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무엇보다도 우리는 ‘헤다가 왜 자살했는가’를 알 필요가 있다 : 헤다 가블러 [희곡]

글 입력 2022.03.06 16:34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 등장인물

헤다 가블러 – 가블러 장군의 딸

예르겐 테스만 – 그녀의 남편, 갓 문화사 분야의 박사 학위를 딴 33세의 남자

미스 율레 테스만 – 예르겐의 미혼인 고모

테아 엘브스테드 부인 – 헤다의 동창, 뢰브보르그의 연인

에일러트 뢰브보르그 – 예르겐의 대학 동창, 엘브스테드 가의 가정 교사

브랙 판사 – 테스만의 친구, 45세의 독신주의자

 

 

131.jpg


 

<세일즈맨의 죽음>의 윌리가 그랬듯, <로미오와 줄리엣>의 로미오와 줄리엣이 그랬듯, <갈매기>의 콘스탄틴 트레플레프가 그랬듯, 우리는 지금껏 등장인물의 자살로 무대의 막을 내리는 작품들을 많이 보아왔다. ‘극 중 인물들은 자신이 직면한 상황에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하다가 결국 자살을 택한다’의 상황은 너무나도 빈번하게 벌어지기에 이제 관객에게 이 ‘죽음’은 마치 작품을 마무리 짓기 위한 수단으로 자리 잡은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맞다. 실제로, 죽음이라는 장치는 등장인물을 무대에서 퇴장시킬 수 가장 쉬운 방법 중 하나다. 하지만 잘못 쓰일 경우 동시에 아주 비겁하고 이기적인 방향으로 희곡을 전개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전락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 캐릭터가 주어진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죽거나 무대를 떠나버린다면 이는 작가가 캐릭터를 제대로 구축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입센의 희곡 <헤다 가블러>에서의 죽음은 헤다에게 수단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로 보인다. 즉, 죽음을 통해 현실에서 도피하거나 죽음을 통해 무엇인가를 이루려 하기보다는 헤다는 오랫동안 죽음 그 자체를 갈망해 온 것처럼 보인다.

 

 

 

"헤다는 누구인가?"


  

그렇다면 헤다는 누구인가? 누군가는 그녀를 두고 별스럽고 사악한 여자라 한다. 헤다는 누구인가? 다른 누군가는 그녀가 시대와 맞지 않았던 희생양이라 한다. 헤다는 누구인가? 또 다른 누군간 사회의 모순을 죽음으로 맞서는 이상주의자라 한다. 또한 결혼제도에 환멸을 느끼고 집에서 쫓겨난 <인형의 집>의 노라처럼 엄마가 되기를 거부하는 페미니스트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나에게 그녀는 한 단어로 정의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오만하고 질투심이 강하지만 동시에 그만큼 소심한 인물이자 사랑을 조롱하고 비웃지만, 끊임없이 사랑을 갈구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입센의 작품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여성 캐릭터들과는 달리 프로타고니스트인 헤다는 분명한 자기 정체성을 지닌 인물이자 자신의 삶이 타인에 의해 휘둘리기를 거부하는 여성이라는 점이다.

 

그녀는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삶까지도 통제하고 싶어 한다. 실제 헤다가 이미 테스먼과 결혼한 시점에서 연극이 시작되고, 작품의 제목이 <헤다 테스먼>이 아니라 <헤다 가블러>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독자들은 쉽게 그녀가 누군가의 아내가 아닌 독립적인 개인으로서 존중받기를 원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녀의 바람과 달리 그녀는 개인으로서 인정받는 데 실패한다. 그리고 그 실패는 그녀를 자살로 내몬다. 그렇다면 결국 희곡 <헤다 가블러>는 ‘헤다는 왜 자살을 해야 했는가?’를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크기변환]거실.jpg


  

총 4막으로 구성된 <헤다 가블러>는 헤다와 그녀의 남편이 신혼집을 마련한 테스먼의 별장 거실을 배경으로 한다. 호화롭지만 동시에 완전히 어두운 이 공간은 수많은 꽃들로 장식되어 있다고 묘사되는데 이는 작품에서 중요 점을 시사한다. 이 공간 자체가 헤다의 삶에 대한 무게를 상징하는 은유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다른 등장인물들은 자유롭게 무대에 등장했다가 퇴장하는 반면, 헤다는 4막 동안 이 공간을 떠나지 않는다. 때문에 그 공간은 그녀가 가진 유일한 공간이자 감옥이기도 하다.

