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책으로 물드는 시간 [도서/문학]

책의 말들 - 100개의 문장, 100편의 이야기
글 입력 2022.03.14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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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인사이트 공동 저자 프로젝트에 참여했을 때가 또렷이 떠오른다. 원고는 말할 필요도 없었고 세 줄 자기소개조차도 고민되어 글자를 썼다 지웠다, 멍해졌다 정신을 차렸다를 반복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나를 짧게 소개하는 것뿐인데 왜 고뇌하고 있냐고! 그렇게 스스로를 책망하다 남긴 세 줄의 마지막 문장은 이랬다. 미래에 어떤 내가 되든 여전히 읽는 사람이고 쓰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말하자면 그건 나의 지독한 다짐이자 빗나가지 않길 바라는 예언이었다. 먼 훗날에도 생각하고 표현하는 사람이 될 거라는, 일종의 주문 같은 것. 종이책 한 면에 글자로 남겨 놓으면 더 높은 효험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적어낸 사사로운 욕심 같은 것. 주문을 걸고, 욕심을 부린 이유는 간단하다. 나는 글을 읽고 쓰는 것을 좋아하지만 부끄럽게도 그것을 부지런히 해내는 사람은 아니라서.


특히 읽는 것이 그러했다. 읽었던 책만 읽거나 특정 분야의 책만 읽곤 했는데, 그마저도 작년까지는 손에서 놓고 있을 때가 잦았다. 아니, 거의 놓고 살았다. 자격증 시험, 자소서, 면접 준비, 아르바이트, 옹색하게 둘러댈 핑계는 많았으니까.


그 핑계 많은 손에 다시 책을 쥐여준 것은, 다름 아닌 '책'이었다. 새해가 되면서 만난 한 권의 책 덕분에, 다행히도 '작년까지는'이라며 과거형 시제를 쓸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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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것에 온 정신을 다 기울여 열중하고 그것에 깊이 파고드는 사람을 만나면 나도 모르게 멍하니 바라본다. 멋있다, 부럽다를 연신 중얼거리면서. 때로는 나와 비교하고 부끄러워하면서, 때로는 내 속에 잠들어 있던 열의를 깨우면서. 그 사람이 가진 열정과 에너지와 사랑은 너무도 뜨겁고 강해서 순식간에 나에게로 번져온다. 그리고 그 번짐은 나를 어떤 식으로든 움직이게 만든다.


『책의 말들』을 읽고 나서 다시 책을 집어 들었다. 이 책은 책을 아끼고 사랑하는 작가의 마음이 절실히 느껴지는, 마치 한 편의 연서와 같은 모습을 보인다. 어릴 적부터 함께해 온 책과의 추억, 문학에 대한 고찰, 종이책에 가지는 애정, 글 읽기와 글 쓰기에 대한 자신만의 해석 등 다양하고 깊은 사랑 이야기가 담겨 있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이 책은 책으로 건축되어 있는, 책으로 만들어진 책으로 만들어진 책이다. 왼쪽 페이지에는 책에서 발췌한 책에 관한 문장이 있고, 오른쪽 페이지에는 그 문장에 관한 그만의 글이 실려 있다.

 

이러한 중층 구조를 따라, 나도 『책의 말들』 속 책에 관한 저자의 문장을 발췌해 보았다. 그리고 그 문장에 관한 나만의 글도 더해 보았다.

 

*

 

 

나는 절박해졌다. 집중력을 유지할 수 있고, 작은 글씨를 무리 없이 볼 수 있고, 좋은 자세로 앉아 있을 수 있고, 활발하게 지적 활동을 할 수 있는 시간이 몇십 년 되지 않는다는 것을 갑자기 깨달았기 때문이다.

 

읽으려던 책을 결코 다 읽지 못할 것이다. 지금 당장 읽어야 한다. 매일 읽어야 한다. 고요 속에서 읽고 또 읽는다. 이걸 다 읽고 죽어야 한다.

 

김겨울, 『책의 말들』 (유유, 2021)

 

 

절박함을 느낄 만큼 무엇인가에 진심인 적이 있었나, 스스로를 돌아본다. 글쓰기를 좋아하면서 쓰는 것의 출발인 읽는 것마저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나, 스스로를 다그친다. 생각해보면 나는 항상 끓지 않는 물과 같았다. 따뜻해지기는 해도 뜨거워지지는 않는. 열광하고 몰두하는 사람을 보면 부러웠고, 또 부끄러웠던 이유다.

