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오! 수정 [영화]

영화 <오! 수정>, 홍상수 감독, 2000년 작
글 입력 2022.02.0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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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지극히 주관적인 재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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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훈과 수정은 하나의 사건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편집하고 기억한다. 그렇기에 둘의 첫 만남은 우연과 의도라는 두 갈래로 나뉘어 해석된다. 어느 정도 서로를 대상화해 이해할 수밖에 없는 연애 관계에서 해석과 의미부여는 각자의 몫이다.
 
수정은 영수를 따라간 갤러리에서 재훈을 만나 술자리를 가지게 된다. 우연한 만남처럼 보이지만 이는 영수가 재훈의 경제적 지원을 얻기 위해 수정을 매개로 마련한 자리다. 두 남자의 암묵적인 상호교환이 이루어지는 동안 수정은 의지도 의사도 없는 그저 하나의 상품으로 자리한다. 재훈에겐 이 첫 만남이 의도일 것이고, 수정에겐 하나의 우연일 것이다.
 
두 번째 만남은 경복궁에서 이뤄진다. 재훈이 벤치에 놓고 온 장갑을 수정이 찾아다 준 사건은 서로의 존재와 이름을 각인하는 계기가 된다. 재훈은 수정과 우연히 마주쳤다는 사실과 더불어 수정이 자신의 장갑을 들고 온 것에 무척 신기해한다. 재훈은 이를 운명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수정이 점심을 항상 경복궁에서 한다는 재훈의 말을 흘리지 않고 기억해 두었다가 촬영장소를 옮겼던 사실이 후반부에 드러난다. 경복궁과 장갑은 우연을 가장한 계획된 시나리오다. 재훈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수정의 기억 속엔 처음 만난 갤러리 앞에서 재훈이 개인 기사에게 용돈을 건네준 장면이 또렷하게 남아있다. 이것은 재훈에 대한 최초의 기억인 동시에 그에 대한 호기심(또는 호감)을 품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된다.

재훈은 자신이 먼저 "혹시 그거 제 장갑 아니에요?"라며 수정의 손에 들린 장갑을 발견한 것으로 기억하지만, 수정의 회상에선 수정이 먼저 "이거 선생님꺼 아니에요?"라며 장갑을 건넨다. 그리고 재훈의 것이 진짜 맞냐며 조금은 과장된 태도로 신기함을 표현한다.


이렇듯 재훈과 수정이 서로를, 그리고 스스로를 인식하는 데에 어쩔 수 없는 괴리가 발생한다. 재훈은 대체로 수정을 수동적이고 말이 없으며 신비로운 개체로 그린다. 재훈에게 수정은 한껏 밀어내다가도 돌연 "제가, 술 마실 때만 애인해드릴까요?"라고 말하는 매력적인 여자다. 수정이 정말 그 말을 했는지 아니면 재훈이 여성에 대한 개인적인 판타지를 투영해 상상한 것인지 진실 여부는 알 수 없다. 재훈이 자신이 욕망하는 각도로 수정을 바라보고, 판단하고, 대한다는 한 가지만이 확실하다.
 
재훈의 기억에서 수정은 한때 자신도 잘살았으며 재훈과 같은 외제 차를 탔었다고 말한다. 그는 차에서의 그 대화와 표정 그리고 잠시 머물다 간 편치 않은 공기를 자세히 떠올린다. 이 장면을 통해 그가 수정을 처지가 불쌍하고 자기보다 나을 것 없는 여자로 인식하고 있음이 짐작된다. 또한 재훈은 자신이 샤워하는 동안 몰래 브래지어를 벗는 수정을 떠올리는데, 자신이 못 보는 사이 수정이 무엇을 하고 있을지 간주하는 재훈의 수준이란 겨우 이런 것이다.
 
지인의 집에서 술자리를 가진 날도 다르게 기억된다. 재훈의 기억 속 수정은 "양 작가, 그냥 노는 대로 놀아. 뭘 그렇게 얌전떨고 있어. 그냥 술 먹고 그러는 거지"라는 영수의 시비에도 조용하다. 옆에 앉아 술을 따르라는 무례한 강요에도 수정은 아무런 저항을 보이지 않는다. 재훈에게 수정은 이처럼 한없이 무력하고 순종적인 여성이다. 타인이 수정을 어떻게 대하는지, 그에 수정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에 대한 재훈의 주관은 다른 이에게도 적용된다. 그는 타인 또한 자신과 비슷한 방식으로 수정을 바라볼 것이라 생각한다.
 
수정에게 그날은 그저 영화에 대한 시시껄렁한 이야기들이 오간, 그리고 재훈이 몰래 다른 여자와 부엌에서 키스를 한 날이다.
 
그들은 오로지 자신을 기준으로 각자의 기억을 채워나간다. 그 과정은 오류와 왜곡을 수반한다. 거기엔 서로 공유되지 못한 상대방의 시간을 의심하고 두려워하다가, 자의적으로 상상해낸 이미지를 사실로 확정시켜버리는 행위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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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훈이 수정을 순진한, 혹은 제 앞에서 순진한 척하는 여자로 판단하는 것과 달리, 수정은 꽤 솔직하고 적극적인 여성이다. 수정은 때때로 수동적인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는 자신의 한계를 알고 있으며 그런 점을 경멸하기도 한다. 수정은 자기 안의 모순을 제대로 보고 끌어안을 줄 안다.

 

수정은 대뜸 활짝 웃어보라는 재훈에게 바로 "제가 뭔데요?"라며 어이없고 기분 나쁜 기색을 드러낸다. 얼떨결에 영수와 키스를 하고 난 후에도 의도가 무엇인지 직설적으로 묻는다. 섹스를 말하는 것에 소극적일 것이라는 재훈의 판단과 달리, 수정은 영수에게 "저도 페팅 같은 거는 해봤구요. 키스는 좋아해요. 키스는 정말 좋은 것 같아요."라며 무심히 털어놓는다. 택시 장면에서도 재훈은 수정이 몇 번 튕기다가 마지못한 척 올라탄 것으로 기억하지만, 수정의 기억 속엔 같이 타자는 재훈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하는 모습이다.

 

재훈은 다양한 표정을 지을 줄 아는 수정을 보지 못한다. 재훈이 수정을 하나의 일관된 이미지로만 인식하면서 그녀의 복합적인 면면들은 철저히 지워진다.

 

어긋남은 이뿐만이 아니다. 재훈은 안산이 어딘지도 모르는 서울 토박이 도련님이다. 지하철을 타 본 적도 없는 재훈과 가난한 방송작가 수정에겐 너무도 큰 사회경제적 격차가 자리한다.

 
그 때문인지 재훈은 수정과의 관계가 들통날까 전전긍긍하고, 교제 사실을 비밀로 하자고 요구한다. 결혼까지 생각하는 건 처음이라는 말까지 하면서도 재훈은 선뜻 확신을 주지 않는다. 그런 재훈을 붙잡아 두기 위해, 수정은 처녀성이라는 자신이 가진 유일한 패를 꺼낸다. 수정의 첫 남자가 자신이라는 사실에 감격한 재훈은 수정의 가치가 오직 거기에 있는 마냥 섹스에 집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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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를 두고 줄다리기하던 두 남녀는 마침내 서로가 원하는 것을 가진다. 재훈은 그토록 욕망하던 수정의 처녀성을, 수정은 계급 사다리를 올라탈 기회를 얻는다. 앞으로 서로를 위해 달라질 것이라며 끌어안는 두 남녀의 모습에 지독한 서늘함이 느껴진다.

 

 

[유여온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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