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우리가 발견한 얼룩들 - 다정한 얼룩

글 입력 2022.02.20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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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는 왜 읽는 걸까. 소설을 한창 읽던 시기에는 그런 생각을 했더랬다. 늘 현실에 없는 사람들에게 끌렸으니까. 이야기 사이를 둥둥 떠다니던 시절을 지나 현실에 발을 디디고 나니 에세이가 눈에 들어온다. 에세이를 읽을 때면 소설을 읽을 때와는 반대로 그 속에 나오는 사람이 실제 현실에서 숨을 쉬고 있다는 데 놀란다. 주변을 둘러보면 많은 에세이 독자들이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구나'와 '이 세상에서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사이를 오가며 공감하고 위로 받는다. 내가 에세이를 읽지 않았던 건 현실에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책으로까지 보고 싶지 않아서였는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사람들은 에세이를 읽는다는 것을 깨달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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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 딸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젖은 머리의 물기를 튕겨주는 일. 특별한 생색 없이 평범하게 이어지는 손길. 그럼 아빠는 나를 사랑한 것일까. _59쪽
 

 

<다정한 얼룩>은 저자 '한량'의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다. '어떤 남자들에 대하여'라는 부제를 보며 저자의 지난 연애담이 펼쳐질 거라 예상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책에 등장하는 남자는 할아버지, 아버지, 남편, 친구들, 그리고 아들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저자가 만나고 함께 살아온 이들이다. 저자에게 이 남자들은 끊어낼 수 없는 뿌리이고 평생을 함께할 동반자이면서도 때론 밉고, 이해하기 어려운 이들이다. 원했건 원치 않았건 삶 속에 이 남자들을 들이며 저자는 다양한 인간관계를 맺었다. 그 관계 속에서 상처받기도 하고 기대기도 하며 성장했다. 그렇게 지금의 저자가 되었다. 따라서 저자의 삶 속 남자들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가 곧 어떻게 지금의 저자가 되었는지 지난 날을 복기해보는 과정에 가깝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 중고등학교 시절, 대학생 시절, 남편을 만난 순간과 아이를 낳고 기르던 때... 책에는 저자의 삶 속 다양한 시기가 두서 없이 펼쳐진다. 생판 모르는 남의 역사는 내 과거를 자꾸만 상기시켰다. 저자가 어릴 적 가족과 함께 캠핑을 떠났던 이야기를 읽으며 나도 어릴 때 갔던 가족여행을 떠올렸다.  학창시절 국어선생님을 좋아해서 국어공부를 열심히 했다는 대목에서는 나 역시 떠오르는 선생님이 있었다. 라디오에 푹 빠져서 좋아하는 프로그램 dj를 마음 깊이 좋아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에 나 역시 처음 좋아한 연예인이 라디오 dj이였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우리는 어쩌면 같은 시간대에 라디오를 들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저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을 뿐인데 나는 거기서 자꾸 나를 발견해냈다.


 
세상 모든 사람 다 가진 젖꼭지를 가리기 위해 브래지어를 해야 하고, 브래지어 끈을 가리기 위해 러닝셔츠를 꼭 입어야 한다는 것은 그 시절, 감히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만큼 준엄한 명령이었다. 시간이 한참 지나 어떤 여행길, 차를 세우고 풍덩 뛰어든 바닷가에서 가릴 것 없이 훌훌 벗어던진 몸들을 마주쳤다. 문득 그때 이 교실이 떠올랐다. 끈도 러닝셔츠도 우격다짐과 미친년 어쩌고 하는 쇳소리도 없는 세상. 더없이 청명하고 맑은 하늘엔 갈매기들이 낮게 날고 있었다. 그때의 선생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아직 살아 있을까? 설마? _123쪽
 


책의 부제는 '어떤 남자들에 대하여'지만 그 남자들을 말하는 과정에서 저자의 관점과 특성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이 책은 저자 '한량'의 책이면서 동시에 30대 여자에 대한 책으로도 읽힌다. 여성 독자로서 특히 이입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았다. 교회에서 경험했던 성차별, 학교에서 나눠준 '순결캔디', 어느 아침 산책길에 마주친 괴한 등.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결을 지닌 경험들이 내게도 있다. 여성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성추행을 한 번도 안 겪은 사람이 드물다던 얘기가 떠오른다.

 

개인의 고유한 이야기가 특정 집단에 속한 사람들에게 보편적인 경험으로 인식될 때, 이것을 단순히 개인적인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지 질문하게 된다. 임신과 출산 경험을 이야기하는 글에서 저자도 같은 문제 제기를 한다. 여성의 임신, 출산 경험에 대하여, "굉장히 보편적인데 지극히 개인적인 고통이 되고야 만다. 원래 그렇대, 다들 그렇대로 수렴하는 고통들(304쪽)"이라고.

 

물론 고통의 관점으로만 이 에세이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에세이에 담긴 삶은 훨씬 더 복잡하고 입체적이다. 정답이 없는 삶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문장들을 읽다 보면 역시 인간은 이야기를 만드는 존재라는 걸 실감한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일어난 일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인과관계를 만든다. '다정한 얼룩'들은 그렇게 생겨났을 것이다. 무언가가 머물다가 떠나간 자리, 우리가 지나온 날들의 흔적을 발견하고 거기에 이름을 붙이기 시작하면서. 비록 얼룩일지라도, 그 얼룩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내가 아닐 테니 그 얼룩들은 '다정한'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나도 나만의 '다정한 얼룩'을 찾아가는 과정을 겪었다. 지금의 나를 만들어 온 여러 가지 기억들을 좀 더 따뜻한 시선으로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앞으로 새롭게 생겨날 얼룩들을 마주할 용기가 생기기도 했다.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나보다 조금 앞서 살아가고 있는 저자를 보면 나도 괜찮을 것만 같다. 잘 알지 못했던 에세이 읽는 묘미를 <다정한 얼룩>을 읽으며 알게 되었다.

 

 

[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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