 

문제는 그녀의 공간에 침범하는 많은 사람이 그녀를 억압한다는 사실이다. 테스먼을 위해 맹목적으로 살아가는 율레 양부터 헤다에게 자신의 욕망을 드러낼 기회만을 기다리는 브랙 판사, 남의 눈치는 보지도 않고 사랑만을 좇는 엘브스테드 부인까지. 모두가 그들의 방식대로 헤다를 지치게 만든다. 예를 들어, 율레 양은 헤다를 테스먼의 사회적 지위를 높여주는 수단으로 보고, 헤다의 남편 테스먼은 헤다를 위해 모든 것을 해줄 것만 같이 굴지만, 종국엔 헤다의 일을 헤다가 아닌 다른 사람과 상의하는 식이다. 심지어는 무대에 등장하지 않는 리나 이모까지 헤다를 질식시킨다.

 

그렇게 조금씩, 헤다는 자신을 옥죄는 주변 사람들의 압박을 느끼며 이 모든 상황에 염증을 느낀다. 그러던 중 그녀의 눈앞에 옛 연인이던 뢰브보르그가 나타난다. 헤다는 다른 인물들과 달리 뢰브보르그만큼은 자신이 그의 생사를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뢰브보르그조차도 헤다가 의도한 바와 다른 방식으로 죽는다. 이로써 그녀는 다른 이의 삶을 통제하거나 소유하는 데 완전히 실패하고 만다. 이때 브랙 판사가 와서 헤다를 위협하고 통제하려 든다. 남에게 지배당할 위기에 처한 그녀는 주저 없이 자신을 향해 소총을 발사한다.

 

 

141.jpg


 

 

"그녀는 왜 자살했는가"


  

그녀는 극의 초반부터 오래되고 축적된 권태에 사로잡혀 있는 여성이었다. 삶의 목적도, 의미도 없이 그저 지루함에 빠져있던 그녀에게 생(生)이란 한순간에 의미가 생길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현실은 헤다에게 무의미하기 때문에. 그녀가 단순히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 자살을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맞지 않게 들린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헤다에게 모든 것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러니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헤다가 만들어낸 울타리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따위는 헤다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은 일 같다는 것이다. 그녀는 단지 그녀를 고무시킬 수 있는, 울타리를 조심스레 두드리는 무언가 또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마치 그녀의 옛 연인이었던 뢰브보르그처럼 말이다. 헤다는 테아가 뢰브보르그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참을 수 없는 질투심을 느꼈다. 그리고 극의 후반에 가서 헤다는 뢰브보르그가 자살하도록 격려한다. 그녀는 아마도 타인을 파괴함으로써 해방감을 느끼고 싶었던 것 같다.

 

이 장면에서, 뢰브보르그는 헤다를 대신해 간접적으로 "미학적 자살"(Lyons, 1991: 12)을 행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뢰브보르그를 통한 '아름다운 죽음'이 실패로 돌아갔을 때 -다시 말해, 헤다가 생각한 방식으로 뢰브보르그가 죽지 않았을 때- 헤다는 자신이 직접 죽음으로써 미학적 죽음을 완성시키려고 했던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바로 헤다가 자살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생을 후회없이 버리고 특히 추문에 휩싸일 뻔한 상황에서도 존엄의 이상(理想)을 지켰다.

 

 

 

"헤다 테스먼 혹은 헤다 가블러가 아닌, 그냥 헤다"


 

그녀가 유년 시절부터 타인에 휘둘리던, 그녀의 온전한 삶을 살지 못해왔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헤다 가블러의 자살은 용감했던 자기표현의 형태로서 보인다. 이제 헤다는 성공적으로 무대를 떠났다. 무대에 남아있는 이들은 헤다가 왜 죽었는지에 대해 계속해서 생각할 것이다. 그들이 헤다의 죽음을 결국 이해하게 될지 아닐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런 것들은 이제 중요하지 않다. 헤다는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자기실현을 완성했고 비로소 자기 자신이 되었다. 누군가에 종속된 개체가 아닌 독립적인 개인으로서 인정받기를 바라는 이 여성은 죽음으로 헤다 '테스만'이나 헤다 '가블러'가 아닌 그저 헤다로서 영원히 남을 것이다.

 

 

참고

Lyons, C.R.(1991). Hedda Gabler: gender, role, and world. Boston: Twayne

 

 

[박민경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이름
비밀번호
자동등록방지
38267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E-Mail: artinsight@naver.com   |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Copyright ⓒ 2013-2022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트(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