 

이 책은 글, 책, 독서의 이야기를 주로 들려주고 있지만, 그 이야기는 훨씬 더 포괄적이고 깊숙한 곳까지 건드린다. 내 삶에서, 내 생활 속에서 열정과 열심을 찾게 만든다. 좋아하는 일에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는 이유로 절박해 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한다. 그리고 그 절박함이 오히려 힘이 되어 돌아올 것 같다는 상상도 해본다.

 

지금 당장 읽어야 한다고, 다 읽고 죽어야 한다는 그의 말은 비장하게 들리기까지 한다. 이상했다. 그 비장함이 다른 어떤 말보다 독서의 가치를 다시 인식하게 했다. 작가는 책을 읽어야 한다거나 책을 읽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저 부드럽고 다사롭게, 한편으로는 단단하고 힘차게 독자를 책의 세계로 인도한다. 인도된 책의 곳곳에는 그가 가진 책에 대한 애정이 진하게 묻어 있어서, 읽는 동안 자연스럽게 독서에 대한 갈증이 인다.

 

 

책 읽기는 느린 행위다. 책 읽기는 우리에게 멈춰 서도록 요구한다. 눈과 귀로 쏟아져 들어오는 정보를 허겁지겁 처리하는 대신 천천히 생각하도록 요청한다. 어떤 책에는 저자가 과속방지턱을 많이 설치해 두는데, 그러한 과속방지턱은 몇 날 며칠에 걸친 고민으로 닦아진다. 성실한 독자는 그 과속방지턱을 갈라 보고 잘 닦아진 도로를 문질러본다. 독서란 곧 경청이며, 경청이란 곧 집중하고 반응하고 되묻는 일이다.

 

그러므로 책 읽기란 얼마나 비효율적인 행위인가. 그러나 비효율이 곧 우리가 삶을 버틸 수 있게 만들어 주는 힘임을, 더 나아가 아름답게 만들어 주는 힘임을 경청하는 이들은 안다.

 

김겨울, 『책의 말들』 (유유, 2021)

 

 

빠르고, 즉각적이고, 효율적이고, 편리하고, 간단한 것만 즐기고 찾는 요즘이다. 과정을 음미하고 만끽하기보다는 당장의 효과와 결과를 바란다. 그래서 책과 점점 멀어졌던 것도 같다. 은연중에 투자 대비 성과, 가성비를 따져온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책을 펼칠 때마다 찾아올 변화를 무척 기대하고, 독서 후 달라진 점이 있는지를 고집스럽게 파헤쳤는지도 모른다. 책 몇 권으로 작게는 습관이, 크게는 인생이 바뀌고 그 속에서 삶의 진리를 탐구할 수 있지 않을까, 지나치게 극적인 생각을 하면서.

  

이러한 내게 저자는 말한다. 책 읽기는 느린 행위, 경청이며 그래서 비효율적인 행위라고. 이 사람이 나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집중해서 읽고, 밑줄도 치고, 질문도 하는 것이 그 책을 최대한으로 읽어내는 경청의 방법이라고.

 

느리고 비효율적이라고 해서 불필요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천천히 나만의 생각을 키워나가는, 그 어떤 것보다 건설적이고 생산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 걷고 또 걷다가, 불현듯 뒤를 돌아봤을 때 무수히 찍혀 있는 발자국처럼 독서는 차곡차곡, 차근차근 쌓여가는 것이 아닐까.


이외에도 그가 말하는 책 읽기란 이렇다. "여러 사람이 평생 연구하고 생각해서 만들어 낸 결과물을 한자리에 앉아 배우는 일. 평소에 잘 쓰지 않는 생각의 근육을 씀으로써 조금 더 오래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일. 세상을 보는 시각을 구석구석 넓히고 나의 어리석음을 깨닫는 일. 그리고 학자들조차도 책에 담지 못한 삶의 장면을 가늠해 보는 일." (김겨울, 『책의 말들』 (유유, 2021))

 

*

  

그래서, 오늘도 나는 책을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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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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