 못한 상황과 그로 인한 감정을 온전히 바라보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해하려고 노력해도 결국 완벽한 이해, 즉 공감에 가닿을 수 없기에.

 

여기서 오는 무력감이 엄청나다. 나는 초등학생 때 <까레이스키, 끝없는 방랑>을 읽었는데, 강제로 이주당한 고려인의 삶을 담은 것이었다. 이 책은 혼란과 소외, 죽음과 처절함이 세밀하게 나열돼 있었다. 난 이 책을 읽고 한동안 깊은 슬픔과 무력감에 젖어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기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하고 시체를 업고 자장가를 부르는 여자의 모습은 여전히 잔상으로 남아있다. 당시엔 어린 마음에 앞으로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것은 결코 펼치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것도 같다. ‘현실’을 외면한 채 눈 감으면, 세상은 눈 감은 나를 보고 있으며 결국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거란 사실을 알게 된 건 오래 뒤의 일이다.

 

나는 오랜만에 이 책이 떠올라 검색창에 입력했다. 소설을 펴낸 문영숙 작가의 블로그를 발견할 수 있었는데, 작가님의 프로필 소개란에는 ‘코리아 디아스포라 작가’라고 쓰여 있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것을 절감했다) 십여 년 전 책을 읽으며 겪었던 감정을 어쩌면 이번에도 느끼게 되리라, 단단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천장산 우화극장으로 향했다.

 

 

 

경계에 선 자화상



디아스포라 1.jpg

 

 

디아스포라. 흩어진 사람들. 안과 밖 그 어디에도 속해있지 못한 존재, 안과 밖을 가르는 경계선 위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존재.

 

서경식의 칼날 같은 문장들로부터 탄생한 여섯 명의 디아스포라 D가 무대 위에 오른다.

 

- 이종찬 드라마터그

 

 

재일조선인 서경식 작가의 에세이를 담은 연극 <디아스포라 기행>.

 

그 시작은 모어母語와 모국어의 차이를 알리는 것이었다. 모어는 부모에게 배운 언어, 즉 체화된 언어이며 모국어는 자신이 속한 집단(국가)에서 사용하는 언어다. 양자는 근본적으로 다른 개념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모어와 모국어가 똑같기 때문에 단어의 명백한 차이를 무시한 채 혼용하고 있다. 여기서부터 디아스포라를 근본적으로 이해할 수 없던 것이다. ‘언어의 한계는 곧 세계의 한계’다. 한 책 속 구절이 날카롭게 스치는 순간이었다.

 

공연을 보며 감탄했던 것이 있다. 바로 카메라를 이용한 현대적인 연출이다. 배우들은 카메라를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촬영했는데, 그 영상이 실시간으로 무대의 전광판으로 출력되었다.

 

카메라 앞에 거울을 두고, 배우는 망치로 거울을 깬다. 와장창! 귀가 찢어질 듯한 소리와 함께 유리는 산산조각 부서진다. 이 부분은 전광판에 실시간으로 출력되어 ‘무대 배경’으로 사용되었는데, 신선한 방식으로 몰입도를 한껏 높인 대목이라 할 수 있겠다.

 

수어 통역사가 함께 무대에 올라 진행한 것도 인상 깊었다. 수어 역시 ‘언어’다. 덕분에 언어로 인한 소외를 호소했던 1막이 더욱 와닿을 수 있었다. 이 작은 공간에서만큼은 누구도 소외되지 않았다. 세심함이 돋보이는 부분이었다. 영상과 사운드, 오브제를 통해 실존적 감각을 연극의 언어로 구현하려 했음을 포착할 수 있었다.

 

 

 

고통의 연대는 가능했다.


 

디아스포라 2.jpg


 

서경식 작가의 글을 만나서 한 사람의 독자로서 대화를 이어가도 충분했을 터인데, 오직 나만의 충동과 욕구, 그리고 나만의 공부를 위해서 많은 관객과 동료 창작자들을 연극의 장으로 끌어들인 것 자체가 애초에 잘못된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나의 역부족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이 걷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이미 저질러진 일이기에, 지금 나는 무례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을 뿐이다.

 

고통의 연대는 가능한가?

 

- 유영봉 연출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

 

위 문장은 해당 공연의 기획노트다. 위 질문에 답변한 배우들의 말이 인상 깊다. 나는 존재하기에 이곳에 있다는 공하성 배우, 내 일을 하기 위해 여기 있다는 김성환 배우. 앞으로도 살아가기 위해 라고 답한 최지현 배우. 답변 중 특히 눈에 띈 건 오프닝 인사를 주도했던 김향수리 배우였다. 김향수리 배우는 재일조선인 3세로, 디아스포라 당사자다. 공연이 끝난 뒤, 커튼콜 때 눈물짓던 모습은 ‘나의 존재’를 알리러 여기에 있다던 그녀의 답변과 오버랩 되어 뭉클했다.

 

여기에 있다. 존재를 알리러, 여기에 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타인을 통해 ‘나’를 규정하고, 이해한다. 나는 이전까지 디아스포라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 했고, 필연적으로 누군가의 ‘타인’이 되는 나는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그들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었다.

 

해당 공연은 디아스포라의 목소리를 담았고, 그 외침은 나를 비롯한 곳곳으로 퍼졌다. 이 연극은 그것만으로도 큰 의의가 있다. 안과 밖, 어느 한쪽이 아닌 사이 공간에서 生의 얼굴을 노래해온 디아스포라. 속하지 못한 자로 살아온 이들의 세계는 어느덧 부피를 키워 ‘내부’의 사람들에게 닿았다.

 

다시 초두로 돌아가 보겠다.

 

난 십여 년 전 책을 읽을 때와는 달랐다. 단순히 아픔을 공감하고 무력을 느끼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나는 90분 동안, 지하의 한 작은 공연장에서 통렬한 성찰을 했고, 디아스포라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했다. 물론 평생을 ‘외부’에서 살았던 이들의 낱낱을 ‘내부’의 사람인 내가 전부 이해하고 공감할 순 없다. 그것은 외려 디아스포라의 삶을 납작하게 눌러 바라보았다는 의미일 테다. 다만 이 90분의 시간과 이를 기점으로 앞으로 이어질 실존에 대한 고민은 ‘내부’와 ‘외부’를 긴밀히 연결하는 끈이 되어 연대를 이룰 것이다. 고통의 연대는 가능했다.

 

 

* 공연장 내부 사진은 허가받은 커튼콜 촬영임을 밝힙니다.

 

 

에디터 태그_권수현.jpg

 

 

[권수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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